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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단에 들어서라 (수 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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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에 들어서라 (여호수아 3:7-17)

지난 주간 여호수아를 읽으며 하나님께서 말씀 속에 주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체험하였으리라 믿습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뒤 모세가 없는 출애굽을 상상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도자를 잃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 곁에 항상 그림자처럼 따르며 훈련을 받은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워 백성들을 계속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였으며,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모세에게 순종하던 것처럼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며 그의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수행해야 할 첫 번째 임무는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를 정복하는 일이었습니다.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첫 성읍 여리고는 주전 8000년경에 건설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였으며, 주전 7000년경에 이 도시를 방어할 요새가 건설되었을 정도로 가나안의 성읍들 가운데 가장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여리고에는 아름다운 과수원과 종려나무에서 막대한 세금 수입이 있었으므로 로마시대의 안토니우스는 과수원 전부를 클레오파트라에게 증여하기도 했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여리고 역시 종려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샘물이 많은 오아시스 지역으로 알려져 ‘종려나무의 성읍’(신34:3)이라고 불렀습니다.그런데 이 아름답고 풍성한 도시 여리고로 들어가기 위하여 먼저 해결해야 할 큰 과제가 있으니 요단강을 건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첫번째 과제를 주셨습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눈 앞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수3:7-8) 하십니다.요단강을 건너는 것, 이것이 여호수에게게 맡겨진 첫번째 임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는 마침 모맥을 거두는 시기였습니다.가나안 지역이 밀보리를 거두던 시기는 겨울철 우기를 지나고 북쪽의 헤르몬 산 정상의 눈이 녹아 흘러내려 물이 가장 많이 흐르던 시기입니다. 강물이 줄어들어 가장 편하고 안전한 때를 기다렸다 건너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려운 환경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가시는 분들은 요단강을 직접 볼 수 있겠는데 오늘날의 요단강은 생각보다 훨씬 좁고 얕은 개울처럼 보입니다.지형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대를 흐르는 요단강은 북쪽에 위치한 갈릴리 호수가 해면 -212미터이고, 남쪽의 사해는 -398미터가 되는 요단 협곡을 흐르는 강줄기인데 해면보다 약 300미터나 낮은 강입니다. 평소에는 수량이 적지만 3-4월이 되면 물이 불어 넘쳐 강둑으로 범람했다고 합니다.

물론 오늘날은 옛날보다 수량이 더 줄어들었고 이스라엘과 요르단 시리아 등 주변 국가들이 생활용수와 농공업 용수로 물을 끌어다 쓰려고 저장하는 바람에 요단강의 수량은 갈수록 줄고 있으며 사해로 흘러드는 물이 줄어들어 염도가 높아지고 사해의 용수면적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이번에 요단강을 보시는 분들은 여호수아 시대에 강둑까지 차고 넘치는 강물을 상상하고 가셨다가 우리나라 한강이나 런던의 테임즈 강처럼 큰 강이 아니라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라 믿음으로 앞장을 섰습니다. 백성들은 이천 규빗, 약 900미터 거리를 두고 뒤를 따르며 요단강을 향해 전진합니다. 요단 물가에 이르렀을 때 제사장들이 강물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때 요단 물이 흐름을 멈추고 북쪽 상류를 향해 쌓여갔으며 아래 쪽으로는 물이 없어 땅이 드러났습니다.40년 전 이스라엘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던 기적을 체험하였는데 이날에는 요단강이 멈추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홍해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 갈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으며 백성들은 갈라진 바다를 마른 땅처럼 밟고 지나갔습니다. 요단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물에 들어섰을 때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요단강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서있는 동안 백성들이 건너갔습니다.40년 전 애굽을 나온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는데 40년 후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신세대들은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넜습니다. 백성들은 여리고 성 앞으로 바로 건너 여리고 동편에 진을 쳤습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주인공 크리스찬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건너야 할 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순례의 길을 거의 마친 크리스찬은 마지막 가는 길에 소망이라는 사람과 동무하며 저 멀리 보이는 천성문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그때 그들은 빛난 얼굴을 한 두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당신들은 이제 두 가지 어려움만 통과하면 천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크리스찬과 소망이 그들에게 함께 가달라고 부탁하자 그렇게 하겠다 했지만 천성문으로 들어가는 일은 자기 스스로의 믿음으로 성취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천성문이 보이는 곳까지 그들과 함께 갔는데 그들 앞에 강물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주위를 둘러보니 그 강을 건널 다리도 보이지 않았고 강은 매우 깊었습니다. 크리스찬과 소망은 이 강물을 보고 넋이 빠져버렸습니다. 함께 가던 두 사람이 ‘당신들이 이 강을 건너야만 합니다.그렇지 않고는 천성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합니다. 어디를 봐도 강을 건널만한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강물이 아주 깊으냐고 묻자 ‘당신들이 천성의 임금님을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더 깊어질 수도 있고 더 얕아질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강물로 들어섰고 점점 물에 빠져들어가던 크리스찬은 친구 소망을 향해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내게 넘친다’고 외쳤습니다. 칠흙같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덮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으며 지나온 삶의 기억들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갑니다. 순례의 길을 떠나기 전과 떠난 이후에 지은 죄들이 그를 괴롭혔고 여러가지 나쁜 환상들에 시달리며 깊은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때 곁에 있던 소망이 그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도와주려 무진 애를 씁니다. 

