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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소리가 (시 2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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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소리가 (시 29:1-11)


제가 학창시절에 읽고 감동을 받아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시(詩)들 중에는 '비'를 소재로 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김소월 씨의 '왕십리'라는 제목의 시로서 "비가 온다 오누나 /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라고 시작됩니다.
  
이형기 씨의 '봄비'라는 시는 "밤, 봄비가 창(窓)에 스민다 기다림에 지친 마음이 젖는다 / 봄, 밤에 내리는 비 반(半) 옥타브 낮은 목소리 / 물기가 배인 육신(肉身)의 무게를 가눌 길 없고나 봄밤에 비 온다 / 먼 사람아 당신의 손길은 봄비와 같이 성가시다 잠 재워 다오"라는 시인데 제가 꽤 애송(愛誦)했었습니다.
  
중학교 국어책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이병기 씨의 '비'는 "짐을 매어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 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윽이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 /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라는 유명한 시조(時調)입니다.
  
이처럼 '비'는 시인들로 하여금 '인생의 허전함'이나 '애절한 이별' 등을 노래하게 하는 감흥을 절로 일으킵니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폭풍우'를 소재로 해서 쓴 시는, 물론 없지는 않겠지만, 제가 알고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폭풍우의 강력한 힘을 목도하게 될 때에 사람은 일단 공포심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며 그것은 시를 짓게 만드는 서정적인 감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의외로 그런 '폭풍우'를 소재로 한 시가 한 편 있는데 바로 오늘의 본문인 시편 29편입니다.
이 시편의 작가는 유능한 왕이면서도 또한 영감 있는 시인이기도 했던 다윗으로서, 그는 세상의 시인들이 별로 소재로 삼지 않는 대상을 두고 이 시를 썼을 뿐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문학가들도 결코 느낄 수 없는 놀라운 영적 감흥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봄의 계절이 시작되는 3월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신자들이 이 자연계를 볼 때마다 마땅히 감상하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할 신앙의 영감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자연계시를 통하여 '천지만물에 대하여 절대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깨닫고 영광을 돌리며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1절부터 9절까지에서 다윗은 노래하기를 "1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우선 3절부터 9절 상반절까지의 내용을 먼저 보시면, 지금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바라보면서 이 시편을 노래하고 있는지를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아주 강력한 폭풍우였는데, 다윗은 그 천둥치는 소리를 "여호와의 소리"라고 표현하면서 매절마다 자기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자연계의 장관(壯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3절과 4절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많은 물 위에 있으며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는 소리가 힘이 있고 위엄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 것은 억수 같이 비바람이 쏟아지는 가운데 천둥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높고 위대하심'을 스스로 선포하시는 '자연계시의 소리'라는 뜻입니다.
5절의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어 부순다.'라는 것은 백향목 나무들이 그런 폭풍의 힘에 의하여 꺾여 버리거나 또는 벼락을 정통으로 맞아서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6절에서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신다.'는 말은 비바람 때문에 큰 나무들의 가지는 물론이요 줄기까지 마구 흔들리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같이 뛰게 하신다.'는 말은 팔레스타인 산야 지역의 숲 전체가 폭풍 때문에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파도처럼 요동치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7절의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라는 말은 벼락이 번쩍이고 때로는 그 벼락에 의하여 수풀에서 산불이 나게 되는 광경을 연상시킵니다.
8절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신다.'는 말은 아까 "레바논과 시룐" 같은 산악지대뿐 아니라 들판지대 역시 이런 자연의 힘에 의하여 그 땅바닥부터 떨리게 됨을 가리킵니다. 
끝으로 9절 상반절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하게 만든다.'는 것은 사슴도 이런 대자연의 소리와 진동 때문에 깜짝 놀라서 새끼를 낙태하게 되는 것을 뜻하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신다.'는 말은 앞서 언급되었던 벼락에 의한 산불이 산림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금 다윗의 눈앞에서는 자연계가 요동을 치면서 엄청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산천과 초목과 동물 전체를 마음대로 뒤흔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압도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실로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런 장면을 대하게 되면 평소에는 그냥 '자연'이라고 부르던 것을 '대자연(大自然)'이라고 한층 더 높여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 필라델피아 지역에 살고 있던 어느 겨울에 제 평생 최고의 폭설(暴雪)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허리 높이까지' 눈이 내려쌓이는 것을 바로 우리 집 마당에서 체험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도로들이 다 막혀 버렸고 제설차란 제설차는 다 동원되어 새벽부터 풀가동되었지만, 치워 놓은 길에 금세 또 내려 쌓이는 폭설의 양을 따라가기에는 턱도 없이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필라델피아뿐 아니라 미국 동부의 주요 도시들 전체가 다 며칠 동안 거의 마비상태가 되었으며, 저도 제 아들과 함께 한 이틀 동안 그야말로 '허리가 휘어지도록' 눈삽을 들고 눈을 치우면서 정말 자연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제 몸으로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폭설이 내리기 전날 저녁에 제가 뉴스를 보았는데, 물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요 관심사는 온통 일기예보에 쏠려 있었습니다.
그때 그 기상통보관은 미국 동북부 지역에 '100년에 한번 올까말까 하는 폭설'이 오늘밤부터 내릴 것이라고 예보한 후에 제일 마지막으로 "This time, Mother Nature is not joking."이라는 멘트를 덧붙였습니다.
  
