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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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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 5:7)


최근 인터넷 뉴스에 한국인의 외모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뜻밖의 기사들이 실렸습니다. 아이폰 어플리케이션 중 ‘페이스 월드 매치’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계 각국의 일반인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그 참여자 수가 15만 명이 넘습니다. 이 참여자들이 자신의 이상형 얼굴에 표를 던지는 형식으로 ‘얼짱’을 뽑았답니다.

그 결과 두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결정됐습니다. 하나는 세계 얼짱 1위로 한국인 남자와 여자가 선정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국가별 남녀 외모 순위가 발표됐는데, 한국 여성이 2위이고 한국 남성은 7위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한국 사람들이 잘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꺼림직한 것은 이 어플리케이션에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얼굴들에는 성형 여부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외모에 대해 가장 관심이 큰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한국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겉 사람의 외모에 대해 유별나게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외모를 가꾸는 일에 무척이나 공을 들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이 시대의 풍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거리낌 없이 이 풍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외모에 관심을 둬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기왕이면 깔끔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선순위에 있습니다. 외모도 중요하지만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외모보다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외모보다 더 중요하게 관심을 기울여야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외모보다 먼저 신경을 써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속사람입니다. 우리가 외모에 신경을 쓰며 다듬고 손질하듯이 우리가 더 신경 쓰며 다듬고 손질해야 할 것이 바로 속사람의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우리가 정말 소중히 여기며 다듬고 손질해야 할 속사람의 성품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로 긍휼히 여기는 성품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보면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겉 사람의 차원에서 타고난 미인들을 복 받았다고 부러워하듯이 속사람의 차원에서 긍휼히 여기는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

그러면 긍휼이 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전을 보면 긍휼(矜恤)이란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 “가엽게 여겨서 도와줌”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긍휼이라고 할 때 우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고, 다음으로 돕는 행동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긍휼이라고 번역한 성경 원어는 “엘리오스”(Elios)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18장 23절 이하에서 이 엘리오스라는 말을 예화로 풀이해 주셨습니다.

한 임금이 종들과 결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만 달란트 빚을 진 사람이 끌려왔습니다. 여기서 만 달란트란 상상하기 힘든 천문학적 액수입니다.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해 보면 대충 약 6조가 넘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도저히 그가 갚을 수가 없는 사실을 알고 불쌍히 여겨서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빚을 다 탕감 받은 이 사람은 자기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즘 화폐 가치로 따져보면 약 천만 원정도입니다. 자기는 6조가 넘는 빚을 탕감 받고서 천만 원을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잡아다 옥에 가두었습니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이 사람을 다시 잡아다가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3절을 보면 임금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바로 이것이 엘리오스 곧 긍휼입니다. 어렵고 딱한 형편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저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서 임금은 긍휼히 여기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해,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은 긍휼히 여기는 성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이 있는 사람은 바로 이 임금과 같은 사람입니다. 남을 긍휼이 여길 수 있는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속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탕감 받았던 이 사람은 남을 긍휼이 여길 수 있는 성품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 속사람이 추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성품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속사람이 아름답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긍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마 20:29절 이하의 말씀에서 그 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를 떠나고 계셨습니다. 그 때 길 가에 앉아있던 두 맹인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가시던 발길을 멈추시고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예수님께서 두 소경을 고쳐주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삐 여리고를 떠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길가에 앉아있던 두 맹인의 딱한 모습을 보시고 멈추지 않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속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강열하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가가 저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긍휼입니다. 딱한 형편 가운데 놓인 사람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가가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맹인들 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저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들을 핀잔주고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실 수 없으셨습니다. 저들을 긍휼이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처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기는 성품을 갖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대상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속담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긍휼이 여길 때 상대를 가린다는 것입니다. 나와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엮여있는 사람을 긍휼이 여길 때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을 긍휼이 여길 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한 권사님이 친구 흉을 보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번은 같이 사위가 경영하는 사업장엘 갔답니다. 그런데 딸이 나와서 바쁘게 일을 하더랍니다. 딸을 고생 모르고 키웠는데 정신없이 힘들게 일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프더랍니다. 그래서 사위와 점심을 먹으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 애가 고생 안 해보고 커서 몸도 약한데 저렇게 고생시키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얼마 뒤 아들이 하는 가게를 들렀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나와서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더랍니다. 가만히 보니 며느리는 임신 중이어서 만삭이더랍니다. 잠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분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부부가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니 참 좋다. 그럼 힘들어도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거야!”

