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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헌금을 요청한 사람 (고전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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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을 요청한 사람 (고전 16:1-9)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 과부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의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헌금을 예수님이 만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받으셨으니 헌금을 하지 말고 이 돈을 생활비로 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더라도 헌금은 해야 된다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실 때 과부의 헌금을 축복과 연결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헌금을 많이 했으니 하나님이 많은 복을 주실 것이다, 이런 식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이미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굳이 축복을 거론하면서까지 헌금의 의미를 말하는 것은 헌금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리고 그것은 유치한 일인 것입니다. 

헌금, 이것은 민감한 주제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 가면 늘 헌금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시험이 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마 저도 그럴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러, 하나님 말씀을 들으러 교회에 가는데 갈 때마다 헌금 얘기를 하면 당연히 속이 상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헌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헌금은 예배의 일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하기 전에 헌금을 드리지 않고 예배가 끝난 후에 헌금을 드리지 않고 예배하는 도중에 헌금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헌금이 예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대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헌금에 대해서도 배워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법, 찬양하는 법, 섬기는 법, 전도하는 법,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되는 것처럼 헌금에 대해서도 바로 배워야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바른 예배자와 바른 헌금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배우기 위해서는 교회가 가르쳐야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헌금을 권유하지 않고 헌금을 부탁하지 않고 헌금을 명했습니다. 이점을 주목해야 됩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부탁한 것 같이’라고 말하지 않고 또 ‘권고한 것 같이’라고 말하지 않고 ‘명한 것같이’ 아주 강력한 표현을 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성경구절을 주목해야 됩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교훈의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는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인심을 쓴다거나 교회를 배려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배려하여 인심을 쓴다’ 만약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헌금한다면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합당한 마음이 아니고 또 ‘내 돈인데 헌금하고 안하고는 내 자유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의 헌금이 내가 하나님을 배려하고 인심 쓰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 헌금을 받으신 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Thank you, 고맙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헌물을 축복하실지언정 고맙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또 우리의 헌금이 교회를 배려해서 하는 것이라면 목사가 헌금을 받은 다음에 축복하는 대신에 성도들에게 고맙습니다 라고 감사해야 될 터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성도의 헌금 뿐만 아니라 성도의 봉사나 헌신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축복할지언정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건 성도들의 믿음의 표현이에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고 하나님과 본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가 만일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오늘 예배에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보러 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러 오는 것입니다. 목사를 보러 오는 게 아니에요.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오는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고 또 본인의 신앙을 위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하고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마치 자기에게 인심을 베푼 것처럼 감사한다면 그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헌금에 대해서도 목사가 축복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헌금 많이 하셔서 고맙습니다. 자기에게 주는 것이 아닌데 이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 때문에 드리는 것이고 그리고 상급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에게 헌금을 드려야 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주의 종에게는 그 헌금을 수령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드리는 것도 의무이고 받는 것도 의무입니다. 드리는 것도 믿음으로 하는 것이고 받는 것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드리는 것도 어렵고 받는 것도 어렵습니다.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지만 받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받는 것이 헌금을 드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이유는 헌금을 드릴 때는 드리는 순간에 의무가 끝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수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올바로 사용해야 되는 의무가 남아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사실은 더 부담스럽고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셨을 때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그의 집에 남은 마지막 밀가루와 마지막 기름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자기에게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어느 자존심 있는 남자가 과부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밀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서 자기에게 가져오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지만 엘리야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정성을 받아야 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이 그 여성의 가정에 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받는 것도 순종이에요. 받는 것도 믿음이 필요해요. 받는 것도 책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헌금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종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쓴 편지인데 이들의 헌금은 장차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쓰여질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헌금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의 성도들은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바울에게 바치는 이유는 바울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신뢰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만나본 적도 없는,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헌물을 바울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을 신뢰하기 때문에. 바울이라는 사도,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기 때문에 바울에게 그들의 헌금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의 역할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그만큼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울 한 사람을 그만큼 교회가 신뢰하고 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헌금이 올바른 의로운 목적을 위해서 쓰여지고 또 하나님의 도움이 임하고 믿음에 도움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믿음이 성장하고 교회가 덕이 되고 서로 돕고 이 모든 귀한 일이 사람들이 신뢰하고 하나님이 쓰시는 한 사람의 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종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이에요. 

네 번째는 아마 이천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문제인데 이십일 세기에는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지금 이 시대에는 굳이 교회가 아니더라고 좋은 일을 하는 단체가 많이 있습니다. 이름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많은 자선단체 비영리단체기 존재합니다. 

몇 주 전에 뉴스위크 커버스토리를 보니까 미국의 영화배우 조지 클루지가 아프리카에서 하는 자선활동에 대한 기사가 실렸던데 조지 클루니가 뛰어난 배우인 것 뿐만이 아니고 상당히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그래서 장차 정치인으로서도 소질이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생각을 사람들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좋은 일에 재정적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내가 굳이 교회에 헌금을 하지 않더라도 이런 좋은 일에 기부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아니하냐’라는 질문입니다. 대답은 무엇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선한 일에 기부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일도 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대로 해야 됩니다.

