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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예수만 바라보자 (마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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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만 바라보자 (마 17:1-8)
   

제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에 ‘하아비 콕스(1929-)’라는 하버드대학의 교수로 20세기 최고의 종교학자이며, 사회학자가 있었습니다.   하아비 콕스라는 종교사회학자를 모르면, 신학생이 아니었습니다.   하버드대학은 몰라도 하아비 콕스라는 학자는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교수입니다.  

이 사람이 1965년에 젊은 학자로서 ‘세속도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장차 문화가 발전되고 경제적으로 고성장을 구할 때면 세속도시가 나타나서 교회는 없어지고 세속화가 진행되어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세속도시에서 하아비 콕스는 ‘하나님의 후퇴’를 주장했습니다.  세속화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전면에 나타나시지 않고, 후퇴하고, 역사의 커튼 뒤로 숨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력하신 존재로 인간과 함께 하신다면서 기독교회의 쇠락을 예언하였습니다.  ‘세속도시’란 책에서 20세기 급속한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과 도시의 번성이 점진적으로 종교를 인간생활의 주무대에서 밀어내고, 결국 종교는 그 뿌리를 상실한 채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가 소멸될 것이요, 종교의 그 운명은 끝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아비 콕스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러한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시인하기를 교회와 종교의 부정적인 미래에 대한 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예언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가  세속도시를 쓴지 30년이 지났을 때에 1995년에 “Fire from Hevean” 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은 우리말로 “영성. 음악. 여성”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종교가 쇠락할 것이며, 소멸될 것으로 보았는데, 성령 충만한 교회들은 매년 2000만 명씩 늘어나고, 성령 충만한 교회의 교인수가 전세계적으로 4억1천만명에 이르는 것을 보면서, 그 교회들이 가진 강점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의 이론대로 하면 교회가 쇠락하고 소멸되어야 하는데, 전혀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서구의 물질만능에 의하여 숨이 막혀 죽어야 하는 교회들이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때 확실히 죽어가고 있었고, 적어도 변방으로 밀려나야 하는 종교들이 다시금 세계의 주무대로 복귀하는 것을 보면서 성령의 역사는 지금도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자기의 학설을 수정하였습니다.  

21세기 종교와 성령운동을 연구하면서, 영성이, 그리고 찬양의 음악이, 남성보다는 여성이 능력을 발휘하면서 교회의 부흥을 주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충만한 영성이 어느 산골 시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주로 도시의 현상이며, 성령의 충만한 교인들이 찬양하며, 영으로 기도하며 새로운 말씀읽기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 세계는 다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안에 머물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저는 “영성, 음악, 여성”이라는 하아비 콕스의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의 타락을 비관하지 않고, 새로운 사무엘을 준비하시고 성장케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질만능에 숨 막혀 죽어야 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인류의 소망은 물질만능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수련회를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많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예레미야나 선지자들 가운데 한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신앙고백은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씀이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잘 정리해준 기독교의 뼈대가 되는 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많은 사람들이 극찬하는 고백입니다.  

어떤 이는 “이는 그리스도교 신조의 전체이다”라고 말하신 분이 있습니다.  이 고백은 신앙고백으로서 간단하면서 기본적인 것이 담겨 있고, 사도신경을 요약해주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에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들어있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가 되시며,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한 주간이 지나갈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등산하셨는데, 왜 산을 찾고 있습니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기도하러 올라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기도하러 높은 산에 올라갔고 기도하고 계실 때에 그 얼굴이 해같이 변하고 광채가 나며,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십계명의 두 돌판을 받아들고 내려올 때에,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었기에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지만,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자세히 보면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으므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출34:29)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그 곳에 구약의 대표이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고, 유대인에게 있어 정신적인 지주와 같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 보이셨다는 것은 종말이 도래하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3제자들의 눈에 보이는데,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 서 있어 말씀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예언의 대표자로 이스라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더불어 말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별세하실 것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만이 전해졌습니다. 눅8: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곧 그의 떠나가심, 별세에 대하여,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어떠한 죽음을 죽으실 것이며,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하는 말이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모세가 나타나고 엘리야가 나타나고 이런 놀라운 일이 자기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일로 몹시 무서웠습니다.   그가 지금 말하는 것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자고 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구름이 와서 예수님과 세 제자들을 덮으면서 구름 속에서 들려진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이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도 들려진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과연 예수님이 누구시냐, 예수님은 과연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이시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택하신 분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시냐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오늘의 변화산의 사건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시며 누구시냐 하는 것을 자세히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오늘의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위하여 수난 받으시는 주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라고 하나님이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직접 경험한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17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는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겪은 일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벧후 1:17)   

하늘에서 음성이 난 것은 예수님은 과연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였습니다.  바로 그런 음성이 들려진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신 분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셨지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세 분 제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는 심히 두려워하게 됩니다.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땅에 바짝 엎드려 있으니 예수님께서 나아와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면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오실 것을 말씀했고, 예수님을 보여주는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하셨다고 해도 떠나가고 사라져야 합니다.  