이 분은 딸을 대하는 마음 다르고 며느리 대하는 마음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긍휼이 여길 때 이렇게 대상을 가리면 안 됩니다. 팔이 안으로 굽으면 안 됩니다.

둘째,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시켜서 이웃집에 가서 낫을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이웃집에 다녀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 줄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일 후 며칠이 지나서 그 이웃집에서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낫을 빌려주라고 말합니다. 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낫을 빌려 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빌려줍니까?”, 

이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 줄 수 없다는 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 같지 않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그렇지만 저 집에서 거절당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니까 빌려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은 긍휼이다” 

그렇습니다. 긍휼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의 앙금을 걷어낸 순수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 안에 세워지는 성품입니다. 우선 상대방에 대한 복수하려는 마음을 걷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마음도 걷어내야 합니다. 오직 순수하게 상대방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며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동정과 달라야 합니다.

긍휼과 동정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것입니다. 우선 불쌍히 여긴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하나는 대상이 다릅니다. 동정은 자기와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와 경쟁 상대이거나 나의 질투의 대상일 경우는 결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긍휼은 다릅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그 사람의 딱한 처지를 공감하고 불쌍히 여깁니다.

다른 하나는 실천이 다릅니다. 동정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눈물도 흘립니다. 그리고 때로는 생색내는 수준으로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긍휼은 다릅니다. 나름대로 구체적인 도움을 실천으로 옮깁니다.

심리학자 훼더릭 펄스(Federick Pulse) 동정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동정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종의 생색내기이다. 불쌍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낌으로써 자신과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심리적으로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긍휼이 자칫 동정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동정이 아닌 진정한 긍휼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 복이 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복이 바로 자신도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더욱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성 프란시스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문둥병 환자가 성 프란시스를 찾아와 하룻밤을 자고 가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의 얼굴과 손은 문들어져 있었고 또 다 헤어진 신발사이로 썩어가는 발가락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성프란시스는 자신의 그 옷을 벗어 그를 감싸 안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프란시스는 따뜻한 물로 진물 나는 그의 상처를 씻어주고 저녁식사를 극진히 대접한 후 하나밖에 없는 방에서 그와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날 밤 프란시스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으며 “프란시스야 오늘 대접 잘 받았다. 고맙다.” 깜짝 놀라 프란시스가 깨어나 보니까 같이 잠을 자던 문둥병 환자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향기만 물씬하게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특별히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우리를 어려울 때 도와주십니다.

다음으로 사람들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자기가 긍휼히 여겼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를 지켜본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가 어려울 때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복입니다.

1992년 4월 29일 미국 LA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한인 교민들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사실 이 일은 한인과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로드니 킹’이라는 한 흑인을 백인 경찰관들이 무리하게 체포하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체포 장면이 폭로되면서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불만에 불을 질렀고, 특히 경찰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지자 흑인들의 항의가 폭동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폭동으로 인해 많은 한인 상가와 한인 타운이 약탈과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인 타운이 큰 피해를 입게 된 원인은 폭동이 일어난 곳이 한인 타운과 가까운 곳이기도 했지만 평소에 흑인들이 한인 교민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흑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흑인들을 무시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는 인색하게 구두쇠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폭동의 혼란 중에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한인 상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게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흑인들과 주민들이 가게 앞에서 보호하고 지켜주었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 가게 주인들은 평소에 어려운 흑인들을 긍휼히 여겨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흑인 중에 돈이 없어서 장례식을 걱정하는 것을 알고 찾아가 장례식을 치르게 해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집 아이를 친 자식처럼 돌봐서 공부시켜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흑인들이 그 고마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폭동의 혼란 가운데서도 주인들이 부탁한 것도 아닌데 자기들이 자발적으로 그런 가게들은 골라서 보호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바라고 기대해서 긍휼을 베푼 것은 아니지만 그가 어려울 때 긍휼이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속사람을 아름답게 단장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 중에 우리 속사람이 긍휼히 여기는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긍휼이 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딱한 형편을 함께 아파하고, 함께 그 아픔에 동참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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