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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에 미친 자들 (행 26: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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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미친 자들 (행 26:24-32) 


오늘 이곳에 오신 여러분의 옷을 보니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올 겨울이 유난히도 추웠는데 그 매서운 한파도 서서히 물러가고 이젠 생명이 약동하는 3월 우리는 첫 번째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 하지만, 계절이 바뀌는 변화에조차 무심할 수는 없습니다. 사시사철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봄은 어느 계절보다도 생의 신비로움을 일깨우는 영감이 풍부한 계절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생명이 약동하는 것을 어렵잖게 만나 볼 수가 있습니다. 
  
산 속 계곡에서도, 또 앙상한 가지만 있는 나무에서도, 또 들판에서도 봄의 향기가 정말 신비롭게 꿈틀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 봄의 계절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인생의 반전을 꿈꾸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봄의 계절 우리의 한 생을 보다 의미있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최우선순위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일을 위해 기초를 쌓듯 다시 점검하고 이 한해를 좀 더 보람있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한 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말 후회가 없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가 함께 대하는 행 26장은 로마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원하여 죄인이 된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과 고관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재판정에 선 죄인에게 최후변론의 기회가 주어지면 대부분은 가벼운 처벌을 받기위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며 선처를 구합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으니 용서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최후변론의 기회가 주어지자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였던 자신이 왜 율법을 포기하게 됐는지, 그리스도인들을 발본색원하여 처벌하는 일에 앞장섰던 그가 왜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 바울은 보자 총독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며 바울을 미친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무지를 미친 탓으로 돌리는 베스도의 비난에 대해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온전함을 진술합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바울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베스도의 말대로 사도 바울은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었습니다. 헬라의 학문이며, 로마의 법률이며, 유대의 전통이며 두루두루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출신성분도 대단했습니다. 바울의 그만한 경력과 배경이면 교육계로 진출했더라면 국립대학의 총장 정도는 했을 것입니다. 사업계로 진출했더라면 대그룹의 총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치계로 진출했더라면 지방 총독은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건만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모욕거리가 되었습니다. 자원하여 죄인이 되어 재판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사람들의 모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이런 수치와 모멸에 가까운 자리에서도 이런 당당함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도 아시지만, 원래 바울이 이런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초대 교회가 핍박받을 때 교회를 잔멸할 만큼 앞장을 섰던 자입니다. 여러분, 잔멸했다는 단어(엘뤼마이네토)는 원래 멧돼지가 포도밭을 마구 짓밟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만큼 폭력적이고도 잔인했다는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여자까지 마구 잡아다 옥에 넣었겠습니까? 참으로 잔인한 핍박을 서슴없이 했던 자가 바로 바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 잡으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는 엄청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그토록 경멸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왜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나?' 하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고, 자기를 손에 꽉 쥐시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의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무슨 염치로 복음을 전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십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시고 그를 사도로 세우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바울은 예수를 영접한 후에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한 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이 처한 어떤 자리에서도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보세요. 28-29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아멘. 바울이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자문자답하자 아그립바는 비웃으며 “네가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권했습니다. 바울은 심문하던 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초라한 한 죄인을 보았습니다. 재판이 지연되어 바울은 오랫동안이나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러니 얼굴은 창백했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부실한 음식으로 연명했으니 얼굴엔 영양실조가 완연했을 것입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으니 건강상태가 좋을 리 만무했습니다. 의복은 남루했고 형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현상만 보는 속인들의 눈에 바울은 업신여길만 했고, 동정할만 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는 베스도 총독의 말에 동의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 때는 명성이 자자하던 바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높은 학문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어쩌다가 저지경이 되었는가?” 