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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눅 5:1-11) -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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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눅 5:1-11)


뉴욕브로클린에서 정육점을 하는 윌리엄리바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강도가 많습니다. 이 사람은 한달사이에 4번의 강도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총을 들고 들어오는 강도를 경험하고 나니까 가슴이 떨려서 장사할 수가 없습니다. 고민하다가 총에 맞아도 살수있는 방탄조끼를 만들어야 겠다 생각하고 연구를 해서 방탄조끼를 만들어서 입었습니다.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를 했더니 이웃에 있는 점포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나한테도 그 방탄조끼하나 주시오. 그거 어디가면 구입할 수 있습니까? 여러개를 주문받고 그것을 팔다가보니까 본업인 정육점은 뒤로하고 방탄제조 방탄조끼 제조회사를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 회사가 나날이 발전해서 세계적으로 40개의 지점을 가진 바이아모인터넷이라는 큰 회사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그는 정육점 주인에서 방탄조끼 회사의 사장으로 바뀌어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도 인생이 바뀐 그리고 직업이 바뀐 한 인물을 만날수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대대로 고기잡는 어부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았습니다. 그는 고기잡는 어부였지만 예수님을 만난이후에 사람낚는 어부가 된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인생이 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의 목적이 변합니다. 가치관이 변합니다. 꿈이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요한복음 1장 41절에서 만납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더니 안드레가 자기형제 베드로를 데리고 갔습니다.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단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천직인 어부직업을 버리기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주저하다가 그는 예수님과 결별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만남이 또한번 이루어집니다.  

누가복음 4장 38절 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서 시몬에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데 병이 곧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이 본문의 상황은 아직 베드로가 제자가 안됐습니다. 예수님을 한번 만난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지역 회당에 와서 말씀을 증거하다가 다른사람들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다 죽어가는데 예수님 한번 가서 봐주시죠.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 열병을 치료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보고 굉장히 고마워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어부가 직업이니까 고기를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는데 밤새도록 고기를 잡는데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어찌 그런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내가 몇십년동안 고기를 잡아서 이렇게 허탕친적이 없는데.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고기는 씨가 말랐는지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피곤했을까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그러나 베드로는 이 직업을 포기할 수 없어서 그물을 다시 씻습니다. 왜? 내일 또 고기를 잡아야 하니까. 그물을 씻고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안면이 있던 사이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배에 타기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이 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육지에 서있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찌보면 그 말씀은 베드로를 위한 말씀이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정리하고 있으면서 귀로는 다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일은 하고 있지만 옆의 소리는 다듣습니다. 베드로는 그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오셔서 베드로야 깊은데로 내려가서 그물을 내려라. 

이거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는 참 순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닙니까. 목수출신 예수님이 고기잡는 일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고기잡을 시간이 아닙니다. 아침입니다. 고기는 밤에 잡아야죠. 그리고 고기는 깊은데에는 없습니다. 이 갈릴리 호수는. 얕은데에 고기가 있는데 깊은데로 가라합니다. 이 모든 여건상 순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은 능력있는 선생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지난밤 한 마리도 못잡았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얘기하고 그물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물을 내렸더니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던지 다 숨어있던 고기들이 어디서 다 몰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정도가 되었습니다.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그물이 찢어질 때 그는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성과 경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중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경험, 자기의 관습, 자기의 이성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께 순종할 때 그는 만선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고기 많이 잡았다고 앞으로는 예수님만 모시고 다니면 고기 많이 잡아서 부자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선의 기쁨보다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앞에 이렇게 말합니다.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여기서 주라는 뜻은 Load라는 표현입니다. 

조금 전에 5절에서는 선생님했는데 왜 8절에서는 주여라고 고백했을까. Load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표현입니다. 또 구약에서 종들이 자기 주인을 향해 쓰는 말이 Load 주라는 표현을 씁니다. 바로 그 사건을 통해서 베드로는 이분이 랍비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하나님이시구나 이 거룩한 분 앞에 내가 서있다니 나같은 죄인이 나같은 누추한 사람이 주여 저를 떠나소서 했습니다. 

