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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열심 (고후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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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심 (고후 11:1-6) 
 
 
❚중매의 비결

여러분, 혹시 중매(仲媒)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중매해서 성공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중매해서 결혼한 그 부부는 지금도 잘 살고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 유난히 중매(仲媒)를 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은 희한하게도 중매를 했다하면 성공합니다. 그래서 이분의 중매를 통해 수많은 부부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매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중매에는 세 가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 중매가 잘되면 뭐지요? 술이 서 말이요? 우리는 예수 믿으니까 술 서 말은 좀 그렇고, 중매 잘 하면 양복 한 벌이라도 얻어 입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못 되면 뭡니까? 뺨이 석 대지요. 그러니까 중매라는 게 잘 되면 좋은 일이지만 잘 안 되면 참 그것만큼 곤란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지요. 

둘째, 중매를 하려면 반드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확신이요? 양쪽에 대해 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신랑 될 사람과 신부 될 사람 둘 다에게 확신이 있어야, 이 사람은 반드시 잘 살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중매를 하지 잘 모르는 사람을 중매 섰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입니다. 셋째, 중매가 잘 되어서 성공해서 결혼한다 쳐도 결혼해서 오래 오래 잘 살아야지 만약 그렇지 못하면 두고두고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중매는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어떤 선배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다짜고짜 저보고 막 뭐라고 하는 겁니다. “어제 부부싸움을 대판 했는데 싸우다가 ‘우리가 왜 싸우지?”’ 하고 생각해 보니 결혼해서 살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왜 결혼을 했지?’ 하고 생각하니 더 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했어요. 부부 싸움 한 것이 제 탓이라니요. 그렇다고 제가 그 부부를 중매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들어보니 이런 사연입니다. 

저희 모교회(母敎會)에서 청년들을 모두 모아 연합 예배를 드린 후 레크리에이션을 하는데 제가 진행을 맡게 되었어요. 프로그램 중에 눈을 감고 돌아다니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살짝 더듬어본 후 눈을 뜨는 그런 게임이 있었는데 그 게임을 하다가 서로 전기가 찌릿하고 통한 모양이지요. 그래서 둘이 사귀게 되고 눈이 맞아 결혼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니 다 나 때문에 결혼한 것이니 부부 싸움 한 것도 제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뺨 맞겠더라구요. 물론 참 억지이요. 하지만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중매를 한 것도 아닌데 이런 일이 생기니 정말 중매를 해서 두 사람이 결혼해 살면 어떨까? 잘 살면 다행이지만 못 살고 문제 생기면 얼마나 원망 들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매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중매를 잘하는 분들은 그러면 뭡니까? 가만히 보니까 이 분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인간관계가 좋고 넓어서 아는 사람도 많고 그 많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이 친구하고 이 친구는 틀림없이 잘 맞겠다” 싶으면, 확신이 오면 중매를 서는 것입니다. 물론 100% 잘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잘 아는 사람, 확신이 있는 사람끼리 만나게 하니 잘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 분들은 내 일도 아닌데 아낌없이 헌신하고 희생합니다. 바쁜 시간 쪼개가며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심지어 내 돈 써가며 둘을 연결시켜 주려 합니다. 이렇게까지 열심이고 헌신을 하니 중매가 잘되는 것입니다. 그깟 양복 한 벌 얻어 입으려고 중매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고 위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중매를 서는 것입니다. 물론 돈 받고 전문적으로 중매하는 ‘마담 뚜’는 예외입니다.

❚하나님의 열심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도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여기서 바로 ‘중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중매쟁이, 마담 뚜네요? 맞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중매를 잘 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중매를 해서 엄청나게 많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한 중매는 한 여자를 남자에게 소개해주는 그런 중매가 아니라 바로 ‘거룩한 중매’였던 것입니다. ‘거룩한 중매’란 무엇일까요? 한 여성을 남성에게 소개해 주는 것처럼, 신부된 성도들을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 받아 만나고, 사귀고, 결혼해서 영원토록 동거하며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의 믿음을 이렇게 결혼과 비유해 말씀합니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결혼한 신부라고 비유하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아내가 딴 남자에게 한 눈 파는 외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또 교회가 거룩한 신부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결혼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처녀를 총각에게 중매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해 영원히 함께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한 처녀와 총각을 중매해 성공하는 데도 얼마나 노력이 필요합니까? 얼마나 헌신이 필요합니까? 시간 들어가, 돈 들어가, 관심과 노력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물며 우리 성도들을 거룩한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일을 위해 바칩니다. 지난 주 살펴본 것처럼 세상적인 조건이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화려한 이력서의 소유자인데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서 주님께 중매하려고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시간과 물질과 땀을 바치고, 인생의 성공도 포기하고 헌신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로 이런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중매쟁이가 될 수 있었고 기독교역사 상 가장 위대한 사도요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열심을 바울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2절을 다시 보세요.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열심!’ 바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거룩한 중매를 위해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사람,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사도 바울의 뜨거움과 열정은 결국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은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군요. 사도 바울이 왜 그리 뜨거운가 했더니 바로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것이었군요.

