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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심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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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눅 19:1-10)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있다. 

1)하나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이다.
벧전 1: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2)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3)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이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지난 2월 중순, 부천남부역 잔디광장에서 뉴타운개발로 인한 피해 교회 대책 촉구를 위한 집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부당함을 지적하고 적절한 대책을 호소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 주민 상인들의 합세로 분위기가 정부 규탄대회로 전락했다. ‘이명박정부는 자폭하라!’ 조용히 빠져 나왔다. 그리스도인의 집회 모습이 아니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인 조용기목사의 이슬람채권 세금혜택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면서 대통령 하야 운동, 국회의원 탈락운동 운운하는 발언으로 인해 언론의 비난을 산 사례도 있었다. 가뜩이나 개신교 지도자들의 부도덕한 행동들로 인해 자성의 목소리가 높을 때 정치적 발언과 사회적 물의를 빚는 일들로 개신교의 위상이 추락시키고 하고 있다. 

지난 주간에는 한기총 해체에 대한 손봉호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일간지에 실렸다. 개신교 120년 역사 가운데 가장 타락한 시대라고 강력하게 각성을 촉구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없을 만큼 타락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을 옹호하려는 단체들과 다를게 무엇이냐면서 한기총의 해체를 요청했다.

종합적으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삶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로서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겠다는 생각에 고민 중에 3월의 설교 주제를 ‘회심’으로 잡았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산상수훈(마5-7)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그중 한 부분을 보면...,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젠틀하다. 교양 있고, 질서 있고, 인정 있고, 품위가 있다.

그렇다면 나의 모습은 어떤가?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너무 탐욕적이지 않은가? 너무 세속적이지 않는가? 우리 공동체의 모습은 어떤가? 공동체 안에 진정한 희생과 섬김과 헌신의 모습들이 보이는가? 서로 손해보지 않으려고 미루고 빠지고 숨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들은 아닌가? 

초신자라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5년 10년 그 이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이고, 무정하고, 비판적인 모습이라면 분명코 잘못된 것이다. 

20년의 시간 동안, 감사한 마음이 한이 없다. 주님의 제자를 삼겠다는 일념으로 달려 왔고 어느 정도 열매를 거두게 하셨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속에 세상 사람들의 습관들이 종종 보일 때면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잘못 가르쳤구나!’ 

초기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런 교회의 모습은 이 땅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꿈의 교회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이 땅에 존재했다면 똑같지는 않더라도 그런 교회 모습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오늘날 우리의 내면에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수 없이 많이 눈에 띠는 교회당의 십자가를 보면서 마음이 그리 편안하지가 않다. 십자가는 누구를 위하여 세웠는가? 예수님 홀로 십자가 지고 계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가? 나름대로 고민하다가 발견하게 된 것이 ‘회심’의 문제였다.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우스꽝스럽고 흉하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속히 다시 고쳐 끼우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그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가 있다. 

삭개오는 여리고 세무서장이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오셔서 지나가시는데 많은 무리가 에워싸며 가고 있었다. 삭개오의 심중에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예수란 사람이 뉘기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따라가고 있는거지?’ 예수님을 보고 싶었으나 사람은 많고 키가 작아서 볼 수 없었다. 

눅 19:3-4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그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리들 보다 앞서서 뛰어가 거리의 돌감람나무로 올라갔다. 체면 불구하고 예수님이 자기 앞으로 지나가시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셨을 때 돌감람나무 가지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셨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고 싶구나.’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삭개오는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집으로 모셔들였다. 이때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 두 가지를 말씀드렸다.
1)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
2)남의 것을 속여 탈취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우리는 삭개오의 모습을 통해 참된 회심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1.참된 회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인격적이란 지정의의 3가지 요소가 균형잡힌 인격을 말한다. 대인관계에서 인격적인 만남은 진정한 교제를 이루게 된다. 삭개오의 회심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근거로 한다. 

삭개오는 나이도 체면도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돌감람나무 위에 올라 갔다. 만일 그에게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약했다면 그는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열망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웠다.목회심리학자 로버트 레슬리 박사는 삭개오의 행동에 대하여 “인간정신의 도전적 힘의 발휘”라고 좋게 평가를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실패하는 이유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참된 회심은 영생이 되시는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행동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했고, 그 만남을 기뻐했고,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였다. 그와 같은 행동들이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켰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참된 회심은 인간의 활동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밴쿠버 리전트대학의 영성신학자인 고든 스미스 교수는 ‘참된 회심은 구원의 시작’이 된다고 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성에 문제가 발생되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참된 회심 없이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2.참된 회심의 증거 또는 목표는 무엇인가?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참된 회심의 증거는 변화이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그에게서 나타난 변화는 무엇인가? 두 가지로 요약된다. 

1)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 
2)남의 것을 속여 탈취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 

이와 같은 결단은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통해서 나타난 결과이다. 참된 회개는 다음과 같은 변화의 노력들이 나타난다.(고든 스미스 교수)

1)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교제를 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의도적인 하나됨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분명한 증거에 따르면 변화된 인간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며 참다운 기쁨과 능력과 생명을 누리고자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2)사회적 차원,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변화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을 추구한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성숙함이 있는 것이다. 참다운 회심을 경험한 성숙한 사람들은 사랑 받을 줄을 알고, 사랑할 줄을 안다. 성숙한 사람은 잘못했을 때
용서를 구하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참아준다. 예)목동 선교관에서의 공동생활.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3) 영적변화로서의 온전한 인격
영적변화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에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곧 겸손을 가리키는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 온전한 인격은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으며 혼란한 세상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오늘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지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두 번째는 그의 삶의 변화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심의 모습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그 동안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지혜, 능력,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심의 증거인 것이다.

오늘날, 나의 내면에서 나타나는 현상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들...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들은 결코 주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함을 잃어버리고 죄책감과 물질주의에 예속되어 이기적이고, 서로 간에 담을 쌓고 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회심이 없는 상태에서 제자훈련, 성경공부, 금식기도, 교회 봉사는 의미가 없다. 불평과 다툼만 발생시킬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모습을 보라. 첫 단추가 잘 끼워졌는가?
이것은 아닌데... 고민과 근심만 하지 말고 다시 처음 믿었던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모습을 잘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고쳐야 한다. ‘회심’에 대하여 고민하고 기도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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