예수님이 싫어 떠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과 같은 거룩한 분 앞에 위대한 분 앞에 설 수있는 자격조차 없는 그런 부족인 인간이요 죄인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는 그리스도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10절 11절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네가 지금까지는 고기를 잡는 어부의 생활을 했지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한다. 취한다라는 것을 원어로 보면 사로잡으리라. 사람을 사로잡는 사람이 되겠다. 이게 다시말하면 사람낚는 어부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고기잡는 어부가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도 귀중한 직업이지만 내가너를 더 높은 소명으로 불러가겠다. 너를 위대한 전도자로 사람낚는 어부로 내가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국한된 말씀만은 아닙니다. 특별한 사도나 선교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전적인 풀타임 사역자로 선교사나 목사로 부름받지 아니했더라도 우리는 평신도로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소명이 뭐냐?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해서 배들을 육지에 내버려두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진정한 성도의 삶, 제자의 삶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때 우리는 참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은 베드로의 인생을 분명히 바꿔 놓았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서 위대한 전도자로 그가 탄생되어지게 됩니다. 사실 나중에 베드로가 성령충만받고 그가 나중에 설교했더니 하루에 3천명이나 회개하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마치 그물이 씌워지는 것 같은 놀라운 어획이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앞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5장을 가리켜서 베드로의 소명의 기사다. 소명의 장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하면 베드로가 제자로 부름받은 장이바로 누가복음 5장인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명 부르심이라고 부릅니다. Calling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소명이라는 말을 찾아봤더니 소명이라는 가수가 나오고 그 다음에 소명이라는 선교영화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소명은 뭐냐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또 왕의 부르심이다 이렇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것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였지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감독관을 쳐서 죽인후에 두려워서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숨었습니다. 그는 40년동안 양치는 목동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은 가시덤불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리고 그를 위대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지도자로 삼아서 애굽땅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해냅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를 부르신 소명의 사건입니다. 

또한 엘리야는 지나가다가 밭을 가는 엘리사를 불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엘리사를 부른 소명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갑절의 연금을 받고 더 훌륭한 예언자로 삶을 살게 됩니다.  

사사기 6장을 보면 기드온을 부르는 소명의 사건이 나옵니다. 기드온은 겁쟁이입니다. 열등감이 많고 아주 소심한 사람입니다. 미디안사람들이 이스라엘사람들을 괴롭히니까 그는 마음놓고 타작도 못합니다. 밀타작을 해야하는데 마당에서 하지 못하고 포도주틀에 구덩이에 들어가서 손바닥으로 밀을 비비는 그런 소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와서 이런 기드온을 향해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선언합니다. 그 순간 기드온은 큰 용사로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십만명의 미디안대군을 무찌르고 큰 승리를 거두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기드온의 소명기사입니다. 

요즘 새벽에 예레미야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만 예레미야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거절합니다. 나는 아이라 말할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강권적으로 불러내셔서 이스라엘백성을 향해서 예언활동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예언자입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향해서 뼈아픈 훈계와 책망을 해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성의 마지막에는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어져가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예언하던 사람이 예레미야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특별한 사람들만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부르심속에 소명받은 사람인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부름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는 겁니다. 어쩌면 소명과 사명이라는 말은 앞 뒷장과 같은 것입니다. 나를 부르셨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오스키니스라는 분은 소명이라는 책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소명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소명이란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중요한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주신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왜 이땅에 세우셨을까? 그 목적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게 소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소명이 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고기잡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는 소명을 니꼈습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겁니다. 그는 이제 사람낚는 어부로 우뚝서게 된 줄 믿습니다. 이게 바로 소명입니다. 