모세도 지나가고 엘리야도 떠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님이시며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주님은 오직 예수님뿐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오직 예수님이 남아 있어야 하고,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며,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중에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야를 흐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변화산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당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례 받으실 때에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조금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더 분명하게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세 제자들은 그들이 믿고 따르는 주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어 이 땅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산 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영성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주실 때에, 가진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옛 사람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고 변화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변화를 원하고 계시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얼굴에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모든 일에 있어서 의미를 추구하고, 보람을 누리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얼굴에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새겨지고, 밝고 환한 얼굴에 긍정적인 확신에 넘치는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고, 마음도 성품도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들으며, 말씀을 나눌 때에 그 얼굴이 변화되었습니다.  지금 예수님도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기도 시간에 얼굴이 해같이 변해지고 광채가 나며,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졌으며, 빛이 났습니다.  우리 내면으로부터 변화되고 우리의 삶이 달라지기를 원하신다면,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말씀을 들으며, 말씀을 나누던 것과 같이, 또 예수님이 산에 올라 기도하신 것처럼, 말씀과 기도만이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기를 사모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만남이요 사귐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진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는 대화와 소통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우리도 말씀드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도 우리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 인간과 교제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만남과 대화 그리고 사귐의 시간이 있어야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변화산 사건이 주시는 교훈이 있다면 오직 예수만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도 잊혀지지만 오직 예수님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값진 보화요, 가장 귀한 진주이시며,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사도 베도르는 최대교회를 없애려고 하는 유대교권자들 앞에서 강력하게 외쳤습니다. 행4:12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영성과 목회라는 책을 쓰신 케네스 리치라는 개신교회의 영성신학자가 있습니다.  영성과 목회, 영혼의 친구, 참된 기도, 참 하나님, 하나님 경험하기 등 여러 영성에 대한 좋은 책을 쓰신 분입니다.  영국 성공회의 목사로 영성지도 분야에서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고민하신 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가지고 많은 연구와 임상실험으로 영적 성장을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씨름하기입니다.  리치박사는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이야기로부터 씨름의 이미지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말씀과 씨름하라고 합니다.  말씀을 건성으로 보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늘어져야 합니다.  말씀과 싸우듯이 씨름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숙고하기입니다.  숙고하는 것은 심령 깊숙하게 내면의 세계에서 말씀을 소화시키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면서 그 맛을 보라고 합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의 필요만 놓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어야 깊이 기도하게 됩니다.  

셋째로는 제초하기입니다.   이 말은 말씀의 왜곡된 해석을 잘라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자기감정이나 자기 욕심으로 일어나는 모든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말씀을 붙잡고 깊이 연구하고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씨름의 과정과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숙고하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마음밭에 자라나는 잡초와 같은 생각과 욕심을 제초하고, 뽑아내어야 합니다.  동이 틀 무렵까지 온 밤을 씨름하고, 방해받지 않은 채 숙고하면서 기도하고, 가라지를 제초할 때에,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1900년에 미국의 찰스 파햄이라는 젊은 감리교회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생활이 변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통독하면서 자신은 말할 수 없이 나약하기만 한데,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다 강력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주후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늘 우리에게서 볼 수 없는 능력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왜 자신의 교회는 새신자가 없는 것일까?  왜 우리 교회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왜 우리 교회에서는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가?  질문하고 또 질문하였습니다.  그는 성경말씀을 철저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성경의 말씀대로 믿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파햄과 함께 성경을 읽던 시무어라는 흑인 목사님이 20세기에 일어난 대부흥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1906년부터 미국의 영성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산위에서 신비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간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싶었습니다.  신비에 머물러 살고 싶었습니다.  신비 체험은 많으면 많은 대로 좋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과 우리와 만남은 신비하게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신비 체험한 그 장소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신비 체험하려고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누구에게 은혜 받았다고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 안 됩니다.   은혜 주시고 병 고침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산위에 올라가는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사모하고, 씨름하듯 연구하고, 홀로 산에 남아 예수님으로 채워질 때까지 기도하고,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산 위에 올라간 적이 없는데 내려갈 곳이 어디에 있습니다.  산 아래는 난제들이 산적한 곳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이기고 승리하려면, 먼저 산 위에 올라가는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시고, 예수님과 날마다 동행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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