이 'Mother Nature'라는 말이 우리나라말로 하자면 바로 '대자연'입니다.
즉 사람이 어떻게 거스를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가진 자연임을 강조할 때 쓰는 표현으로서, 그 기상통보관은 "이번에 대자연이 가져 올 폭설은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과학과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된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조차 대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그저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라고 벌벌 떨 수밖에 다른 아무 도리가 없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이 그것을 대하는 자세는 아주 다릅니다.
지금 그런 위엄스럽고도 압도적인 대자연의 소리와 광채와 진동을 목도하고 체험하면서 다윗은 9절 하반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그 전에서 모든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무슨 '물건이나 동물'이 아니라 '그 성전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즉 세상의 불신자들은 자연의 위력을 보면서 그저 놀라고 두려워할 뿐이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모인 성도들은 이런 비와 바람과 번개와 천둥과 하늘과 땅과 수풀과 들짐승들을 통하여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살아계심'과 '당신의 전능하심'을 스스로 선포해 주시는 자연계시인 줄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불신자들은 자연 그 자체를 두려워하며 숭배까지 하게 되지만, 우리 신자들은 똑같은 자연을 보면서도 오직 그 대자연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다윗은 이 시편 서두에서부터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권능 있는 자들"이란 바로 다윗 자신처럼 세상 나라의 주권자된 왕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왕에게 자동적으로 따라붙는 것은 바로 "영광과 능력"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라는 '명예로운 영광'과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권위의 능력'이 자기 한 몸에 다 집중되어 있는 지위가 바로 왕인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처럼 '영광과 능력'으로 스스로 옷 입고 있는 세상의 모든 군왕들을 향하여 바로 그 영광과 능력을 오직 "여호와께" 돌려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돌리고 돌릴지어다"라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한갓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즉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능력'을 다 돌릴 줄 알게 된 사람에게서 연이어 나타나는 자세가 있습니다.
2절 하반절은 바로 그것을 두고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옷"이란 바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신앙의 옷', 또한 신자로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경건생활의 옷'을 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뵈올 때 입어야 할 옷은 바로 이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가장 높다 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영광과 능력의 상징인 왕복과 자기 머리에 쓴 면류관까지 다 벗어서 오직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두 바친 후에, 자기 자신은 그저 그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그 앞에서 경건한 삶을 지키는 '거룩한 옷'을 입고 엎드려 경배해야 마땅할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누구랄 것도 없이 이 시편을 쓴 다윗부터가 바로 그런 왕이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영광과 능력에 도취해서 살기 십상인 자리에 다윗 자신도 올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고 자신은 그저 거룩한 옷을 입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겸손을 지킬 줄 알았으며, '폭풍우'를 바라보면서도 그처럼 절대주권자를 경외하는 신앙을 새롭게 되새길 줄 아는, 정말 멋진 영감의 소유자였던 것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자식이 부모님을 뵈러 가면 문지방을 넘기 전에 먼저 대청마루에서 방안에 앉아 계시는 부모님께 큰절을 드리는 것이 예의였고, 저도 어릴 때 큰집에 놀러 가면 아버지와 함께 제일 먼저 할머니께 반드시 그렇게 절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전에 김영삼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에도 제일 먼저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뵙고 큰절을 올린 후에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보내어 준 대통령 당선 통지서를 부친에게 보여 드렸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이 그 어떤 높은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자기 부모 앞에서는 똑같은 자세로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을 둔 부모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부모 앞에서는 여전히 문지방 밖에서 절해야 하고,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그 권력이 자기 아버지보다 자신을 더 위에 올려주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인간사회에서는 아무리 권력자요 부자요 현자요 군자라 할지라도 이 진짜 절대주권자 앞에서는 그저 완전히 땅에 엎드린 자세로 벌벌 떨며 경배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도 남김없이 돌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뻐기고, 무슨 고시 하나 패스했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조금 돈 벌었다고 고개가 뻣뻣해지고, 조금 이 세상 사회에서 알아주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하나님 앞에서 안하무인이 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실상은 최악의 신성모독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절대주권성, 그 '높고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은 물론 성경계시를 통해서 가장 확실하고도 완벽하게 증거되고 있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다윗처럼 자연계시를 통해서도 피부적으로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들 역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그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사람은 원래부터 그런 목적을 위해 지음 받은 '특별한 피조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것'들을 두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실 때에, 우리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신적 감흥'에 맞장구를 치면서 "하나님, 정말 그렇습니다. 