하고 혀를 차며 바울을 불쌍히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에 열정적이던 사람이 어쩌다가 죄인이 되었는가?” “쇠사슬에 매여서 저게 뭐람?” “참으로 아까운 사람 버렸구만!”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히려 자기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그들에게 “나는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라며 “당신들 모두가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미친 사람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미친 사람들은 모두가 다 행복합니다. 일에 미친 사람은 일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공부에 미친 사람은 공부가 즐겁습니다. 예수님께 미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행복하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사람들에게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선언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4:16과 11:1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빌 3:17에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나는 본 받으라”고 하였으며, 본문 29절에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시면 신문을 하던 자들이 바울에게 죄를 찾지를 못합니다. 본문 30-32절 말씀을 보십시요.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아멘. 바울의 최후 진술이 끝나자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과 버니게는 판결을 내리기 위해 장소를 옮겨 바울의 증언에 대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결박하여 둘 만한 혐의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무죄방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를 하여 자기를 로마로 보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죄인이 되어도 좋고, 예수님 전할 수 있으면 감옥에 갇혀도 좋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지 바울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압니다. 당시 지중해를 항해하는 일은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천km가 넘는 엄청나게 먼 길입니다. 더구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바울을 죽이려는 암살단이 구성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무죄가 입증되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죄인이 되어 로마가 호송되어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선택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이 그토록 험난한 길을 선택했을까요? 롬1:13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이 얼마나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는지를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 ‘여러번 가고자 했다’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로마로 간다는 것은 사지로 가는 것과 같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렸고, 또 성령께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토록 로마로 갈려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전도입니다. 한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려는 그 불타는 마음이 바울을 사로잡았기에, 자기를 멸시하고, 결박하고 핍박하는 그 고난의 현장에서도 결코 복음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전에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잖습니까? 누구보다 희생의 자리에, 섰고 그 누구보다 헌신하기를 원했던 여러분들이 아니었습니까? 이제 그 감격, 그 은혜 다시 회복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많은 분들이 한국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그 위기 중에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구원의 감격에 대한 열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만난 그 첫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심각한 것입니다. 첫사랑은 무엇보다 주님을 처음 만난 감격입니다. 그 감격이 상실되면 영혼도 죽습니다. 삶도 일그러집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목동 시절, 그리고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까? 그런데 왕이 되고 부요해졌을 때 오히려 큰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까? 사무엘하 11장에서 보는 대로, 부하들은 전쟁터에서 피 흘리고 있는데 자기는 왕궁에서 낮잠이나 자다가 남의 아내를 범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죄를 은폐하고자 그 남편을 살해합니다. 다행히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합니다. 그가 눈물로 참회하면서 쓴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거기 보면 다윗이 뭐라고 간구합니까? 시51:11-12절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성령 충만과 구원의 감격을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구원자 되신 주님을 의지하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안일한 가운데 타락하고 범죄한 것은 구원의 감격을 상실하고 세상의 향락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까? 죄로 영 죽을 인생, 지옥 갈 인생, 세상의 풍파 가운데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번 중국 스촨성에서 대지진이 났을 때 구조대가 건물 잔해를 파헤치는데 한 여인이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품 안에 갓난아기가 새근새근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옆에 핸드폰이 떨어져 있었는데 이런 문자가 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아가야! 네가 만일 살아난다면 이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잊지 말렴”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나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신 분입니다. 하늘 영광을 포기했죠. 이 땅에 오셔서도 제대로 된 방에서 태어나지도 못한 채 구유에 나셨고, 어릴 때부터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고 지내셔야 했습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공생애를 감당하실 때 한번은 제자들에게 이런 탄식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첫사랑의 회복은 내 삶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변에 성경을 들고 서서 복음을 전하려다 40대 젊은 나이에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희생되었습니다. 그의 주검이 장사나 제대로 치러졌겠습니까? 시체가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는 인생을 미친 것처럼 살았습니다. 