아까 소명이라는 영화이야기를 잠깐했습니다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강명관 선교사입니다. 이분은 원래 잘나가는 외국어 고등학교 국어 교사였습니다. 그는 가정이 화목하고 유능한 국어교사였습니다. 아무런 걱정 근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강명관 선생님을 부르셨습니다. 그는 국어 교사직을 사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선교사가 돼서 아마존 정글로 들어갔습니다. 문자가 없는 바나와 부족을 열심히 몇 년째 섬기고 있습니다. 이루 말할수 없는 고생입니다. 영화에 보니까 온몸이 독충에 물려서 성한곳이 없습니다. 사람이라고 볼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서 몇 년을 견뎌내면서 국어선생이니까 그들의 언어를 문자로 기록하게 문자를 개발하고 성경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성경을 읽게 만든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게 바로 소명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가리켜서 특별한 소명이다합니다. 그러나 우리모두가 직업을 버리고 선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라는 그런의미는 아닙니다. 열심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선교사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을 부르시되 우리 모두는 우리모두의 직업으로 부름받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영어로 직업을 vocation이라고 합니다. 라틴어의 보카티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보카티오라는 말은 소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직업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우리의 직업으로 불러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은 신성한 소명의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이 우리의 직업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부르심이 소명이고 그것이 내 직업의 삶입니다.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직업을 가질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기여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런 직업의 소명감을 회복하도록 가르친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직업은 거룩한 것입니다. 직업은 성직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만 성직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모든 직업이 성직, 거룩한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서 성경은 만인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옛날성경에는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 지금은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베드로사도가 성도들을 위해 기록한 편지입니다. 그는 그 많은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는 바로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어지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자신이 제사장이라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제사장은 거룩한 직업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뭡니까?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맺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용서함을 대신 받는 것입니다. 또한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고 그것을 연결시켜주는 사람입니다. 그게 제사장입니다.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제사장은 목회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사도는 모든 성도들은 다 제사장이고 목회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만약 여러분이 세탁업을 하고 있다면 세탁업이 바로 여러분의 제단이고 여러분이 설교해야 할 현장입니다. 목사는 제단앞에 설교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직장에 제단을 놓고 거기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설교합니까? 삶으로.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죄악가운데 불러내시고 우리를 빛된 백성으로 삼으신 이 하나님의 놀라운 덕을 선포한다는게 무슨이야기입니까? 다시말하면 죄인된 우리들을 십자가의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이웃사람에게 이야기 하는 것, 그게 바로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덕을 선포하도록 복음을 전파하도록 우리 모두가 제사장으로 부름받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제사장입니다. 이제 제사장처럼 행동하고 말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제사장입니다. 물론 나는 직업이 있습니다. 공무원도 있고, 경찰도 계실것이고, 사업가도 있을 것입니다. 엔지니어도 있고 드라이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이 여러분의 사역의 현상이고 여러분이 제사장입니다. 여러분이 베푼 사랑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의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소 10장 3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삶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직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까. 돈을 많이 벌수만 있다면 남에게 욕을 좀 먹어도 내가 좀 잘될수만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일하는 삶의 터전 여러분이 일하는 가정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예수가되고 목사가 되어서 여러분이 이땅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면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앞에 영광을 돌릴 줄 믿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분들이 누구입니까? 주보에 광고하고 여러분에게 읽으라고 광고하는 하나님의 대사 김하중장로님의 책입니다. 

김하중 장로님은 중국대사로 가서 6년동안 최장수 대사로서 그는 봉사했습니다. 그의 인생의 목적은 중국대사가 아닙니다.  그는 대사는 하나님을 일을 위한 발판입니다. 그가 가서 한일은 중국의 고관들과 교제하면서 그분들을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있는 한인들을 어려움에서 구해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했습니다. 대사라는 자리는 그의 인생에 목적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발판이였습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복음 증거자의 삶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제가 또 가끔소개하는 시중에 많이 읽히는 책이 하늘의 특별검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기록한 분은 김인호 장로님이십니다. 이분은 얼마전 바로 일산 지검장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내가 검사가 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복음을 증거하라고 검사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가서 전도하면 말안듣습니다. 그러나 검사가 가서 전도하면 전도가 잘된다는 것입니다. 검사가 전도하니까 성경책을 주니까 안받을 수도 없고 받아서 읽다가 예수믿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수많은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일산 지검장으로 있을 때 그는 만나는 사람에게 늘 성경을 전해서 예수믿으라고 전한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라고 합니다. 일산 지검장으로 있을 때 법무부장관이 강금실 여자 장관이였습니다. 강금실씨가 술을 좋아하나 봅니다. 순시를 끝내고 지검장과 간부들을 다 모아서 회식을 합니다. 그리고 술을 한잔씩 돌립니다. 그런데 일산 지검장이 거절했습니다. 

장관님, 나는 교회장로이기 때문에 술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좌중에 찬바람이 불고 강금실 장관의 안색이 싹 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대구 고검으로 좌천되어 갔습니다. 거기가서 하나님이 왜 나를 보내셨나 했더니 전도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전도하느라고 열심을 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목적이 있어서 그를 거기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그는 검사가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 그의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직업은 거룩한 소명인 것입니다. 그 소명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사람들을 기쁘게 하십시오. 사람들을 섬기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십시오. 그것이 직업이 소명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전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전도받고 3년을 산 후에는 그도 위대한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전도하신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낚는 어부로 새로운 삶을 사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초대교회때도 그랬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같은 사람들은 직업이 텐트 메이커, 텐트 만드는 사람입니다. 텐 트를 만들며 생계를 유지하면서 사도바울의 모든 사역을 도왔던 평신도 사역자입니다. 또한 의사 누가는 그는 직업이 의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바울이 순교하기까지 끝까지 그의 몸을 돌보고 그의 간질병을 돌봤던 사람이 의사 누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도의 자리로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이 더욱 높은 가치있는 소명입니다. 전도란 주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일, 그게 바로 전도인 것입니다. 고기 낚는 일도 귀한일이지만 사람을 낚는 일은 더 귀한 일입니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지구를 만들 때 동물도 만드시고 인간도 만드셨지만 동물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주 존엄하고 가치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바로 이 가치있는 존재가 죄에 노예되어 살아가고 마귀의 노예되어 살아가고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참한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죄에서 구원하는 일은 너무나 거룩한 소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켜서 지상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높은 소명의 자리로 부르신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001년 우리는 9.11 테러를 기억합니다. 뉴욕세계무역센터에 이슬람 과격단체들이 비행기를 타고 거기에 폭격을 해서 그 건물이 불에 휩싸이고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상계단을 타고 탈출해 내려옵니다. 사진기자가 보니 한사람의 소방관이 완전무장을 하고 다시 거꾸로 화염속으로 뛰어들어가고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겁니다. 이보시오 위험한 자리에 왜 올라갑니까. 그랬더니 이 소방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일입니다. This is my job 이것이 나의 직업입니다. 저 불구덩이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구조하는 것이 내 소명이고 내 직업입니다. This is my job" 

