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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을 바꾼 어리석음 (렘 2:11-13, 행 1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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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바꾼 어리석음 (렘 2:11-13, 행 17:22-23)


한국 초대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공부를 하고 당회 앞에서 세례문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평소에 며느리가 가르쳐 준대로 기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까?”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어머니, 이렇게 물어보거든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하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래 아가야, 알았다. 걱정하지마라”. 그래서 할머니는 이 질문이 나오자 마자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며느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다시 질문이 계속됩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할머니는 또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신 바꿔 신지 말라는 거 아닙니까”. 할머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의 뜻을 잘 못 이해하여 신을 바꿔 신지 말라는 말로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이 신을 바꿔 신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신을 바꾸는 어리석음이라는 말입니다. 제1계명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신 계명을 하나님이 주신 계명 가운데 왜 제1의 계명으로 주셨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하나님과 다른 신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신을 바꾸기가 참 쉬우니까 절대 신을 바꾸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하십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놓고 다 바꿔라.’ 오래 전 삼성의 이건희회장이 한 유명한 말입니다. 1993년 이건희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급변하는 세계에서 변화는 생존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신경영 선언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삼성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 당시로는 변화라는 말도 익숙하지 않을 때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은 보수적인 사고의 틀을 가진 나라에서 바꾼다는 것은 드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변화나 바꿈이라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필요한 성장과 성숙의 요인입니다. 우리 시대는 바야흐로 ‘버림’(disposability)의 시대입니다. ‘일회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오래 쓸 것도 요즘에는 한 번 쓰고 버립니다. 버리는 것이 너무 많아지므로 쓰레기 문제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버리는데 익숙하다보니 아무 것이나 버립니다. 쓸 만한 것도 버리고, 버리면 안 되는 것도 버립니다. 심지어 사람도 잘 버립니다. 사귀던 사람도 쉽게 버리고 고무신 바꿔 신고, 심하면 부모도 버립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젊은이가 호주에 여행 가지고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살짝 자기만 오고 어머니는 버리고 왔습니다. 그 어머니가 치매가 약간 있어 못 올 줄 알았는데 세상이 그렇게 어리숙합니까? 그 어머니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집안이 꼴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변화의 시대이고, 아무리 바꿔야 산다고 하지만 아무 것이나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할 것이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꾸어야 할 것이 있고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흔히 ‘변하는 세계(world)와 변하지 않는 말씀(word)’이란 말을 합니다. 세계는 변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이건희회장도 마누라와 자식은 바꾸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바꾸어야 사는 세상에서도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로 다른 어떤 것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러시아 최초의 복음전파자는 성 안드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정교회는 비잔틴 교회의 전도로 988년에 키예프 대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가 예수 믿어 시작되었습니다. 1917년 레닌에 의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날 당시 러시아에는 정교회 교인이 98%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성당과 공공건물의 십자가가 별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가 별로 바뀐 70년 동안 세계를 호령할 것 같던 구소련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기였습니다. 70년 동안 다른 서방나라들이 엄청나게 발전하였지만 러시아의 경제, 문화 등은 낙후되었습니다.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을 바꾼 대가였습니다. 
  
이데올로기는 영성입니다. 현대의 이데올로기는 건강입니다. 건강과 부 그리고 번영은 인간이 만든 우상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치하고 그리스도와 바꾼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신문에 ‘인간이 신에게 도전장을 던지다. 신의 영역은 없다. 다만 인간이 가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인간의 과학과 기술이 조금 발달했다고 인간의 오만이 극치에 달했습니다. 과학과 기술과 지식이 하나님께 도전하는 바벨탑이 된 시대입니다. 과연 과학이 인간사를 해결할까요? 과학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절대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역대상 16:26에는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움직이십니다. 지구촌의 지진, 화산, 홍수, 대설, 한발 등에 대하여 인간이 손 하나 옴짝 못하고 당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절대로 바꾸지 말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는 우리 민족, 우리 세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신을 신이 아닌 것과 바꾸었습니다. 