숲속이나 산골짝이나 새소리나 시냇물까지도 주님의 솜씨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겸손히 엎드려서 경배하며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계가 사시사철을 통하여 '여호와의 소리'를 곳곳에서 노래하는 가운데, 성전에 모일 때마다 이 모든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는 절대주권자 하나님께 '영광, 영광'으로 화답하면서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자연계시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평강으로써 다스려 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며 감사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10절과 11절에서 다윗은 "10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11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찬송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앞에 나왔던 '폭풍우'가 동반하게 되는 또 하나의 자연현상인 "홍수"를 두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벼락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것을 직접 맞게 되는 물체에만 피해를 주는 것이지만, 홍수는 훨씬 더 광범위한 지역에 큰 피해를 끼치게 됩니다.
물론 벼락과 마찬가지로 홍수 역시 사람으로서는 대항할 길이 없는 강력한 자연재해인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 살던 중에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백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하는 폭설'을 경험했었는데, 우리나라에 돌아온 후에는 '백년 만에 온 최고의 폭우로 인한 홍수'까지 당해 보았습니다.
바로 작년 추석 연휴 때에 경기도 일대, 특히 바로 이 강서구에도 큰 피해를 주었던 그 홍수였습니다.
시간당 최고 10센티미터에 달하는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쏟아 내리는 바람에 그 엄청난 물이 하수구로 다 배수될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날 낮에 요 앞에 있는 홈플러스에 장을 보러 갔었는데 돌아올 때 즈음에 보니까 강서구청 사거리의 한쪽 모퉁이, 하필이면 바로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입구가 있는 쪽이 이미 물에 잠기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자동차 바퀴가 반 가까이 잠기게 되는 그 물살을 헤치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로부터 한 15분 쯤 지났을 때에는 그 물이 차고 넘쳐서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쏟아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차를 지상주차장으로 급히 대피를 시켰는데, 조금 있으니까 아파트 지하층에 있던 발전기와 펌프 등이 다 침수되면서 전기가 나가고 수돗물까지 끊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와 제 아내는 때 아닌 '피난 보따리'를 싸들고서 입주한지 한 달도 채 못 되었던 아파트를 버리고 인근의 호텔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서 사흘인가 나흘인가를 지내고 아파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지만 여전히 '임시 발전기'를 돌려서 공급되는 전기로 한동안 생활했어야 했는데, 우리 아파트의 모든 피해상황이 완전히 복구된 것은 불과 몇 주일 전이었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홍수'가 아닌 '침수'에 불과한데도 그 물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저도 톡톡히 겪어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집이나 아파트 지하실에 물이 차 들어오기만 해도 그 정도이니 진짜 홍수나 쓰나미 같은 것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날처럼 과학과 기술이 발달된 시대에도 그렇다면 하물며 옛날 다윗 시절의 사람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런 무서운 홍수에 대해서도 아주 색다른 반응을 보이면서 10절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왕으로 좌정하셨음이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자면 '여호와께서 홍수 위에 보좌를 놓고 왕으로 앉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그처럼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홍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홍수 위에 당신의 보좌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앉아 계시는 분, 즉 홍수를 완전장악하고 계시는 분이시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홍수뿐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자연현상을 홀로 주관하시는 통치자이심을 다윗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자들은 대자연의 위력 앞에 그저 벌벌 떨 뿐이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런 엄청난 천재지변이나 자연재해를 통해서도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고 계신다"는 사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더욱 뚜렷이 보고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성도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이어지는 11절에 나오는 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불신자들은 홍수 앞에서 그저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홍수가 한번 쓸고 지나가면 집과 전토와 재산을 순식간에 다 잃어버릴 뿐 아니라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게 되지만 사람으로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그런 홍수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으며 누구나 다 그저 절망, 공포, 비애에만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은 그런 무서운 자연재해를 통해서도 오히려 '힘'을 얻고 '평강의 복'을 누리게 된다고 다윗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홍수의 위력' 그 자체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런 홍수까지도 마음대로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큰 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 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 엎어놀 능력이 없도다"라고 찬송하는 것도 바로 그런 신앙고백이 아니겠습니까?
  
