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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이터 신앙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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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신앙 (시 23:1-6)


I. 일상 평안 감사

저희 집 딸 아이 단비가 어릴 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 아이가 정상아보다 이빨이 좀 빨리 났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보였습니다 만은 금방 그게 별로 좋은 일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아 가기 시작했지요. 영글지 못하고 난 이빨인지라 썩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유치원 다닌 날 수 만큼이나 치과를 다녔습니다. 한번은 제가 단비를 데리고 치과를 갔지요. 마침 이빨 하나를 뽑는 날입니다. “아이들 이빨 하나 뽑는데 얼마나 받습니까?” “2만원쯤 받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1-2분이면 됩니다.” “1-2분에 이빨 하나 뽑고 2만원 받으면 너무 비싸지 않소.” 그랬더니 치과의사의 말이 걸작입니다. “그러면 30분 걸려서 천천히 뽑지요. 뭐~”

생각할수록 진리 아닙니까? 실컷 고생하고 2만원 주면 감사하고, 고생없이 2만원 주고 나면 아깝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병으로 입원했다가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퇴원해서 “감사합니다” 하는 감사의 봉헌은 본 적이 있습니다만 “저 사람들 저렇게 입원씩이나 하는데 나는 입원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참 감사합니다” 하고 드리는 봉헌은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역경을 극복하는 지혜도 중요하지만 순경을 감사하며 잘 가꾸는 지혜는 더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하루를 지내고 한달 일년을 보내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야단스런 사건이 있었어야 감사하는 것 어리석은 일 아니겠습니까? 가장 평범한 일상생활 한 가운데서 동행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손길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을 때에 참된 신앙이 아니겠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며 평생 커다란 사고없이 살아가는 것, 이것 기적 아니겠습니까?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다녀오마! 나섰던 가족들 가운데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객사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1년에 154만명입니다. 인도에서는 길을 걸어가다가 곤충에 물려 죽는 사람이 2만명입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1년에 굶어죽는 사람이 3천만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아무런 일 없이 한달 일년을 보낼 수 있었다니 기적이 아니냐는 얘기입니다.

II. 목자와 함께 노는 동물(양)

한 사람의 한 평생의 삶을 일생이라고 얘기합니다.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이라는 얘기겠지요. 여기엔 시행착오도 여기에는 연습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제대로 해석하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고 살아가십니까? 인생을 싸움터로 생각하고 살아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을 일터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한편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놀이터, 잔치집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동물의 세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사자나 늑대처럼 싸워서 이겨야 사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소나 나귀처럼 열심히 일해야 살아갈 수 있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이라고 하는 동물은 목자와 함께 놀이하며 사는 동물입니다. 

이처럼 사람들 중에도 이 세상을 직장이나 가정을, 심지어 신앙생활, 교회생활까지도 그곳을 사자처럼 싸움터로 만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도 전쟁처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운전 한번을 하더라도 전쟁터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한편, 세상을 일터로 알고 목적도 재미도 없이 소처럼 일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없이 탐욕을 부풀리며 이기심을 채워가는 것이 인생살이인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거지요. 

그러나 “양”이라는 동물은 싸움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동물입니다. 멍에 메고 쟁기 짊어지고 일터로 나갈 수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약하디 약한 동물이 양입니다. 자기를 보호할만한 무기 하나 없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발톱도 없습니다. 독사처럼 독도 없습니다. 소처럼 남을 들이받을 수 있는 뿔도 없습니다. 말처럼 뒷발질할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등도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삼거나 해치려하지 않습니다. 만약 양이 들이받고 산다면 그건 염소이지요. 양은 오직 푸른 초장에서 쉬고 노는 신비한 동물입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싸움 잘하는 이리떼도 있었고 일 잘하는 소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컬어 싸움 잘하는 사자나 이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 잘하는 소나 나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내 양이다.”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가족들을 일컬어 한 마리의 “양”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교제와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관계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 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관계가 파괴되어졌을 때에 영광스러운 교제를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에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고, 신부로 삼고, 아들 삼아 주시기 위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너희들은 한 마리 양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일까요? 

우선, 양은 매우 약한 동물입니다. 조금만 비탈지고 험한 길에는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올라가지 못하고 도무지 제 몸도 보호할 줄 모르는 놈이 양입니다. 또 겁이 많습니다. 물소리만 나더라도 놀라서 뒤로 나자빠집니다. 한없이 한없이 도망가다가 뒤로 벌렁 나자빠져서 네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경끼를 일으키는 동물이 양이라는 동물입니다.