 ‘이 강을 건널 때 당신이 느끼는 불안과 고통은 하나님이 당신을 버렸다는 표시가 아니라 당신이 지나온 삶 속에서 받은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리고 슬픔과 고난의 때에 그분을 의지하는지 시험하시려는 것입니다.기운을 내십시오.예수께서 당신을 온전하게 하십니다’이 말을 들은 크리스찬은 고통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칩니다.‘내 눈에 그가 다시 보입니다.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라(사43:2)하십니다’

 크리스찬은 다시금 힘을 얻었고 그의 발을 디디고 설 수 있는 땅을 찾았으며 소망과 함께 천성문을 바라보며 걸을 때 강물은 아주 얕아져서 쉽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강둑에 올라온 두 사람은 앞서 가던 빛난 얼굴의 두 사람의 영접을 받아 그들과 함께 천성문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으로 구원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번연의 천로역정은 이렇게 크리스찬이 죽음의 강을 건너 영광스런 천국으로 영접되어 들어가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누구나 건너야만 하는 강은 곧 죽음을 상징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 강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천로역정에서 묘사한 것처럼 누구나 건너야 할 강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강이며 어두움의 과정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건너는 사람에게는 얕고 건너기 쉬운 은혜의 강이 됩니다.

장례식장에서 기독교인들이 부르는 찬송가 가사 중에 ‘몇일 후 몇일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고 부릅니다. 찬송가에서 요단강을 왜 죽음의 강이라 부를까? 우리나라에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들어오고 찬송가도 함께 번역되어 부를 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수 강가(계22장)를 의미하는 ‘아름다운 강가’영어가사를 우리 말로 ‘요단강’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그 후에도 계속 이 가사를 사용하여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아무개가 요단강 건너갔습니다’라고 습관적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요단강을 죽음의 강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아마 요단강을 건너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던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성도들이 가나안을 천국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 오해라고 봅니다. 

도도히 흐르는 요단강으로 들어서라 명하신 하나님은 또 한 번의 무모한 듯한 명령으로 백성들을 시험하십니다.요단강을 건넌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즉시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수5:2).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자손대대로 맺은 언약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의 표시였고 할례를 받지 아니함은 언약을 배반함이었습니다 (창17:9-14). 애굽을 나온 어른 세대들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예법을 따라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길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직후 할례 없는 전체 남자들이 한꺼번에 할례 예식을 행하는 것은 적진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명하신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확인시키시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순종하고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직후 상처가 회복되기까지 남자들이 전쟁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순종하는 것은 그들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음을 인정하고 따르는 순종의 표시였습니다. 백성들이 할례를 받은 후 상처가 낫기를 기다릴 때 하나님은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길갈이라 하였습니다. 