왜냐면 그 생명을 바칠 때 하늘로서 오는 놀라운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전라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황해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보면 미친 짓이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유능한 의사요 학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안전하고 편한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고 성경을 들고 전도하러 다니다가 물에 빠져 허망하게 죽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과 함께 가 보았던 중국 난징 밑에 장강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현재 폭발적인 부흥을 하고 있는 중국 교회에 복음의 씨를 뿌린 허드슨 테일러가 목회했던 곳입니다. 저는 그 때 그 마을을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한 생을 살았던 허드슨 테일러의 삶은 너무나 불행해 보였습니다. 가족을 이끌고 그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33세의 꽃다운 나이에 풍토병으로 아내를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첫딸도 죽었습니다. 둘째, 셋째도 다 죽었습니다. 나중에는 자녀들이 그리운 나머지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낮에도 온 종일, 그리고 저녁에도 내 딸 음성이 그립다. 그러나 그 아이를 심은 정원사가 오셔서 그 예쁜 장미를 뽑아가셨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모두가 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병든 세상과 족속으로부터 생명을 건지는 일보다, 영혼을 구하는 일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만드는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의사가 수술을 집도했습니다. 30시간이 넘는 대수술이었습니다. 생명하나를 살리기 위해 그 의사는 자기의 모든 실력을 총동원했습니다. 땀방울 맺힌 얼굴로 30시간이나 메스를 들고 버틴 것입니다. 옆에 스탭들 역시 모두 둘러서서 잠시도 환자를 혼자 두지 않고 서른 시간 동안 함께 씨름했습니다. 환자의 가정은 그 동안 모아 놓은 돈을 자기 남편을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다 쏟아 부었습니다. 왜 이렇게 애를 씁니까? 생명 하나를 살리는 것만큼 귀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진지하게 자문자답을 해보아야겠습니다.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주님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들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들지 않으면서 이웃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이 부패한 한국사회가 치료받기를 원합니까? 희생없이 말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느 때는 시간을 내야 합니다. 자존심을 접어두고 접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친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것은 보통 큰 희생이 아닙니다. 제가 몇 사람을 놓고 시간을 내어 기도해 보니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쁜 일과를 끝내고 피곤에 지쳐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시간인데, 몇 사람을 생각하면서 계속 엎드려 기도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만한 대가도 치르지 않고 어떻게 죽은 영혼이 살아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으로 멸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돈을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돈을 쓸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이 들 것입니다. 바쁜 시간에 중요한 약속이나 스케쥴을 뒤로 미루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의 형편을 이해해 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조그마한 수고 하나하나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활활 타오르며 향기를 토할 때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은혜에 감동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조그마한 수고로부터 큰 희생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지 값을 치르려고 합니다. 

대전시 유성의 자운대(紫雲臺)에는 부대가 많습니다. 그중 국군군의학교에는 뭇 사람의 눈길을 끄는 커다란 돌비가 있습니다. 비에는 ‘살려야 한다’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상처 입은 군인을 살려내야 한다는 절박감이 서릿발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어디 군의학교뿐이랴. 교회의 사명도 동일합니다.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죄에 오염된 사람, 영혼이 뿌리째 흔들려 뽑힌 사람, 증오심에 불타는 사람, 희망의 끈을 놓친 사람, 마약에 인생을 팔아버린 사람, 황금우상에게 포로 된 사람, 섹스와 도박에 중독된 사람 등 수많은 사람을 십자가 복음으로 살려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사람 살리는 곳으로 인식돼 왔습니다. 강력한 복음 전파와 희생적 의료선교, 삶으로 가르치는 미션스쿨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를 국민들은 불신의 눈초리로 보고 있습니다. 영혼을 살리기 전에 교회의 생명력부터 복원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십시다. 주여, 살려주소서! 
  
이제 새봄을 맞이하여 온 땅에 생명이 있는 것이 온 땅에 생명의 환희를 주듯이 우리 역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온 힘을 다 쏟기를 바랍니다. 이제 3월은 교회가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하는 달입니다. 제자 훈련과 특수 사역, 어머니 기도회 등 정말 중요한 일들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는 여러분 모두가 바울처럼 예수님께 미친 행복한 전도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께 미치지 않으면 예수 믿는 일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 미치면 교회처럼 재미있고, 주님의 일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께 미치면 능력을 발휘합니다. 예수께 미치면 전도하는 일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께 미친 사람을 찾으십니다. 예수께 미쳐 사명을 감당하는 사역자를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바울처럼 예수께 미쳐 예수를 전하는 행복한 전도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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