매우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자기가 늘 먹는 풀인데 이게 먹을 수 있는 목초인지, 못 먹는 독초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매일 다니는 길인데 안내해 주지 않으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개는 십리 백리 길도 찾아옵니다. 소도 말도 자기 집을 찾아옵니다. 벌이란 놈은 눈을 떼어내도 자기 집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양은 모퉁이만 돌려놓으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이러한 미련한 동물이 팔레스타인 산 중턱에서 살아 간다는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산은 험하지요 계곡의 물은 급류지요. 그뿐입니까? 사자 늑대 곰과 같은 사나운 짐승들이 적잖이 살고 있었습니다. 산에는 온통 가시덤불이었고 뜯어 먹을 풀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쯤되었으니 그 양을 돌보고 인도해 줄 목자가 꼭 필요했던 게지요. 


III. 목자

양을 돌보는 목자에겐 임무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우선, 길도 모르고 어디에 좋은 풀이 있는지 모르는 양들을 안전한 길로 인도해서 좋은 목초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먹어도 된다. 이것은 먹어선 안된다. 독초와 목초를 구별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양들이 너무 가파른 곳이나 돌이 많아서 못 가는 곳이 있으면 엉덩이를 떠밀어 주기도 하고 정히 약하거나 어린양이 있으면 품에 안아서 험한 길을 건너 주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가시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릴 때는 품에 안고 따스한 우리안에 눕혀주는 일이 목자의 일이었습니다. 사나운 이리떼나 도적떼가 나타나면 생명을 걸고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 주었습니다. 

이 목자 곁에서 살아가는 양은 이 세상을 싸움터로 알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터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목자의 보호아래에서 목자의 품안에서 노는 놀이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싸움터로 생각하는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들판에서, 세상을 일터로 생각하는 힘센 자들이 기계를 자랑하는 산마루에서, 싸울 수도 일할 힘도 없는 한 마리 어린 양, 어떻게 이 세상을 잔치하는 집으로, 노래하는 집으로, 놀이터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세상 살다보면 부족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인 지혜가 얼마나 부족한지 미련하기 짝이 없어요.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많은데 아는 것도 없어요. 지식이 모자라요.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어쩌면 그렇게 환경도 모자라는게 많은지.

 ♪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아무 것도 모르니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아기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 줍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 줍소서.

이것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진실한 사람들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목자를 가지고 있는 양은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의 목자는 강하시다. 나는 미련하지만 우리의 목자는 지혜로우시다. 나는 가난하고 부족함 투성이지만 우리 목자는 풍요하신 부자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과 노래와 선언이 가능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풍성한 축복의 노래입니까? 

지금까지 부족함 때문에 울고 살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내 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심한 난관에 부딪친, 누구에게 얼굴조차 보여주기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며 살아가다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이 아침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는 능력이 되지만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미련한 말이 되겠지요. 이 고백이 있은 다음에 비로소 놀이터 신앙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게 될 때에 싸움터가 변하여 일터가 되는 것이고 장례식장이 변하여 잔치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로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선언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자되신 그분은 눕게 하시고 쉬게 하십니다. 놀게 하시고 노래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을 놀이터로 만들기 위해 양떼를 돌보는 목자의 일과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른 새벽 양떼를 몰아 초장에서 풀을 뜯게 합니다. 그러다가 한낮이 되면 태양이 내리쬐이고 양떼들은 피곤과 갈증을 느끼게 되지요. 그러나 양들이 한창 더위를 느낄 때 물을 먹이면 안됩니다. 목자는 그늘진 푸른 목장으로 인도하여 편히 쉬게 하고 되새김질을 즐기게 합니다. 그러다가 서늘한 오후가 되면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양은 본래 겁이 많은 동물이요 수영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가파른 계곡에서 물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잔잔한 냇가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자와 양은 푸른 초장에서 놀고 잔잔한 물가에서 쉬고 놉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는 주려 죽는구나” 

피곤에 지쳐 탄식할 때 성도들은 “나의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노래합니다. 할렐루야!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10) 선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IV. 부족함이 없다

놀이터 신앙은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삶의 경지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서 놀게 하시고 생명시냇가에서 쉬게 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염려는 목자없는 양들의 탄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너희 천부께서 너희가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느니라. 

배고픈 양은 눕지를 못합니다. 영혼에 굶주림이 채워지지 않는 사람, 그 갈증이 해갈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안식할 수가 없습니다. 배고픈 양은 이리저리 헤매고 뛰어다닙니다. 쉴 수가 없습니다. 신령한 양식에 배부르고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안식이 있고 인생은 놀이터를 가꿔가게 되는 것입니다. 

