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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과 차별 (약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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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차별 (약 2:1-13) 
 
 
오늘은 참 경건을 추구하는 하나님 백성의 대인 관계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2:1)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말은 차별대우한다는 뜻입니다. 빈부에 따른 차별대우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미성숙한 사회일수록 가진 자는 그만큼 특혜를 누리며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은 특권을 누리기는 원하지만 차별 대우 당하는 것은 못 견딥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이점에서도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비록 차별 대우의 피해를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벧전 2:19) 인내해야 할 사람이며, 차별하는 가해자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차별 금지의 근거로 “영광의 주”를 믿는 믿음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분에 대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예언했습니다(사 53:2). 그분의 육신의 형제들조차 믿지 않았을 때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요 7:3-5; 막 3:21). 외모를 보는 동안에는 믿음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는 초라한 예수님의 외모 뒤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성도는 예수님의 외모 대신 본질을 볼 수 있는 믿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차별은 사람을 본질 대신 비본질적인 것으로 평가하는데서 생깁니다. 비록 개만도 못하게 취급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 역시 본질입니다. 성도는 주 안에서 ‘한 형제’라는 본질적 신분을 가졌습니다. 인간을 본질로 평가하면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성도는 사람들을 본질로 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이 일에 실패한다면 그의 믿음과 경건은 참 된 것인지 증명되지 못한 것이지요.

야고보는 2-3절에서 차별대우의 한 가지 사례를 듭니다. 이들이 자리를 안내받고 있는 것으로 봐서 낯선 방문객인가 봅니다. 만일 여러분이 입구에서 안내를 하고 있는데 보석과 명품 옷으로 치장한 럭셔리(luxury) 패션의 낮선 사람이 고급 승용차에서 내려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고, 또 몸에서 냄새가 풀풀 나고 여기 저기 떨어지고 때가 꼬질꼬질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일단 외모를 보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짐작하기 쉽겠지요.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대하다보니 이제 ‘척보면 안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충 짐작할지라도 중심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선출했을 때, 사울의 외모를 보고 판단했습니다. 사무엘조차 외모에 속아 다윗 대신 그의 맏형을 뽑을 뻔했지요(삼상 16:6-7). 인간은 언제나 외모를 본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갑부나 권력자 행세를 하며 사기 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외모를 보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외모로 추측한 후에 차별대우할 때 생깁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라는 말은 의도적으로 마음 썼다는 것을 뜻합니다. 가진 자는 특별한 관심과 친절로, 가지지 못한 자는 멸시와 불친절의 태도로 대한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태도를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4)라고 지적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의 어떠함을 드러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처럼 차별하고 세상의 악을 보여주는 전시장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차별하는 교회를 사악한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들에 비교합니다.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는 모습을 지적했던 전도자처럼(전 3:16), 야고보는 교회가 세상이 귀히 여기는 자를 귀히 여기고 세상이 천시하는 자를 천시함을 사악하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교회를 장악해서 움직이도록 방치하면 교회는 세상보다 더 타락할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왕을 공경하라고 했고(잠 24:21; 벧전 2:17),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레 19:32). 공적인 직분을 받은 자와 연장자를 공경하는 것은 선한 생각에 의해 움직여진 배려의 결과입니다. 반면 낯선 자를 외모만으로 차별하는 것은 세속적인 이득을 고려한 “악한 생각”이 작용한 것이지요. 성경은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서 두둔해서도 안 된다”(표준새번역, 출 23:3)고 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가진 자라는 이유만으로 거부하고, 가난한 자를 편든다면 이 또한 역차별로서 사악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의 핵심은 교회가 외모에 특별한 관심을 두거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그런 것들에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결정적인 힘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려할지라도 어떤 이는 자식이, 어떤 이는 돈이, 어떤 이는 명예가 결정적으로 그를 움직이는 역할을 합니다. 교회를 움직이게 하는 결정적인 힘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명하셨습니다(행 10:34; 신 10:17; 레 11:45).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교회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야고보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5)라고 말합니다. 가난 자들은 모두 택하셨거나 부자들은 거부하셨다는 말이 아니지요. 헬라어 성경은 ‘그 가난한 자들’(투스 프토쿠스)이라고 해서 가난한 자들 중에 한정된 숫자가 택함 받았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무튼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성도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셨다면 이럴 수 없었겠지요(고전 1:26-29). 그분은 연약한 자, 경건치 않은 자, 죄인이요 원수 된 자들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롬 5:6, 8, 10).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차별을 없애고 성도를 한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지요(벧전 2:9).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목숨으로 사랑하시고 특별한 소유로 삼으신 자를 “괄시”(6)했다는 것, 그 대신에 그분의 소유된 백성을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고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한 부자들을 우대했다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야고보는 차별하지 않는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윤리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차별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말합니다. 8-9절에서도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 말라”하신 법을 어겼을 때보다 “하라”하신 법을 어겼을 때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간음 하지 말라”, “살인 하지 말라”는 말씀을 범하면 심각하지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범한 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성공한 자를 우대하는 것에 대해 세상이 당연하게 생각할지라도, 차별대우는 이웃 사랑과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내가 차별당하면 분노하면서 이웃을 차별한다면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법에 의해 정죄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면서도 경건한 줄로 생각하는 성도가 있다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지요.

“최고의 법”은 문자 그대로는 ‘왕적인 법’으로 번역되는데, 성경의 모든 율법 조항이 이 법에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마 22:40). 최고의 법을 지켰다면 모두 지킨 것이고, 이 법을 어겼다면 모두 어긴 셈이지요.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율법 중에 사소해 보이는 하나의 조항일지라도 왕적인 법을 위반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10-11). 이렇게 해서 야고보는 성도가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그럴 수도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범죄임을 여러 가지로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사람을 배려한 것인지 차별대우한 것인지는 행동만 보고서는 쉽게 구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심리가 본능적으로 강한 자를 배려하고 약한 자를 무시하는데, 이를 배려로 미화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행여나 “금가락지”와 “아름다운 옷”에 홀린 것이 아닌지 말씀의 거울 앞에 살펴야 하겠지요. 그러므로 야고보는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12)고 명합니다. 단지 율법 조문들을 행했다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이 표현되었는지 살펴야 하는 것이지요. 내 말과 행동이 곧 심판 받을 것처럼 살핀다 해서 차별하려는 본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은 분명히 실행하도록 명령되었습니다.

사랑을 말한 후에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13)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들과 가난한 자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보이셨던 것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의 공의를 시행하시는 중에서도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아니었다면, 우리 중 아무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고 모두가 심판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말과 행동에서, 즉 교회의 모습 속에서 긍휼의 하나님이 나타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성공과 성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좋은 대학 진학, 고소득 직장, 높은 사회적 위치도 감사제목이 될 수 있지만 성도는 그것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세상의 잣대로 평가받고 대우 받아야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과 긍휼을 실천할 대상입니다. 거룩한 것일수록 타락하면 더욱 사악해지는 것을 생각하고 유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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