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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바(Abba) 아버지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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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Abba) 아버지 (눅 15:11-32)
 
 
1. “아바(Abba) 기도”

목회자포럼에서 주최하여 포럼 산하 각 교회를 매달 巡廻하면서 열고 있는 <중보기도 세미나>에 지난주간 강사로 전주안디옥교회 박진구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목사님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면서 ‘중보기도의 축복’, ‘기적을 일으키는 아바 기도의 권세’ 등을 목사님의 체험과 함께 들었습니다. 

이 “아바기도”는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라는 책에 나오는 용어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마음과 마음이 말한다”는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음의 기도는 친밀한 기도이다. 그 기도는 어린아이가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기도요, 애정이 깃든 기도이다.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으듯이, 마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에게로 모아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따뜻하게 돌봐 주시며, 사랑해 주시도록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리처드 포스터는 “마음의 기도의 기초”는 예수님의 “아바”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바기도”란 어떤 기도일까요?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이며 깊고 친밀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개념’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103편 1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호세아서도 하나님을 ‘자식을 품에 안은 아버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자식들을 이끄시는 아버지’, 그리고 ‘허리를 굽혀 자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아버지’로 묘사했습니다(호11:1~4). 

물론 하나님을 아버지의 모습으로만 묘사한 것은 아닙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어머니’라는 표현도 쓰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66장 13절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사66:13).”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혹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그 어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개념, 혹은 아버지 호칭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기도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하자(눅11:1),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대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눅11:2).” 몇 년 전 주기도문 강해에서 말씀드렸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신학자 김세윤 박사는 주기도문의 제일 처음 단어는 “아바(Abba)”, 즉 ‘아빠’였다고 했습니다. 

마태가 그 의미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확대했을 뿐이지(마6:9), 실제는 “아바”였다는 것이죠. 이 “아바”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우리말 “아빠”와 똑같은 말입니다. 원래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아이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신학자 존 달림플(John Dalrymple)은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계속적인 아바 체험이었다.” 즉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관계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사역의 기초였고, 예수님의 전 삶 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주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아바, 아빠”로 하라고 하신 것이죠. 이러한 예수님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았던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 14,15절과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그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 두 본문에서 바울은 “아빠 아버지”라는 말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던 셈족 언어인 “아빠”를 먼저 쓰고, ‘이 아빠는 이런 뜻이다’는 의미로 “아버지”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구태여 “아빠”라는 셈족 언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헬라어로 쓴 편지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만의 호칭을 제자들과 성도들도 부를 수 있는 호칭이 되었다는 뜻이며, 그가 히브리어를 쓰는 민족이든, 헬라어를 쓰는 민족이든, 세계 여타 민족의 언어를 쓰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 호칭을 부를 수 있다는 뜻을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장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아바,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제 입니까? 예, 바로 기도 시간입니다. 다시 전주안디옥교회 박진구 목사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박진구 목사님이 식사 자리에서 대화하면서 “아바”와 “아바기도”에 대한 긴 설명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목회자와 성도들이 ‘아바’를 몇 번이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를 느끼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다음날인 지난 금요일 새벽, 저는 기도의 시작이 잘 안 되어서 “아바”를 계속 불러 보았습니다. 그때 제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2. 아버지와 그 자녀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3주 전에 제가 설교했던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말씀을 조금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내게 오시는 아버지

정말 탁월한 이야기꾼이신 예수님은 읽고 또 읽어도 감동이 되고 재미있는 <탕자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도 몇 번만 읽으면 싫증이 납니다만, 예수님의 <탕자 비유>는 아무리 읽어도 깊은 맛이 있고 그때마다 주시는 교훈이 다릅니다. 主題가 분명하고 劇的 反轉이 생생합니다.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의 사랑이 감격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가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신의 분깃을 달라하여 받아 챙기고서는 먼 나라로 가서 다 虛費해버렸습니다. 돈이 다 떨어져 굶어 죽게 된 처지에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재산을 다 날리고 거지꼴이 되어서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가 그 아들을 보고서는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을 “아들이라 하지 말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라 하여 큰 잔치를 벌였다는 내용이지요. 