11절 상반절에는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고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 가장 어리석고 큰 죄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신이 아닌 것과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것을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편리대로 만든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떤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합니다. 세상의 어떤 나라도 고유한 민족의 신을 바꾼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도 참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섬기는데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버리고 거짓 신을 섬겼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죄악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4:20에는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고 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바알이나 아세라 목상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신들은 농사를 풍요하게 하는 신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는 에베소의 큰 신인 아데미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큰 신인 아데미도 풍요의 신입니다. 하나님께서 풍요하시고 풍요하게 하시는 분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신을 하나님과 바꾼 것입니다.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올 때에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애급의 철마차를 모두 홍해의 물에 빠져 죽게 하시고,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투정할 때에 메추라기를 주시고, 목말라 할 때에 물을 주시고, 광야에서 처음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 모세의 손이 높이 올라가 이기게 하시고, 요단강의 물이 마르게 하여 건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들은 하나님을 다른 신과 바꾸었습니다. 어리석은 일을 한 그들은 바보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는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진주 하나를 샀다고 합니다. 값진 보화가 숨겨져 있는 밭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것을 다 팔아 보화가 있는 밭을 샀다고 합니다. 가장 값진 것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경우는 있어도 가치도 없고 생명도 없는 것을 가지려고 가장 귀한 있을 것을 팔아버리고 바꾸는 어리석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값없는 것과 바꾸는 어리석은 자가 다 이와 같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가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기가 아까워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떠난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취미에 빠져 교회와 예배를 세상 즐거움과 바꾸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유대인들은 지구상에서 일신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일신교(monotheistic)는 단순히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사야 45:21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유일신관을 가진 다른 종교가 있습니다. 이슬람교입니다. 같은 유일신관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기에 두 종교는 자주 충돌합니다. 그 외의 많은 타종교는 유일신 종교가 아니라 다신종교입니다. 
  
어떤 선장과 무뚝뚝한 기관장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하던 중 항해에 누구의 전문적 기술이 더 필요한지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다음 날 하루 동안 두 사람의 임무를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기관장은 갑판에 올라가고, 선장은 기관실에 내려갔습니다. 몇 시간이 안 되어 기름으로 얼룩진 채 땀을 흘리며 선장이 올라왔습니다. “기관장, 기관실로 좀 내려와, 배가 안가”. 그 때 기관장이 말했습니다. “배가 좌초됐어요”. 
  
하나님을 다른 신과 바꾸고 인생 항해가 편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다른 신과 바꾸면 인생의 배가 제대로 갈 수 없습니다. 배가 바로 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가 좌초되기 일쑤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헤롯왕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했을 때에 왕은 한 사람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00년 후의 판결은 “헤롯의 말이 옳았습니다. 왕의 자리는 하나뿐입니다”. 유대인의 왕은 오직 한분입니다. 이 세상의 왕은 오직 한 분입니다. 온 우주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 생명과 바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있습니까? 절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이 찬송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삶의 결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총의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습니다. 
  
11절 하반절에는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영광스런 것을 무익한 것과 바꿉니다. 생명을 생명 없는 것과 바꿉니다. 
  
전쟁 때 피난길에 오른 어떤 어머니가 정신이 없어 아기를 안고 온다는 것이 인형을 안고 왔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기 대신 베개를 안고 왔다고 합니다. 생명대신 생명이 없는 것을 바꾸어 가지고 갔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정신이 나갔으니까 그렇습니다. 정신이 있으면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세상에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바꾸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영광이신 하나님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다고 합니다. ‘무익한 것’이란 말의 헬라어는 ‘벨로 요일’입니다. 이 말은 ‘바알’ 같은 것, ‘바알’ 스러운 것이란 말입니다. 바알은 참 신이 아닙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섬겼지만 그들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함께 참 신이 누구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전투를 벌입니다. 

열왕기상 18:26에는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고 합니다. 바알이 아무 응답이 없자 엘리야는 “바알신이 잠깐 어딜 나갔나? 길을 갔나? 잠들었나?”라고 조롱합니다. 바알 신이 가긴 어딜 갑니까? 바알은 처음부터 없는 신입니다. 참 신이 아닙니다. 바알 스러운 것은 어떤 것입니까? 없는 것, 해로운 것, 무익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에게는 예수님 외에 어떤 것도 다 배설물 같았습니다. 그는 좋은 가문을 가졌지만 가문도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스승에게서 학문을 닦았지만 그의 지식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아버지에게서 많은 재물을 유산으로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재물도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로는 엄청난 특권인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특권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라는 지위도 있었지만 그것도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전 인류에 예수님을 제외하고 ‘다 이루었다’라는 유언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했지만 인도까지 가기엔 병사들이 너무 지쳤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근대 국제법의 아버지 휴고 그로티우스는 “내 생애에 가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탄식했습니다. 미국의 6대 대통령 존 퀸시 아담스는 “나는 무익한 야망에 젖어 헛되이 인생을 낭비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을 좇다보면 무익한 것밖에 남을 것이 없습니다. 
  