홍수 아니라 무슨 공상영화에서 등장하는 '유성 충돌' 따위의 대재앙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 모든 '우주 위에 좌정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만은 결국 "사나운 광풍이 자고 큰 물결이 그치니 그 잔잔한 바다와 같이 내 마음이 편하다"라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홍수보다 더 강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홍수 정도의 재난 앞에서도 꼼짝 못하고 공포에 떨고 있지만, '홍수 때뿐 아니라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는 여호와'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그 어떤 자연재해를 당해도 이 하늘의 통치자께서 베풀어 주시는 능력과 보호와 도우심을 통하여 완전한 평안을 끝까지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은 실로 얼마나 멋진 시를 읊고 있습니까?
이것은 세상의 문학가들이 결코 쓸 수 없는, 오로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철저히 믿는 신자만이 고백하고 노래할 수 있는 너무나도 멋지고도 차원 높은 시편입니다.

자연의 위력 앞에서 꼼짝 못하고 벌벌 떨며 기껏해야 그저 대자연의 힘 앞에 감탄하는 정도밖에 못하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나 오늘날의 현대인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매년 그 횟수가 더 많아지고 강도가 점점 더 세어지기만 하는 태풍과 지진들 앞에서 문자 그대로 '나오느니 한숨'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비'를 두고는 그렇게 많은 시들을 쓰는 문인들이 '폭풍우'에 대해서는 붓을 들 마음도 잘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영감의 시인 다윗처럼 그런 대자연의 계시를 통해서 '여호와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불가해한 재앙'이나 '무작위로 일어나는 우연의 현상'이 아니라,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는 원인으로 인하여 벌어지고 있는 결과인 것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저와 여러분은 바로 그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아니하리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칠전팔기의 힘'과 '완벽한 평강'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가득 찬 영광'과 '온 땅에 충만한 존귀'로써 당신을 계시하시는 절대주권자이십니다.
그러면서도 그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과 빛으로 지혜와 권능으로'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는' 고마우신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오늘도 천하만물이 뚜렷하고도 강력하게 들려주는 '자연계시'를 통하여 살아 계신 창조주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주장하고 계심을 더욱 확실히 믿음으로써, 그 어떤 두려운 재난을 당할 때에도 바로 그런 절대주권자를 의지하는 '자기 백성'에게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힘과 평강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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