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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모르드개를 할 것인가? (에 4: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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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모르드개를 할 것인가? (에 4:7-16)


치통 때문에 치과에 가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럴 때 의사로부터 “요즘, 과로하셨나 봅니다.” 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또, 어쩌다 다른 병원에 갔을 때에도 상태를 본 의사로 부터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힘드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말인즉 치아가 좋지 않아 치통이 생긴다는 것보다는 치아 상태는 똑같은데 몸이 약해져서 치통이 생긴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모든 병이 다 그렇다고 합니다. 많은 경우에 없던 병이 새롭게 생긴다든지 갑자기 병이 심하게 된 것보다는 그동안에도 병은 있었지만 건강하기 때문에 발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새롭게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 몸이 건강했기 때문에 잘 버텨주었는데, 몸에 약해지다 보니 버티지 못하여 속에 있던 병이 발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스무 가지의 병을 평균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세 드셔서 이병 저병 생기면, 따로 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는 내 몸이 잘 버텨주었지만 이제 몸이 약해지니 그동안 있던 병이 자꾸 바깥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옛날에 다섯 가지 병이 있었다면, 그때는 내 몸이 열다섯 가지 병을 방어해 주었지만, 이제 힘이 딸리다보니 방어벽이 약해졌다는 말이 됩니다. 

육체의 질환뿐만 아니라 마음의 질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의 질환이 있습니다. 자폐증 환자의 자폐 증세를 보면 나에게도 그 자폐증세가 있고, 우울증도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그 우울증세가 있습니다. 얼마나 강한 방어벽이 있는가에 따라서 환자이고 환자가 아닌 것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병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 중 두려움이 있습니다. 심하게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 좀 덜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욕심도 병입니다. 그만하면 충분히 만족할 것 같은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려고 하고, 더 평안하려고 하고,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병이고 질환입니다.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마음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버림받은 마음 이것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죄의식도 그렇습니다. 좀 덜하고 더한 차이는 있겠지만 심하면 질환으로 드러납니다. 견디지 못하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 견디지 못하고 외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그렇고 조울증 환자도 그렇습니다. 공황장애가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의 질환이 다른 사람보다 유독 심한 것은 옛날에 더 심한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주변 환경이 주는 영향 때문입니다. 즉 내가 그로 말미암아 가지고 있는 방어벽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전투를 할 때 1연대, 2연대, 3연대 등 방어벽이 있듯이 우울증이라는 연대, 분노라는 연대가 있는데, 그 연대가 무너지면 우울증이라는 병, 분노라는 병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척추질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척추질환이 많고 저도 간혹 좋지 않은데 척추질환은 어떤 사람에게 생깁니까? 척추가 약한 사람에게 생기겠습니까?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 척추를 둘러싸고 지배해주고 있는 근육, 우스갯소리로 한다면 등심이나 안심 속에 있는 근육이 약해져서 버텨주지 못하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척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뼈 밑에 살 비슷한 것이 있고, 또 그 밑에 뼈가 있고, 그 뼈 밑에 살 비슷한 것이 돌멩이 쌓은 것처럼 쌓여있는데 이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근육이 튼튼해지면 되는데 그것이 무너지면 척추질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간혹 본래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래 나쁜 사람, 본래 좋은 사람이 따로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 똑같습니다. 누구나 나쁜 면도 있고 좋은 면도 있습니다. 또 선한 면도 있고 악한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선한 것이 악한 것에 비해 약해서 악한 것을 드러내고, 또 어떤 사람은 선한 것이 강해서 선한 것을 드러냅니다. 누구나 결정적일 때 영 다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본래 심약하고 허약한가, 병이 있느냐, 없느냐, 척추가 건강한가, 아닌가, 혹은 좋은 사람인가 혹은 나쁜 사람인가는 내 건강이 흔들려보아야 압니다. 좋지 않은 환경이 나에게 닥치면 선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다 드러나게 됩니다. 

페르시아가 유대를 통치할 때, 페르시아 왕이 왕비를 폐위시키고 그 후임 왕비를 간택하는데, 식민지 출신인 에스더라는 한 처녀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사촌 오빠 모르드개 라는 사람이 키웠습니다. 예쁘게 잘 키워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스더를 잘 키워준 모르드개가 큰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의 제 2인자의 하만에게는 누구든지 그 앞에 오게 되면 엎드려서 절하라는 존귀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그 앞에서 절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이 일은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완고했습니다. 그러자 하만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를 죽이려 했는데, 모르드개 한 사람만 죽이는 것으로 분이 다 풀리지 않을 것 같아 왕으로부터 유대인들을 다 죽이라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모르드개와 유대인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볼 것은 이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오빠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페르시아의 왕후가 된 에스더가 어떻게 처신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일을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고마운 것을 제대로 아는가? 사랑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사랑이 있는가? 나름대로 이렇게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는데 내 진짜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 뿐만 아니라 진정한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그리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주시는 이 말씀을 받으시게 된다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오는 이 계절에 여러분은 정말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감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냥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또 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감사가 있습니다. 정말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감사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사랑하는 정도에 따라서 관심도도 달라집니다. 대강 감사하고 대강 사랑하면 관심도 대강 끝이 납니다. 아내를 사랑한다, 조국을 사랑한다, 혹은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합니다. 정말로 조국을 사랑하는가,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는가, 정말로 부모님께 고맙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다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의 경우를 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레위인이 지나가고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하여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충분이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냥 지나갔습니다. 어쩌면 조금만 돌보아주면 살 수 있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죽게 될 그 사람을 두고 이들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야보고서 2장에서도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5-16)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그 관심은 흥미 그리고 말장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그 사람이 지금 죽어가고 있는지, 죽을 것인지 안 죽을 것인지 여기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혹시 살까?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까? 내가 도와주면 저 사람이 힘이 다 빠진 무릎을 회복할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저 아이가 훌륭한 아이가 되어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귀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렇습니다. 