여기서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젤로스’인데 그 어원이 ‘제오’ 즉 ‘끓이다, 뜨겁다’ 하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뜨거운 것입니다. 펄펄 끓는다는 뜻입니다. 뭐가요? 마음이지요. 그래서 이 ‘젤로스’를 우리말로 ‘열심’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열정’(熱情)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 우리 하나님은 본디 아주 열심히 있는 분이고 열정이 있는 분입니다. 아주 뜨거운 분입니다. 펄펄 끓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그냥 대충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냉랭하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너무 뜨겁게 사랑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십니다. 그래서 스바냐 3:17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뜨겁게 사랑하다보니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실 정도로 사랑하신 것 아닙니까? 이게 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처럼 내게 가장 귀한 것, 내 모든 것을 다 내어줄지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에게 중매하기 위해 다 투자한 것입니다.

❚우리의 열정은?

그렇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는 그분의 성품, 그분의 행동, 그분의 모든 것을 닮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닮아가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을, 그 열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성도들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교회입니까?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중매하기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운 일 뿐입니다.

아내와 함께 백화점에 갔습니다. 그런데 매장에 들어서니 복도에서부터 직원들이 나와 자기 물건 사달라고 난리입니다. 시장에서나 호객을 하지 백화점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백화점도 시끌시끌하게 호객행위를 해서 처음에는 좀 얼굴이 찡그려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들을 보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정말 한 사람이라도 더 손님을 붙잡으려고 기를 쓰고, 정말 한 사람이라도 놓칠까봐 안타까워하는 그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월급을 받고 일하는 저들도 저렇게 안타까워하고, 기를 쓰는데 하물며 영원한 하늘나라 상급을 바라고 사는 우리는 한 영혼을 어떻게 대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저 자신부터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정을 닮아가야 합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 불타는 가슴을 닮아가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열심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으로 믿고 뜨겁게 따르려는 자는 반드시 그 결과가 한 영혼을 향한 열심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로 해도, 아무리 뜨겁게 믿겠다고 말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다면 너는 몇 사람이나 나에게 중매했니?”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첫째, 우리의 ‘열심’은 이렇게 전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저는 올해 전도 작정을 하면서 열 사람을 작정했습니다. 여러분은 몇 사람이나 작정하셨나요? 솔직히 열 사람을 써내면서 자신이 별로 없었습니다. 매년 다섯 명씩 전도 작정을 써내면서 단 한 번도 성공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예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한 적이 더 많았습니다.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보기도 했습니다. “너는 담임목사잖아? 목회도 얼마나 바쁜데 어떻게 전도를 하겠어? 그리고 꼭 나가서 한 사람 데리고 오는 것만 전도가 아니라 네가 열심히 설교하고 심방하면 그게 다 전도 아니겠어?”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핑계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저는 바빠서요, 저는 숫기가 없어서요, 다른 건 다 하겠는데 전도는 정말 못하겠어요” 하고 핑계 대는 성도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그동안 제가 성도들보고 전도하고 하면 “목사님도 못하면서 무슨 전도?” 하고 얼마나 흉봤겠습니까?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든 올해는 꼭 전도를 하자, 올해는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자, 하면 된다, 마음먹으면 된다 하고 결심하고 지금도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주 전 소개했지만 하나님이 한 가정(유장용, 이정순, 유지수 성도 가정)을 제게 붙여주셨어요. 오늘 4주째가 되어 등록을 합니다만 정말 제가 직접 전도한 것도 아닌데 성탄절 때 우리 교회 와서 우연히 저를 만났고(화장실 안내) 그 후 또 우연히 통화할 일이 생겨서 “우리 교회 오세요” 하니까 “명절(설) 지나고 남편하고 가겠습니다” 하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진짜 오셔서 제 이름으로 등록을 하신 겁니다. 좀 겸연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내가 직접 가서 전도한 것도 아닌데 저를 인도자라고 쓰신 것을 보니 말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분들을 내게 붙여주셨구나, 내가 전도하겠다고 마음먹고 기를 쓰니까 하나님이 이 분들을 내게 붙여주셔서 전도하게 하시는구나, 그러니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 분들을, 이 가정을 책임지고 정착시키라는 뜻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을 품으면 하나님이 붙여주십니다. 물론 거리고 나가서 전도하고 집집마다 다니며 문을 두르려야 하겠지만 우리가 일단 뜨거운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찾아 붙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경험을 꼭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이 가족 덕분에 제가 용기를 얻고 올해 꼭 열 명, 전도목표 달성하자 하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꼭 저처럼 용기를 얻고 뜨거움을 품고 일단 시작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뜨거우신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열심’은 또한 찾아온 성도들을 중매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찾아오기만 하면 뭐합니까? 그분들을 정착시켜야지요. 우리 교회에 발만 들여놓으면 뭐합니까? 우리가 모든 수단방법을 다 써서라도, 모든 것을 다 내주고서라도 그 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해서 결혼시켜야지요. 우리가 중간에서 이런 중매자 역할을 꼭 해야지 이것을 못하면 책망 받습니다. “내가 그렇게 많이 보내주었는데 다 어디 갔냐?” “그 수많은 새가족들 지금 다 어디 있냐?” “왜 중매 제대로 못해서 나와 혼인시키지 못했냐?”고 하나님께 크게 야단맞게 됩니다.

