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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동하는 믿음 (빌 2:25-30, 마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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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믿음 (빌 2:25-30, 마 4:1-6)
  

기독교를 은혜의 종료라고 한다. 우리의 공로에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거저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누리기에 전적인 은혜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다 보니 행함을 약화시키고 실천 없는 신앙인을 만들어낸다는 오해를 받는다. 일찍이 이 문제를 걱정한 야고보서는 약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여 산 믿음은 행함을 가져오고 행함은 믿음에 연유하고 있음을 말씀하였다. 

약2:22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태양 앞에 서면 그림자가 생긴다. 빛과 그림자가 뗄 수 없는 관계라면 믿음과 행함 역시 뗄 수 없는 관계다. 믿음, 은혜의 종교, 믿음의 종교이기에 사랑의 행함, 선의 행함, 섬김과 봉사의 행함, 나누어 주는 행함 등을 외면해도 된다고 하면 잘못된 가르침이요 이단과 다를 바가 없다. 신약 성서 중 절반을 차지하는 바울의 서신 대부분은 2개의 큰 주제로 나뉜다. 전반부는 이론이고 후반부는 실천이다. 즉, 하나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에 대해서요, 또 하나의 주제는 행함으로 나타내는 믿음의 삶이다. 로마서를 보라.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구원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12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실제적 삶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믿음은 크리스챤의 마땅한 길이다. 성서가 행함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지난 주에 고백하는 믿음에 대해서 배웠다. 고백하는 믿음이 행동하는 믿음의 시작이라 하였다. 체험에서 나오는 고백은 확신과 열심, 담력을 주고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사람을 섬기도록 봉사하는 일에 손발을 움직이게 해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루디아를 보라. 빌립보에 들어온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그녀는 이렇게 변한다. 

행16:15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루디아는 자신의 바쁘고 분주한 생활 속에서도 바울의 일행을 섬기며 자신의 집을 선교의 거점으로 제공하려고 애를 썼다. 루디아의 믿음은 분명하게 사람을 섬기며 봉사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에바브로디도를 보라. 그는 빌립보교회를 대신하여 바울의 옥중 생활을 돕고자 보내어진 사신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걸만한 행함을 보이고 있다.  

첫째, 사도 바울을 섬기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빌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그의 행함은 특별한 열심과 헌신 앞에 불타 있다.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바울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둘째, 빌립보교회가 맡긴 일을 감당하는데 목숨을 걸었다.

옥중에 있는 바울을 돕는 옥바라지가 그가 위임 받은 책무다. 빌2:25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빌립보교회의 심부름꾼으로서 병이 날만큼 일한 것이다. 그래도 빌2:27을 보면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사 또 바울을 긍휼히 여기사 치료해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셔서 근심을 제하여 주셨다. 이런 과정을 보면 에바브로디도는 교회가 맡긴 일에 목숨을 걸고 한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일을 섬기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믿었다.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을 위해 섬기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고 곧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사역임을 확신하였다. 에바브로디도의 행동하는 믿음은 자신의 사역과 일이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흘러넘쳤다. 그래서 목숨을 돌보지 아니할만큼 열정적으로 일했다.   

바울을 빌2:25에서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하였다. 바울에게 에바브로디도는 자랑할만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어떤 말을 가지고 이보다 더 한 찬사를 할 수 있을까? 나의 형제, 나와 함께 수고하고 군사된 자,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돕는 사람 등 최고의 수식어이다. 최고의 격려다. 그의 행동으로 섬기는 믿음은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다. 바울을 이렇게 권한다.

빌2:29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즉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일로 알고 죽기에 이르러도 충성을 다해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존귀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뜻이다. 즉 행동하는 믿음!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정상적인 믿음이고 성숙한 믿음이고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믿음인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 길로 가야 한다. 보는 믿음, 듣는 믿음에서 고백하는 믿음, 증거하는 믿음이 되고 사랑으로 섬기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으로 자라나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하였다. 더 열심히, 더 자발적으로, 더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며 살자. 

그런데 사랑으로 섬기고 행동하며 실천하는 믿음 생활에 있어서 주의할 것이 있다.

1. 선한 일을 행함이 자기 과시가 되어서는 안된다.

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스도인은 내 이름을 내려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업적, 내 공로를 자랑하려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나, 일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고전10:31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다. 어찌 자기를 과시하고 내 이름의 영광을 위해 행할 수 있는가? 
  

2. 행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끌어다 붙여서는 안된다.