사람이 못 먹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왜 못 먹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못 먹는구나.’ 라고만 생각합니다. 떨고 있어도 왜 떠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것이 없어서 떠는 것이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데, 이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진정한 사랑이 있으면 달라집니다. 애정이 있으면 확연히 달라집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도무지 도와줄 사람이라고 기대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지만 달려갔습니다. 여러분이 고속도로에서 차를 운전하다 사고가 났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경찰도 오지 않았는데,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경찰에 불러가는 등 성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러했습니다. 응급조치로 포도주를 부어주고, 기름을 부어주고 치료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말에 태워서 갔습니다. 내 차에 태우면 어떻게 됩니까? 세탁하는데 돈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주막에 데려가서 의사를 불러 치료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가는데, 혹시 돈이 모자라면 내가 돌아올 때 반드시 들러서 돈을 더 드리겠으니 치료해달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다 챙겨주었습니다. 여러분, 왜 차이가 납니까? 어떤 사람은 지나가고 어떤 사람은 이처럼 관심을 가지고 자기 수고를 하고 온갖 궂은일을 다합니까? 사랑입니다. 

조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물어봅니다. 여러분 가운데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출입하면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누가 부모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정말로 사랑하는가를 궁금해 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정말로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먼저 관심을 가졌습니다. 포로로 끌려갔지만 조국이 지금 망해가고 있으므로 늘 관심을 가졌습니다. 해외에 있는 동포들은 조국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조국을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고 흥미로 보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조국에 무슨 일이 있으면 말만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갖 못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국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다시 느헤미야를 보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식민지 출신이면서 통치국의 장관급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조국에서 온 사람을 자기 집무실에 불러 늘 조국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완전히 다 무너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벽도 무너지고 전부다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퍽 주저앉아 통곡하였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 수일 동안 밥도 먹지 않고 통곡했습니다. 어쩌면 여기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하나님, 이것이 전부 다 내 죄입니다. 나와 내 아비 집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참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 우리나라에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을 때, 혹시 그리스도인 가운데 아직까지 정부를 비판하고 여당이나 야당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입만 있는 조국사랑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이 잘못하여, 정치인들이 잘못하여 나라가 망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와 내 아비 집이 범죄하여 이런 일이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나와 내 아비집이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했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작은 몸이고 힘이 별로 없지만 할 수 있는 한 무언가를 하겠습니다. 간절히 기도 드리옵나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 일이 잘 되게 해주십시오. 제가 얼마나 큰일을 할지 또 그것을 제대로 할 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반지를 던지고 조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으면, 이런 애정이 있으면 이만큼 관심 있게 되고, 관심은 관심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정말로 관심이 있고, 애정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다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제 에스더를 봅니다. 에스더는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기 오빠 그리고 조국에 대해서 어떤 애정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에스더도 오빠의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크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람을 보내 “오라버니, 왜 안 잡수십니까? 왜 옷을 찢고 그렇게 죄를 뒤집어쓰고 계십니까?” 그러면서 옷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정도는 다 합니다. 사촌오빠가 옷이 다 찢어졌는데, 왕궁에 있으면서 옷 몇 벌 준비하지 못하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에스더에게 있어서 이 옷 몇 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흥미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고, 최소한의 어쩔 수 없는 애정 때문에 관심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볼 것은 ‘에스더는 어떠했던가?’ 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자신을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나는 내 부모님에 대해서, 내 조국에 대해서,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정말로 이런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말만 있는 애정인가? 

에스더에게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왔습니다. 사촌오빠가 여동생 에스더에게 너는 왕에게 나가서 그에게 너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고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아마 자기를 위해서 말하라고 하기는 멋쩍었을 것이었으므로 조국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 이에 대한 반응을 보겠습니다. 에스더는 “오라버니, 왕의 신하들 왕의 각 지방 백성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을 만나려고 하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혹시 왕이 금 규를 내밀면 살 수 있지만, 오빠는 모르시겠지만 저는 왕에게 불려간 지 이미 삼십 날이나 넘었습니다. 거의 가망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려했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에스더가 거짓말할 리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사실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인가? 라는 것입니다. 오빠에 대해 ‘정말로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오빠를 사랑합니다. 조국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사람의 모습인가?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반응이 있다고 그냥 물러가고 주저앉고 말 것인가?’ 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모르드개가 “그래, 충분히 그럴만하다. 너의 입장을 잘 알지 못하고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고.”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옳은 일입니까? 우리 아이들 중에 교회학교 나가야 한다고 말하면 “엄마, 신앙은 자유잖아요.”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청소년이 되면 더합니다. 때가 되면 알아서 나가겠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옳습니까? 정말로 그렇습니까? 