피곤한 양, 고달픈 양, 쇠파리떼에 시달리는 양은 눕지 못하고 놀지 못합니다. 길 잃은 양은 결코 쉬지 못합니다. 하늘에 부요하신 주인되시는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풍요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가는 사람들,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신령한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놀이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는 이 시간이 참 좋아요. 그래서 말씀을 전하며 저는 놉니다. 성령과 놀고 우리 교인들과 더불어서 놀아요. 저는 예배시간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찬양하며 놉니다. 기도하며 놉니다. 저는 교인들을 사랑합니다. 우리 한소망가족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과 보내는 시간이 제 인생의 행복입니다. 저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들 찬양하며 주님과 더불어서 주님과 노는 신비를 아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며 그분의 은혜가운데서 노는 행복의 비밀을 깨닫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직장은 전쟁터가 아니올시다. 직장에서 노는 법을 배우십시오. 학교에서 공부하며 노는 법을 배우십시오. 성도들과 목장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누리며 천국 가족들이 노는 법을 한번 배워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이 땅에 파송된 소위 일터 선교사입니다. 

양들이 재미있게 놀면 목자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재미있게 놀면 이 목사는 행복합니다. 우리가 신앙안에서 신앙생활가운데 행복하게 놀면 잔치하며 살아가면 우리 하나님, 우리 주님, 얼마나 행복해 하고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지난 3월 1일 400여명의 목자들과 기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우리 목자들이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 저는 또 그 모습을 보며 얼마나 행복한지 아직도 그 여운이 흐릅니다. 


V. 인도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목자와 함께 사는 양도 때묻고 더럽혀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때로 실족하여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부르는 노래가 3절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본문의 배경이 있습니다. 일찍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으로 적장 골리앗을 때려 눕힙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시기심을 얻어서 이곳 저곳 이방 땅으로 도망을 다니게 됩니다. 급기야 그는 임금이 되지요. 가는 곳곳마다 승승장구하여 적을 무찌르고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으려니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던 바로 그 시점, 다윗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품 대신 엉뚱한 품을 찾아 안식과 놀이를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안식도 놀이도 기쁨도 평안도 없었습니다. 갈등과 고통과 번민 뿐이었습니다. 다윗이 ‘이제는 영원한 멸망이구나’ 낙심하고 있을 때에 또 다시 하나님의 손길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변질되었으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시인은 울며 외칩니다.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도다. 하나님만이 때묻는 내 영혼을 깨끗케 하시고 소생시키는 구나. 

소생시키는 차원도 놀랍습니다 만은 소생시키는 이유 또한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회복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나를 소생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소행을 보면 멸망받아 마땅하지요.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리라(사43:25)

자기 이름을 위하여 여러분 모두를 의의 길로, 의인의 길로, 성자의 길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가족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무가치한 나를 소생시킨 주님을 사랑합니다. 멸망의 길에서 나를 붙들어 의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목자와 함께 사는 양도 때로 무서운 일을 당하고 위험스러운 일을 만납니다. 목자와 함께 사는 양도 때로 상처를 입기도 하고, 풀을 뜯다가 코를 다치기도 하고 머리를 다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백성들도 때로 인간임으로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을 당합니다.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니야. 두렵지요. 공포에 시달릴 때가 있지요. 

그러나 시인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는 한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4절) 이 구절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사람들이 흔히 음미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래 시제가 아니고 현재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다니게 될지라도”가 아니라 “다닐지라도” 분명히 현재시제입니다. 지난날의 고난 가운데에 여러분을 건져주셨습니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을 때 새로운 길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쩔쩔매고 있을 때 여러분의 손을 붙들어서 에벤에셀 이곳까지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지요.

미래의 어떤 어려움에 부딪힌다 할지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건져 구원시켜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살려 주셨듯이 미래에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을 분명하듯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날마다의 삶속에 풍요로움을 체험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생명을 여러분에게 공급하여 주실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할렐루야.

오늘 이 시간 어떤 시련속에도 무한한 용기와 위로를 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놀이터 신앙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갈 길이 없어도 막대기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적들이 나를 괴롭힌다 할지라도 주의 곤봉으로 적들을 때려 부술 것을 내가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당당하게 살아가겠습니다. 품위있게 살아가겠습니다.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위험있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겠습니다.