지난 주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어떤 새가족이 “이교회 정말 냉랭하다”고 해서 제가 속이 상해서 며칠 몇날을 잠을 못 잤다고요. 그분 말씀이 제가 처음 왔을 때 환영도 열렬히 해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꽃도 주고 해서 “야, 이 교회는 정말 사랑이 많은 교회구나. 뜨거운 교회구나” 기대했는데 그 후에 몇 달이 지나도록 선교회에서도 아무 연락이 없고, 구역방학이라지만 구역에서도 연락이 없고, 누구도 아는 척도 전화 한 통도 안 해서 실망했답니다. 이 교회 계속 다녀야 하나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가 이 말 듣고도 잠이 오겠어요?

정말 많이 달라졌다지만, 정말 좋아졌다지만 아직도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면 심각한 문제 아닙니까? 물론 이렇게 냉랭해도 애써 적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를 쓰고 적응해야,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분들은 앞문으로 들어왔다가 뒷문, 옆문으로 나갑니다. 떠나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떠나도 잘 모릅니다. 누가 갔는지, 왜 갔는지 말입니다. 물론 우리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그 진심이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분들을 다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챙기고 책임지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성경을 읽다가 창세기 4:9을 주목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너무 시기해서 돌로 쳐 죽이고 시침을 떼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랬더니 가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 내가 한가하게 아우나 지키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난 모르는 일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저는 정말 이 말씀을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내 모습 아닌가? 이게 지금 우리의 모습 아닌가? 하나님이 ‘내가 보낸 그 수많은 영혼들, 새가족들 다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실 때 ‘내가 그 사람들이나 지키는 사람입니까?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하는 우리의 모습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좀 더 뜨거워져야 합니다. 우리 좀 더 하나님의 열심, 열정을 품어야 합니다. 지금도 뜨겁지만, 지금도 열심이지만 이 정도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새 성전 짓고 난 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뜨거운 가슴’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뜨거운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의 온도는 아직 100도로 펄펄 끓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뜨거워본 적이 있습니까? 연탄재 발로 차는 사람처럼 뜨거운 사람 평가하고 판단하기 전에, “왜 저리 나서냐, 나대냐?” 하기 전에, “저 사람 왜 요즘 안 나오지?” 하기 전에, “우리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지?” 하기 전에 우리는 일생 예수 믿으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하나님의 열심히, 그분의 열정으로 뜨거워 본 적이 있었는지, 한 영혼을 향해 불타는 심정으로 나 자신을 내 준 적이 있었는지 정말 뜨겁게, 치열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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