넌크리스챤은 행함을 위해 결단하고 실천을 하면 그 다음에 결과를 보면 된다. 그런데 크리스챤은 말씀에 근거하여 한다. 행함이 말씀과 무관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올바른 생활이다. 그런데 어떤 크리스챤은 행함과 말씀을 관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외면할 수 없어서 나름대로 애를 쓰는데 일을 다 저질러 놓고 그 다음에 말씀을 인용해서 자기 실천의 근거를 삼는 사람도 있다. 이는 자신의 삶의 행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말씀을 이용하는 잘못된 행함이다. 즉 말씀과 연관시키지 못하는 행함으로 이런 삶은 상당히 사탄적이다. 

마4:1~6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세 가지로 유혹할 때 “뛰어내리라.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리라.”고 한다. 그리고는 기록되었으되 시91~11~12의 말씀을 가지고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로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고 하였다. 뛰어내리는 행동을 먼저 요구하고 나중에 말씀으로 그 뛰어내리는 행동을 보장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위험한 시험이다. 마귀는 유혹한다. 말씀보다 행동을 앞세운다. 행동이 부족하고 실천이 부족한 시대이니 “지금 결단하라. 실천하라. 너를 참된 신자라고 말할 것이다. 사랑한다면 결혼부터 하고 봐라. 사랑의 감정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냐. 돈을 많이 주면 직장을 옮겨라. 하나님의 복이 아니냐.” 그래서 직장을 바꾼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임의대로 해놓고 말씀을 가져다가 붙여 자신의 뛰어내리는 행위, 직장을 옮기는 행위, 성전에 올라간 행위를 정당화하려 한다. 결혼, 취직, 퇴직, 이사, 교제하는 모든 것을 정당화 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행함이 말씀보다 앞서서는 안된다. 결정해 놓고 나서 말씀을 찾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시험이 된다.
  

3.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행함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을 때마다 말씀을 앞세우고 행동한다. 

①마4:2의 돌을 떡으로 만드는 시험 - 예수님은 행동하기 전,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며 예수님은 말씀을 앞세웠다. 떡을 만드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②마4:3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시험 - 예수님은 행동하기 전 말씀을 앞세웠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고 행동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③마4:8의 천하 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엎드려 경배하라는 시험 - 예수님은 마귀에게 경배하라는 유혹 앞에서 행동하기 전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을 앞세웠다. 

크리스챤의 행동은 그 근거가 말씀이어야 한다. 먼저 행동을 해 놓고 말씀을 갖다가 붙이는 마귀적 방법이 안라 먼저 말씀을 보고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이 나온다. 유혹인지, 시험인지, 해도 되는지 등 말씀에 근거하여 “기록되었으되”를 확인하고 행동하게 된다. 이렇게 행동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말씀대로가 아닌 경우 예수님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거나 행동으로 가지 않았다. 행동하는 것만 행동이 아니다. 때론 행동을 하지 않고 잠잠히 시간이 지나도록 침묵하고 기다리는 것도 행동이다. 말씀에 근거하며 움직여라.

우리는 사실 왜 기도하는가?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 위해서이다. 행동하기 전 지시를 받기 위해서이다. 왜 성령님을 의지하는가? 감동을 받기 위해서이다. 행동하기 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크리스챤의 행동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응답하시는 음성을 따라 감동을 받고 나서 실천에 옮겨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움직이며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행동하는 믿음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성숙한 삶이 되려면 무엇을 하든지 말씀을 앞세워라. 
  

4. 환경을 넘어서 움직이는 행동이어야 한다.

환경은 나의 행동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 불리한 환경이 되면 주의 뜻이 아닌 듯 하고 유리한 환경이 되면 주의 뜻인 듯 생각한다. 그래서 환경에 좌우되어 포기하거나 결정한다. 크리스챤의 진정한 행동은 환경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암 전문의 박사 원종수는 미국에서 월급을 많이 받는 병원에로 가게 되었다. 너무도 좋아서 계약서에 사인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데 새벽 기도를 나갔다. 대우가 좋은 직장에 가면 그 다음이 문제였다. 새벽 기도회를 쌓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앙에 유익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직장을 옮겨 가지 않았다. 우리도 환경에 좌우되지 말고 그것을 넘어서 행동하라. 넉넉하고도 충분한 말씀을 앞세우고 삶의 행함을 실천하는 멋진 크리스챤이 되자.   

이 시대는 행동하는 믿음을 찾는 시대다. 배웠다고 머리만 커지고 손발이 움직이지 않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행동하는 신앙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행동하는 자로 나타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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