길갈에서 할례를 받음으로 그들에게 머물렀던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고 약속의 땅에서 첫 유월절을 행함으로 드디어 참 자유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물과 할례와 유월절 예식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처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이나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언약으로 맺어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습니다.

1월11일에 요단을 건너고 할례를 행한 이스라엘은 1월 14일 저녁에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홍해를 건너기 전에 유월절 음식을 먹었던 백성들은 이번에는 요단강을 건넌 후 가나안 땅에서 첫 유월절 음식을 먹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유월절 음식을 먹고 홍해를 건넌 것이 첫번째 출애굽이라면 요단강을 건넌 후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맞이한 것은 이스라엘의 두번째 출애굽에 해당되는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그때가 마침 밀보리를 추수하는 시기였으므로 그들은 그 땅의 소산으로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습니다. 그 땅 소산을 먹은 그 다음 날 만나가 그치고 그 후로는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먹이시는 분이셨습니다.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가나안에 들어온 후 그 땅의 곡식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계획이나 뜻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이 예정하신 시간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강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가 안전하게 된 다음에 건너거나 다른 길을 찾아 돌아간 것이 아니라 모맥을 거두는 시기에 철철 흘러넘치는 요단을 건너야 했습니다.전쟁을 앞두고 할례를 행하였으며 그후 곧바로 해방의 절기 유월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표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애굽의 억압과 협박에 눌려살지 않고 참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실히 믿고 순종하며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복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금년 이스라엘의 유월절은 4월18일부터 한 주간이라고 합니다.유월절을 한 달 앞둔 이번 성지순례 중에 이스라엘 땅을 다니며 들판에 잘 익어 추수를 기다리는 밀보리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의 의미를 이런 방식으로 미리 맛을 보았습니다.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석한 바울의 말씀(고전10:2)을 기억하십니까?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물속에 옛사람을 장사지냈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나의 새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자리에서 나와 생명을 얻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나온 후 홍해에서 그들의 과거를 수장시키고 새롭게 출발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세대들은 요단강을 통과하며 그들의 옛사람을 수장시키고 새사람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애굽에서 400년 동안 지냈던 과거를 홍해에 수장시킨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시험하고 우상에게 엎드렸던 부끄러운 옛사람을 요단강에 수장시켰습니다.이스라엘은 40년 광야여행 동안 그들의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그들이 얼마나 고집스러운 백성이고 미혹당하기 쉬우며 넘어지기 잘하는 사람들이던가요? 세상의 어느 민족과 나라가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고도 조금만 힘이 들고 어려우면 그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 나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40년 세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지만 동시에 고약한 성품에 대한 심판도 철저하게 받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에 들어가 거기 있는 사람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은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또 한 번의 물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요단강을 통과하며 이스라엘은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새사람으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홍해가 애굽이라는 세상을 떠나 죄를 장사지내는 것이라면 요단강은 자아를 죽이는 자리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단강은 죽음의 강이라 불러도 좋습니다.애굽이라는 세상을 떠나 홍해의 세례를 받으신 여러분, 요단강에서 자아를 죽이는 일을 잘 통과하셨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애굽이거나 광야이기도 하며, 죄와 싸우는 가나안이기도 합니다. 지금 어떤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보다 앞서 도도하게 흐르는 요단강, 죽음의 강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이 무사히 건널 때까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요단 중앙에 굳게 서계십니다.우리는 앞서 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열어놓으신 그 길을 담대히 걸어갑니다.

요단을 건너야 그 다음 여리고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요단강을 건넌 백성들은 여리고 성 앞으로 곧장 열려있는 길을 걸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 여리고와 수많은 성읍의 백성들과 전쟁을 벌이며 하나씩 정복하듯 우리 앞에 가로막고 있는 요단 물을 앞서 가신 주님과 함께 건넙시다. 우리가 부수고 깨뜨려야 할 죄악의 도성들은 앞장 서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뒤따를 때 정복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이번 한 주간을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믿음으로 순종하여 주님과 함께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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