그는 뛰어들어가서 순직했습니다. 다시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소방관들은 이 소방업인 직업을 자신의 생계수단으로 보지않고 사람을 구원하는 소명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11테러로 죽어간 소방관의 숫자가 347명입니다. 그 사람들이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가 다른사람 구조하다가 빌딩이 무너지는 바람에 다 깔려 죽었습니다. 

그 후에 미국과 유럽에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직업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위가 소방관입니다. 소방관을 제일 존경합니다. 그들은 소명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고 다른사람을 위해 뛰어드는 사람이 소방관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불러주셨는데 우리는 내 생명을 내어놓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뛰어들고 있습니까? 뛰어들기는 커녕 가까이 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 한국 교회의 위상이 너무나 추락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목사고 장로라고 해서 믿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교회 집사고 권사라고 해도 내가 어떻게 믿느냐고 합니다. 100년 전만 해도 내가 집사라고 하면 계약이 필요없습니다. 교회다니는 집사님이면 계약서도 필요없죠. 믿어야죠. 신뢰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중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뢰를 다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교회제자들의 잘못이 큽니다. 또한 모든 성도들도 우리의 본질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몇 년전 CJ이천공장에 화재가 났습니다. 그 화재를 진압하던 윤재희라는 소방관이 철재빔에 깔려 숨진채 발견된 일이 있었습니다. 윤재희 소방관은 원래 지휘차량의 운전기사입니다. 그는 운전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진해서 그 불속에 뛰어들어서 구조활동을 하다가 철재빔에 눌려서 순직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 사람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나이가 29살이고 앞으로 석달 후에 결혼식이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약혼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혼식을 올리지도 못하고 장렬하게 순직하고 말았습니다. 평소에도 약혼녀가 윤재희 소방관에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운전만하면 되지 왜 자꾸 화재현장에 뛰어들어가느냐고 걱정하니까 윤재희 소방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불끄는게 소방관인데 운전대만 어떻게 잡고있을 수 있느냐." 불끄는게 소방관인데 내가 어떻게 운전대만 잡고 나만 편하게 있을 수 있느냐고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자신의 생명을 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어 던진 것입니다.

소방관과 기독교의 차이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생명을 구조하는 것입니다. 소방관도 불속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우리 기독교인들도 죄악의 홍수속에서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제는 이 일을 점점 포기하고 있습니다. 전도를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순직한 윤재희 소방관이 우리를 향해서 뭐라고 말할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운전대만 잡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교회울타리 속에서 봉사하고 헌금하고 찬양하고 이것저것 하지만 그것은 편하게 운전대만 잡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찬양만하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지. 나는 주방봉사만하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지. 나는 이런것만 봉사하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지. 이렇게 안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방관은 불속을 뛰어드는데 우리들은 불속은 커녕 물속을 뛰어든적도 없지 않습니까. 창피하고 귀찮고 왜 내가 그런일을 해야돼.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을 낚는 일이 우리의 소명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요즘은 얼마나 거꾸로 되었는지 전도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인것 같습니다. 저사람 미쳤어? 왜 전도를 해. 자기일도 바쁘지 않나. 한가한 모양이지.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지 애들이 없는 모양이지. 전도 안하는 이들이 훌륭한 그리스도인 같습니다. 매너있고 점잖고. 이게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야성있는 전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원하고 주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이 가서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소명앞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오늘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 것처럼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주신 이 더 높은 가치 더 높은 소명앞에 순종하고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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