이러한 내용의 이 비유는 당시의 상황과 관련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이 말씀에서 “죄인들”이란 당시 유대 종교와 유대 사회가 공공연히 부정한 사람으로 일컫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娼妓를 의미했을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식사도 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 제일 못마땅하게 생각한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2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님 당시 세리와 창기들은 부정한 죄인의 代表格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여호와 종교를 표방한 유대사회에서 완전히 버림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不可觸賤民과도 같이 여겨져 사람들과의 對話나 交流가 금지되었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당사자들도 가능하면 일반인들과의 접촉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상대하시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예수도 그들과 똑 같이 부정하고 불결한 죄인’이라 했고, 이러한 말을 예수님이 들을 수 있도록 수군거렸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회복시키려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회가 내버리고, 그 당시의 종교인들이 포기해 버린 사람들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이죠. 그렇지만 이런 예수님의 방식과 삶을 바리새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이 비유의 배경을 이렇게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재산을 달라는 아들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아낌없이 준 아버지입니다. 살아있는 아버지가 생전에 재산을 물려주고 그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준다는 것은 스스로를 죽은 자로 여기는 경우입니다. 즉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스스로를 죽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떠난 아들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나, 재물에 대해서 규모 있고 효과적으로 살아 성공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잃고 실패자가 될 것을 아버지는 짐작했던 것이죠.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 순간부터 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뒤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한 마디 전해오지 않고,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으니, 그 아들 생각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백방으로 찾아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던 아버지는 나중에는 습관처럼, 일상적인 하루 일과처럼 문밖에서, 혹은 동구 밖에서 먼 길을 바라보며 날마다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시인의 “기다리는 아버지”라는 시 가운데 “기다림의 끈 단단히 허리에 매고/ 한 그루 늙은 나무로 서 있는 아버지/ 목마른 길 끝 바라보며/ ‘아들아,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매일 아들을 기다리느라 동구 밖에 서 있다 보니 마치 고목나무처럼 굳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시인이 표현한 것이죠. 그렇게 기다리던 중, 저 멀리 산 아래 난 길을 굽이돌아 터덜터덜 걸어오는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를 보는 순간 아버지는 直感的으로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걸어오는 속도보다 몇 배는 더 빨리 나이든 아버지가 뛰었던 것이죠.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가장 완전한 문학작품”이라고 극찬했다는 이 비유의 초점은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우리의 돌아옴을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독일 신학자 헐뮤트 틸리케는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라고 주장했습니다. 주인공을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스스로를 죽은 자로 여기면서까지 아들이 원하는 것을 다 주시는 아버지, 그 아들이 인생과 돈을 지혜롭게 경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에 돌아올 것을 기다리신 아버지, 혹시 집 문 앞까지 왔다가 머뭇거리다가 그냥 뒤돌아설까봐 당신이 문 밖에 혹은 길가에 나와 서 계시는 아버지, 바로 이 사랑의 아버지가 이 비유의 주인공이자 저와 여러분의 삶의 주인공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 새벽, “아바”를 반복하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시면서 ‘네가 어떻게 살았든지, 지금 네 모습이 어떻든지, 그에 상관없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 애써 기도하려고 하지 말아라. 네가 기도가 잘 되고 안 되고는 문제 되지 않는다. 내가 네게로 가마. 내가 기도하는 네게로 다가가겠다. 아들이라 할 수도 없는 둘째 아들을 기다리다가 먼저 다가간 그 아버지의 마음과 그 행동 그대로 내가 네게 다가가 네 기도를 들으마. 아니 기도가 안 되면 기도하지 말아라. 네 생각, 네 신음소리, 때로는 너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기도까지 내가 다 알고 응답해주마!’ 

여러분, 기도하는 가운데 이러한 깨달음이 생겼을 때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가, 예배가, 우리의 삶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 잔치를 열어 주시는 아버지

