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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을 만나다 (막 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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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만나다 (막 9:2-9)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들이 문득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어,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 예루살렘 가는 길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이들에게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 깨어나셨습니까? 갑자기 이게 웬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으시지요? 오늘이 바로 땅 속에서 동면하던 개구리와 벌레들이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놀라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겨울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지금은 “잠에서 깨어야 할 때”라면서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했습니다. 

빛의 갑옷이라는 말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에 바울은 즉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롬13:14)라고 고쳐 말합니다. 우리 신앙의 경칩은 어둠의 행실을 벗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직전 주일인 오늘은 ‘산상변화주일’입니다.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시기 전,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온유하고 친절하고 따뜻하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을 것 같은 분입니까? 옳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위선과 거짓 종교에 대해서는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당시의 정치․종교 지도자들과 대립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헤롯을 향해서는 ‘여우’(눅13:32)라고 말했고, 종교 전문가를 자처하며 으스대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서는 ‘회칠한 무덤’(마23:27)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은 가히 욕의 대가라 할 만합니다. 예수는 불량한 선동자처럼 보였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기득권자들은 자기들의 체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자기들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의 별명 중 하나는 ‘세상을 소란하게 한 자들’(행17:6)이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도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지만, 성서적 의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한국교회는 변화의 누룩이 되기보다는 변화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 몸으로 살아냈던 예수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는 박제당한 채 높은 곳에 모셔졌고, 갈릴리의 민중들과 함께 했던 예수는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또 다시 채찍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책이나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주님의 뜻을 붙들기 위해 온힘을 다 기울여야 할 때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돈과 권력의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예수 운동의 특색을 ‘지배의 포기’라는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힘에 대한 선망을 버리고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우정을 나누며 사는 세상을 꿈꾸라고 하셨습니다. 가야 할 길이 정말 멉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변모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습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변하였다’는 단어가 원문에서 수동형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뭔가를 보여주려고 마술적으로 당신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다만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제자들에게는 아주 낯설고도 신비롭게 보였던 것입니다. 마가는 그 광경을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고 전해줍니다. 이것은 어떤 장면에 대한 사실적 묘사라기보다는 표현할 수 없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겁니다.

이 비일상적인 광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34장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다시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는 주님과 함께 사십 일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말씀을 새긴 두 증거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출애굽기의 저자는 그것을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34:29b)고 설명합니다. 그런 얼굴 한 번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느 청년이 그러더군요. 장동건의 실제 얼굴을 보니까 얼굴에서 빛이 나더라고. 그건 모세의 경우나 예수님의 경우와는 좀 다른 빛일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놀람은 당연합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분에게서 어떤 초월적인 모습을 보았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말을 주고받는 광경도 보았습니다. 유다의 민중 전승은 모세와 엘리야가 둘 다 주검을 남기고 않고 하늘로 올리웠다고 전합니다.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그분들이 먼저 올 거라는 믿음이 유포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가는 그들을 등장시킴으로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초월적인 광경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말합니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초막 셋을 짓고 싶은 마음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지 않습니까? 여기저기 부대끼며 살다보면 젊은 시절의 장하던 의기義氣는 사라지고, 영혼은 멍투성이가 되어버립니다. 삶이 힘겨울 때면 현실을 외면해 버리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어떤 이(Hannah Arendt)는 이것을 ‘정신적 망명’(inner emigration)이라 했습니다. 이런저런 잡다한 일에 얽히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머물고 싶은 것은 베드로만의 염원은 아닐 것입니다. 

• 구름 속에서 들려온 소리

마가는 베드로의 그 말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전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갑자기 구름이 일어나 그들을 뒤덮더니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고 말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b) 그 소리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 소리는 숭실대학교의 소리공학연구소에 의뢰해도 파악할 수 없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간혹 내적인 자각을 ‘들었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소리의 실체와는 관계없이 마가복음서 전체에서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증언 혹은 고백을 여러 차례 듣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뭍으로 올라오실 때의 광경을 전해줍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더니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1:11) 하늘의 소리는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려는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제자들을 대표해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 이 고백이 마가복음의 전환점입니다. 이 고백 이후에 주님은 당신이 고난당하실 것을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는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수난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겪게 될 수난은 죄의 결과도 아니고 좌절도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고백의 절정은 예수님의 처형을 담당했던 백부장의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십자가 위에 매달린 예수님의 말과 태도를 보고난 후 그는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15:39c)고 고백합니다. 이방인인 그의 고백은 예수의 구원이 유대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어떤 모습이 하늘로 하여금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했을까요? 예수님은 모두가 높아지려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낮춰 가난하고 병들고 짓밟힌 사람들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주님은 누구도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제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이라 해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로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무기력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무기력한 삶에서 깨어나 역사의 변혁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변화의 매개였습니다.

•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 변화산 사건을 묵상하면서 제가 마지막으로 주목하고 싶은 말은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 잘 들으라는 말과는 사뭇 느낌이 다릅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우리는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는 참 수다스럽습니다. 들어야 할 시간에도 말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는 잘 하는 데, 듣는 기도는 잘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말을 독점할 때 주님은 침묵하십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말은 곧 그 사람입니다. 말과 존재가 틈 없이 일치되었던 주님의 말씀이 곧 주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는 권고는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으라는 말일 겁니다. 주님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며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막8:18)고 탄식하셨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막4: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없는 사람들, 자기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평생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요8:31)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이가 제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모함하고 죽이려는 이들의 문제를 한 마디로 정리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요8:37) 

하나님은 왜 제자들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까지나 그들 곁에 머무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그들 속에 이미 파종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알갱이가 됩니다. 비록 그 길이 고난의 길이라 해도 말입니다. 변화산에 올랐던 세 제자를 부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빛으로 변한 이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최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살았던 벨기에 태생의 엠마뉘엘 수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가 81세부터 96세가 되기까지 썼던 책 <<아듀>>에 나오는 한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엠마뉘엘은 중증 정신 장애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한 병원에 갔습니다. 한 여성의 안내로 병원을 둘러보던 그는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의 한 남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흉측했고 비뚤어진 입에서는 침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안내자는 두 팔을 덜렁거리고 있는 그 환자의 긴 몸뚱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두 팔로 안아 일으켜 가슴에 꼭 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 위에 간신히 걸쳐 있는 그 남자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싹 갖다 대고 환한 미소를 보냈습니다. 어느 순간 초점 없이 두리번거리던 남자의 두 눈동자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뭔가 생명의 섬광 같은 것이 그의 둔한 얼굴선 위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안내자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머!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지금 느꼈나 봐요!” 그녀는 품에 안은 남자의 몸을 자신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주면서 오랫동안 그와 시선을 맞추었습니다. 남자의 표정이 차츰 밝아졌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아주 부드럽게 속삭였습니다. “세상에! 이제 잘생긴 귀공자가 되었네!” 잠시 후 그 안내자는 엠마뉘엘에게 말했습니다. 

“난 내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한 명 한 명 모두가 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입을 벌리고 있는 남자는 빛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엠마뉘엘은 그 광경은 세상을 초월한 장면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장면이 오랫동안 엠마뉘엘의 삶을 비추는 빛이 된 것입니다.(엠마뉘엘, <<아듀>>, 오래된미래, 355-7)

주님의 산상변화사건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는 변화산이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뜻대로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주님의 빛으로 환해질 것이고, 형제자매의 얼굴에 생기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의 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한 점 불빛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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