다윗이 압살롬이라는 아들의 반역 때문에 아주 부끄러웠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음 아들 아도니야에 대해서는 각별한 사랑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그 아들에게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아도니야가 잘했겠지만 이 말씀을 보면 이것이 정말로 잘하는 것인지 덜컥 겁이 납니다. 

여러분, 아이 키워본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아이가 정말로 섭섭하게 할 만한 일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성경의 다음 내용을 보면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아도니야는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기도 전에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윗이 죽고 난 후, 형제 솔로몬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예쁘고 아무리 행동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잘못된 일이 있을 때, 좀 섭섭해 하더라도 아버지 다윗이 제대로 가르쳤다면 그런 불행한 일이 생겨났을까요? 별 관계없는 남이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들에게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르칠 것은 가리치고 해야 할 말을 합니다. 만약 부모가 자식에게 할 말을 제대로 하지 아니하고 제대로 가르치지 아니하면 그 자식은 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종이 그렇게 하게 되면 세상은 망합니다. 교회는 교회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더 좋아할지 모릅니다. 인기는 더 올라갈지 모르지만 망하게 됩니다. 어른이 그렇게 되면 세상이 망하게 됩니다.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반사를 하였는데, 그때는 전도사님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반사가 설교를 하였습니다. 다른 설교는 거의 기억에 없는데 이 설교는 기억에 남습니다. 홀어머니 아래 외동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외동아들이 자랄 때 어머니는 아들을 너무너무 예뻐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아들이 잘못해도 어머니는 오냐 오냐 잘했다고 늘 받아주었습니다. 아들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성장하여 사람을 죽이고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면회 갔을 때 아들은 아주 원망스러운 눈으로 어머니를 쳐다보면서 어머니 귀를 물어뜯었다고 합니다. 

제가 어느 책에서 읽은 것으로 픽션인 것 같습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 그대로 기억이 납니다. 아들은 “어머니 귀가 내가 이런 소리를 해도 듣고, 저런 소리를 해도 듣고, 이런 거짓말, 저런 거짓말 온갖 소리를 해도 다 들어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 꼴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인가, 그냥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인가 여기서 나누어지게 됩니다. 

모르드개를 봅시다. 모르드개는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13절)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강한 말입니까? 얼마나 대담합니까? 또 이어서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14절) 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여러분, 이것이 어른입니다. 자꾸 좋은 소리를 들어야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인기를 받아야 되겠습니까?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하겠습니까? 그래서 망하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전체를 보십시오. 진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한 일이 많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늘 싫은 소리하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되고, 미움 받아 죽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것이 진짜 사랑이고 이런 사람이 진짜 어른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어른은 어른 노릇을 할 때 어른이고,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로 사랑하는 모습을 가질 때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이제 정리하면서 생각해봅니다. 모르드개가 사촌 여동생 에스더에게 어쩌면 좀 무례하게 했습니다. 에스더가 거짓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로서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 아니한 말일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남의 신세를 망치게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그러했습니까? 다 자르고 거기까지만 보면 충분이 일리 있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 압니다. 모르드개의 도를 넘는 것 같은 부탁, 요청은 모르는 소리가 아니라 아는 소리였습니다. 신세 망치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이었고 에스더를 더 존귀하게 만들어주는 말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나라를 살리고, 집안을 살리고 자식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는 길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지하철에서도 어디에서도 아무도 하지 않으니 한 마디 하면 다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네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노인들을 때리지 않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에스더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왕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에스더가 그렇게 유명하게 된 것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그 유명한 말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에스더가 자진해서 그렇게 말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기는 빠지려고 했는데 모르드개가 몰아붙여서 그렇게 했습니다. 얼마나 세게 몰아붙였습니까? 에스더가 그렇게 유명해진 것은 에스더 때문이 아닙니다. 모르드개 때문입니다. 모르드개가 모르드개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있는가 없는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가정에 모르드개가 있느냐 없느냐, 한 회사에 모르드개가 있느냐 없느냐, 나라에 모르드개가 있느냐 없느냐, 교회에 모르드개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한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모르드개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인생이 영 달라집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 가정에 모르드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는 누가 모르드개를 할 것인가? 입니다. 사람들은 사람 좋다는 말을 하려고 할 뿐 모르드개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기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진짜 좋은 사람이 되십시오. 진짜 바른 어른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누가 나 대신에 모르드개를 할 것인지 찾고 계십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그 요청을 하는 장면을 묵상할 때 저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에스더야, 너 왕후가 왜 되었는지 아느냐? 네가 궁에 있다고 혼자 편안하고 안전할 줄 아느냐? 천만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누가 모르드개를 할 것인지 찾고 계십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여러분 가운데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분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복이고, 여러분 가정의 복이고, 이 나라의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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