두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탕자의 결단이나 회개가 아닌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탕자가 제 아무리 회개하고 결심하고 돌아와 봤자, 그의 집의 문이 잠겨 있고 아버지가 냉랭한 얼굴로 그를 쫓아낸다면 그의 결단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너 같은 놈은 돌아와 봤자 소용도 없고 돈 챙겨서 나를 떠난 그때부터 내 아들도 아니다’라면서 쫓아낸다면 그가 돌아온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감동적인 용서와 회복의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사실 이 장면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歡待를 받은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를 꾸짖기는커녕, 안아주고 기뻐하며 잔치를 열어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壯元及第를 한 것도, 錦衣還鄕을 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올 것을 결심하면서, 그리고 길을 걸으면서 내내 수도 없이 연습해 두었던 대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9).” 그는 정말 미안해하면서, 그리고 아주 비장한 어조로 이 대사를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대사를 딱 잘라 버렸습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마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집 나갈 때 가져간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동안 무슨 짓을 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돌아온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여기로 끌어와 잡아 잔치를 열어라”고 말했습니다.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힌다는 것은 아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公表하는 것입니다. 반지는 權威를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다는 의미이고, 신을 신겼다는 것은 그가 종이 아니라 自由者라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종들은 맨발로 다녔습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다른 사람의 종으로 돼지를 치면서 살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와서도 종처럼 살 것을 결심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다시 자유인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 온 아들을 위하여, 그의 새로운 인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들을 위하여 최고로 멋진 파티를 열어 준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탕자의 아버지로 묘사된 여러분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도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잔치하는 삶과 같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잔치 이야기가 많습니다. 욥이 자녀들의 생일 때 베푼 잔치 이야기가 욥기 1장에 있고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기적을 베푸신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요한복음 2장에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비유 가운데 두 개의 잔치 이야기가 있는데, 왕이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청하는 비유는 마태복음 22장에, 결혼식 때 신랑을 맞으러 간 열 처녀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에 있습니다. 그 밖에도 성경에는 잔치에 대한 말씀이 정말 많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일이나 결혼식 때 잔치를 연 것은 물론, 특별한 상황에서도 잔치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도 손님을 잘 접대하기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예는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가 젖을 뗄 때도 잔치를 열었으며, 양털을 깎을 때, 포도 수확을 할 때도 잔치를 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잔치에 관한 말씀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 재산이 불어나고, 만사형통하며, 건강을 잃는 일이 없고, 자녀들이 다 성공하게 되어서 잔치하는 기분을 맛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그 자체가 세상의 그 어떤 잔치보다 즐겁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에녹이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바로 이런 맛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항상 잔치하는 사람처럼 기분 좋은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苦海와 같은 세상에 즐겁고 기쁜 일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렵고 괴롭고 슬픈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만 여러분, 성경이 잔치에 대해서 정말 많이, 그리고 자주 말씀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삶은 항상 잔치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것이 부족하거나, 없거나, 살면서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졌거나, 혹은 건강을 잃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그 자체가 자신에게 없는 것이나 잃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이 잔치하는 삶의 의미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이 잔치하는 삶인 것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하여 ‘귀향 축하 환영파티’를 열고 있을 때, 농장에 나갔던 맏아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서 요란스런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서는 종에게 물었습니다. “이 무슨 일인가(26)?” 그러자 종은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27). 

그 말을 들은 맏아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28). 둘째 아들이 돌아오니 큰아들이 집을 나간 것입니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9절, 30절,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자신이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과 아버지의 것이 전부 큰아들의 것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즉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자신과 함께 해 온 지난 삶이, 그리고 큰아들이 지금 가지고 있거나 장차 가지게 될 모든 것이 사실은 잔치와도 같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작은 아들을 반기고 위하여 잔치를 벌인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큰아들처럼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풍성함과 즐거움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형식과 의식과 법도에 젖어 정작 생명은 없었던 종교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니 저 역시 큰아들과 같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면서도 거기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이 제게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 인하여 잔치하는 삶이 저의 현실이 아니었던 것이죠.

영국 동화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왕이 중병에 걸렸는데, 의사가 말하길 ‘이 병은 약으로 고칠 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얻어 입으면 나을 병’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왕은 우울증이나 정신과 계통의 병에 걸린 듯합니다. 즉시 신하를 불러 수소문을 해서 그런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왕이 직접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왕이 어느 시골 마을, 시냇가에 있는 물레방앗간을 지나는데, 방앗간 속에서 ‘임금도 나만큼 행복하지는 못할 거야!’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방앗간으로 들어가 ‘무엇이 그리 행복하냐?’고 물으면서 ‘속옷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방앗간에서 일하던 사람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했습니다. ‘헤헤~ 임금님, 제가 사실은 가난해서 속옷이 없습니다.’ 가난해서 속옷도 없이 살면서도 방앗간에서 일하는 사람은 항상 행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의 형편에 대해 만족하면서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면서 항상 감사하는 사람은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관계없이 매일이 잔칫날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스스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행복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과 늘 함께 하시는 그것이 만족과 감사와 즐거움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환경에 관계없이 항상 잔치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의 복!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앙생활은 초청된 잔치에 들어가 축제를 즐기는 삶이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고 만날 사람도 없었던 우리들. 죄에 지쳐서 절망 속에 갇혀 있던 우리들, 그 어떠한 희망도 있지 않아 몸부림치며 살았던 세월들, 나 자신 조차도 주체할 수 없어, 괴로워했던 시간들…. 그런데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을 받게 하시며, 천국잔치로 나를 초대해 주셨다. 먹을 것이 풍성하며, 진정한 만남과 교제가 있고, 쉼과 위로와 치유와 회복이 있는 자리, 내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여 참 주인이 되는 자리, 무엇보다도 나의 아버지가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따뜻함과 사랑이 있는 자리, 나는 지금 이 놀라운 잔치에 초청되어, 마음껏 그 기쁨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번 한주간도, 잔치 속에서의 복된 삶을 마음껏 누리며, 이 복된 삶의 본질을 깨닫고, 함께 누릴 수 있기를 …. 
http://cafe.daum.net/ulsanChurch/에서 인용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항상 자녀보다 먼저 다가오시고 먼저 손 내미시고 먼저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삶이 잔치하는 삶, 즉 최고로 즐겁고 행복한 삶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정말 여러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여러분의 삶도 잔치하는 삶으로 변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잔치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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