그건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내가 선하게 살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어도 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하면 굳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그렇지 않지요. 선한 일은 선한 일대로 하고 예배는 예배대로 드려야 됩니다. 선한일이 나를 의롭게 만들지 못한다면, 물론 헌금이 나를 의롭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사람에 대한 선행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에게 베푸는 기부가 헌금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섯 번째로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대한 투명한 감독이 필요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헌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인정한 사람이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함으로써 투명한 사용을 보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당연한 일이고 상식에 속한 일입니다. 상식적인 일인데 사람들이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것에 있어서 상식을 전제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은 기본적인 상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제 스승 목사님이 신학생들에게 강의하실 때마다 하시던 말씀이 ‘주의 종은 성령도 받아야 되지만 상식도 받아야 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많은 주의 종이 성령은 받으려고 애를 쓰는데 상식이 없어서 문제를 발생시켜요. 아주 기본적인 상식, 이게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대인관계에 대해서라든가 성도들에 대해서라든가 교회 당회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서라든가 또 대외적인 관계에 대해서라든가 신앙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라든가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상식을 결여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적인 능력을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식을 대체해줄 수는 없어요. 그건 마치 산을 움직일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에요. 사람이 모든 비밀을 알고 모든 예언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산을 움직이는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는 게 가능한 것처럼, 또 내 소유로 구제를 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는 게 가능한 것처럼 오늘날 교회든 목회자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능력 ․ 전도의 열정 ․ 주님을 향한 헌신이 있을지라도 판단력이 결여되고 지혜가 부족하고 상식이 없고 그리고 주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사랑이 결여돼 있다 보니까 그 모든 믿음이든 능력이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이 무의미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어디를 봐도 결코 억지라든가 무리수를 든다든가 이런 것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더라도 사도바울이 너희가 한꺼번에 헌금을 하면 부담되니까 미리 준비하라고까지 말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사람들이 억지로 헌금을 해서 갑자기 집을 담보로 잡는다든가 이런 식의 무리를 두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준비해야 됩니다. 미리 준비해야 됩니다. 목회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오랜 세월동안 그것을 위해서 실력이든 신앙이든 공부든 또 경험이든 준비해야 풍성한 목회를 할 수가 있고 결혼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준비해야 됩니다. 

평소실력으로 결혼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결혼식을 준비하라는 게 아니고 결혼을 준비해야 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젊은 남녀들은 결혼에 대해서는 하나도 준비하려고 하지 않고 한 시간이면 끝나는 결혼식을 몇 년 전부터 준비하려고 합니다. 쇼맨십. 결혼식이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하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객들은 그보다 더 좋은 결혼식도 가 봤어요. 그러나 그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게 아니에요. 얼마나 꽃이 많고 조명이 아름답고 신부의 드레스가 얼마나 예쁘고……. 

그게 그거지요. 예쁘면 얼마나 예쁘겠어요. 너무 그런데 돈을 쓰려고 하지 말고 너무 그런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어차피 하객들은 멀리 있기 때문에 안보여요. 결혼식을 준비하지 말고 결혼을 준비해야 되는데 이것은 많은 대화와 또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와 또 양보와 사랑과 지혜와 인격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얼마나 많은 가정이 예단 준비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옷을 못 입고 삽니까. 쓸데없는 일을 통해서 쓸데없이 서로 마음 상하고 왜 그런 관습을 그대로 유지해야 됩니까. 이건 구시대의 방식이에요. 구시대의 방식을 창밖으로 내던져야 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을 지혜롭게 준비해야 되는데 성경은 무리수를 두지 않습니다. 굳이 무리수를 둔다면 요단강에 발을 내딛으면 갈라지게 한다든가 홍해 바다 앞에서 홍해가 갈라지게 한다든가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그건 딱 한번 일어난 일이지요. 딱 한번. 되풀이 된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역사에 딱 한번 일어난 일입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시키는 이 모든 원칙은 상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고 우리를 배려하십니다. 이걸 우리가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고 믿음에 성장이 됩니다. 왜 내 신앙의 성장이 더디냐. 왜 내 가정이 신앙적으로 변화되는 것 같지 않느냐. 온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들어야 될 말씀을 듣지 못해서도 아니고 온유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 마음 밭이 옥토같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온유한 심령을 가지면 이 모든 것이 제대로 역사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도바울은 헌금에 대해서 가르친 것뿐만이 아니고 헌금을 명했습니다. 만일 오늘날 교회가 이와 같이 하지 못한다면 그건 교회가 당당하지 못해서 그렇든 담대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당당하지 못한 것도 잘못이고 담대하지 못한 것도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헌금을 받고 그것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당당하고 또 담대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겸손하게 바치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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