히브리어 1은 ‘에하토’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숫자 1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유익하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0에서 1까지가 멀까요? 1에서 2까지가 멀까요? 0과 1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무익과 유익의 차이입니다. 1은 아무리 작아도 있는 것이므로 유익합니다. 그러나 0은 없는 것이므로 무익한 것입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없이 유익이란 없습니다. 
  
현대 케냐의 의료선교사인 해리 크라우스가 쓴 ‘비밀은 몸에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암에 대한 재미 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암은 정확하게 사랑과 반대로 행동한답니다. 암세포들은 주변 세포들에게 절대로 유익을 끼치지 않습니다. 암세포들은 오로지 자신한테만 관심이 있습니다. 항상 ‘나, 나, 나!’라고만 외칩니다. 내 공간이 필요하고, 내 시간이 필요하고, 내 뜻대로 되어야 하고, 내 방법만 주장합니다. “나를 먹여줘요”라는 것이 암세포의 외침이라고 합니다. 암이 왜 나쁜 병인지 아십니까? 암은 아주 이기적인 병입니다. 자기만 유익하게 하는 병입니다. 주변의 모든 영양가를 다 빼앗아갑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전부 암 같은 세상입니다. 절대로 남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무익한 것만 추구하고 영광을 무익한 것으로 바꾸게 합니다. 
  
영광이란 말은 헬라어로 ‘독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인정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는 것입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어떤 이유로, 얼마만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라고 하면서 자문자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온갖 귀한 선물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을 빼면 동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예술 중의 음악에서 하나님을 빼면 참 생명이 없습니다. 미술에서 하나님을 빼면 그림에 생명이 없습니다. 문학에서 하나님을 빼면 글에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빼면 모든 것이 생명을 잃고 맙니다. 하나님을 빼면 모든 것이 무익합니다. 앙꼬 없는 찐빵이 된다는 말입니다. 

  
결론 

우리나라 공군 전투기 가운데 30년이 넘은 전투기가 전체 41%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년 평균 3명의 조종사가 전투기 추락으로 순직합니다. 작년에는 7명의 조종사가 순직했습니다. 전투기가 새것이라고 사고 안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아무리 전투기가 비싸도 비상사태가 되면 조종사의 판단에 따라 전투기를 버리고 조종사는 탈출합니다. F-22 랩터는 한대의 값이 무려 2억6천만 달러입니다. F-35 통합공격전투기는 4,800만 달러입니다.  F-15은 1억 달러입니다. 전투기가 아무리 비싸도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전투기는 조종사의 생명과 바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비싼 전투기를 버리고 조종사는 비상 탈출하여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 지방에 가셨을 때에 레기온(군대) 귀신 들린 자를 만나셨습니다. 포악하고 힘이 센 귀신을 향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합니다. 귀신은 자기를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 주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게 허락하셨는데 2천 마리의 돼지가 언덕 아래로 떨어져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그 때 돼지가 만 마리였어도 다 죽게 했을 것입니다. 돼지가 다 죽는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생명을 얻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인간의 생명을 마구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짐승의 생명으로 대신하셔서 짐승을 잡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생명 없는 것, 죽은 것, 가치 없는 것과 바꾸었습니다. 이런 인간의 행위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배반입니다. 이런 배반이 죄란 것입니다. 
  
신을 바꾸는 것은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죄악입니다. 하나님께 배은망덕입니다. 인간에는 멸망입니다. “나의 생명 되신 주”라고 찬송합니다. 생명 되신 하나님을 어떤 것과도 바꾸지 말고, 생명 없이 살고, 생명을 무익한 것과 바꾼 자들에게 다시 생명 되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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