루마니아 공산 치하에서 너무나 커다란 고통을 겪었던 번브란트 목사님은 “내가 육체적인 고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수님보다도 더 심한 고난을 당한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창문너머에서 사람이 찢겨져 매일같이 죽어갑니다. 매일같이 모진 고문을 당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오늘 끌려나갈지 내일 끌려나가 죽을지 알지 못하는 두려움 속에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 빨간줄을 치기 시작했지요. 신구약 말씀가운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나오더랍니다. 신기도 하고 신비도 해라 1년 365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365번 기록해 두었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다른 번역을 가지고 또 읽어 내려가다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면 줄을 치는데 이번에는 366번 나옵니다. 아니 지난번에 365번 나와서 일년 365일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했는데 1번 더 나와서 366번 나오네요.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감동을 주시는데 “종아 4년에 1번씩 윤달도 있느니라.” 4년에 1번씩 끼어들어가는 2월 29일 그날도 두려워하지 말라. 아침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한낮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저녁에도 한밤중에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내가 너를 붙들리라. 참으로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뿐만 아니라 목자와 함께 놀이터에서 놀이하며 살던 양도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로 서러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평생 목자에게 털과 젖를 제공하던 양은 죽음의 순간에도 고기로 양피로 거룩한 제물로 드려짐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그 길이 목자와 더불어서 살게 될 영원한 길임을 알게 되겠기에. 


VI. 영원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절) 밤이 되었으나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세상 살아가다가 상처를 받았으나 위로 받을 피난처가 없는 사람은 가련한 인생이지요. 인생의 종착점에 섰으나 갈 곳이 영원히 없는 사람들 망한 인생 아니겠습니까? 

해변가에 조그마한 고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낮이 되면 마을의 아이들과 고아원아이들이 해변가에 가서 모래성을 쌓아놓고 땅 뺏기 게임을 합니다. 한 뼘이라도 한 웅쿰이라도 더 뺏어 보겠다고 아웅다웅 싸움을 합니다. 그러다가 해가 서산에 지고 나면 언니 형아 엄마 아빠가 달려와서 “얘야, 저녁 먹어라.” 그러다가 어둠이 찾아오면 해병대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그러면 집으로 향하여 그렇게 아옹다옹 한뼘이라도 더 뺏을려고 더 모아보려고 아귀다툼을 하던 아이들이 먼지를 툴툴털고, 땅 뺏기하던 모래를 발로 슥슥 문질러 놓고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한켠에서 아이들이 집에 가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있습니다. 해병대 군인아저씨가 “얘들아, 집에 가야지.” “아저씨 우리는 집이 없어요.” 아차 이 아이들이 고아원 아이들이구나! “엄마 아빠 기다린다.” “우린 엄마도 없어요.” “원장님이 엄마지.” “엄마는 엄마고 원장님은 원장님이지요. 우린 여기 있으나 집에 있으나 똑같애요.”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한 뼘이라도 더 찾아보겠다고, 한 웅큼이라도 더 움켜쥐어 보겠다고 아웅다웅 싸우다가 내 인생에 땅 거미가 내려지면 우리가 이 땅에 쌓아왔던 것 발로 슥슥 뭉게 놓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데 갈 곳이 없는 인생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고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불쌍한 인생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신앙생활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가능해졌습니다. 이 세상을 교회를 가정을 싸움터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목적없는 일터가 되지 말아야 됩니다. 목자되신 주님을 만나 쉬고 노는 놀이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VII. 잔치하는 신앙

옛날 선진들은 노동과 놀이와 노래는 같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어 모를 심으며 노래를 했습니다. 길쌈하며 노래했습니다. 배 저어 고기잡이 가며, 만선되어 돌아오며, 어기여차 어여차~ 노래부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현대인들은 놀이나 스포츠도 일이 되었고 전쟁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전쟁입니까? 아니면 일입니까? 노동입니까? 놀이입니까? 신앙생활은 예수 만나 은혜 받고 잘 쉬고 잘 노는 것입니다. 

오늘의 사는 한국 땅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영적인 큰 잔치가 필요합니다. “사세특밤”은 말씀의 잔치, 기도의 잔치, 치료의 잔치, 부흥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기도는 전쟁이 아닙니다.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 삶을 알며 노는 놀이입니다. 예배는 임무가 아니올시다. 주님의 말씀 들으며 노는 성도들의 특권입니다. 찬양은 놀이터 신앙을 축하하는 최고의 기쁨의 표시입니다.

오래전 접시돌리기 귀재로 알려진 난쟁이가 있었습니다. 시골 장날이 되면 이곳 저곳을 다니며 접시를 돌립니다. 국밥집 앞에서 접시를 돌리면 국밥집 손님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밥 한 그릇 얻어먹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접시를 돌리면 사람들이 동전 한닢, 두닢 떨어뜨려 줍니다. 그것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어느날 한 수도사가 거기를 지나가다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저 난쟁이는 어쩌다가 사람들의 놀이개감이 되었노. 불쌍히 여겨서 난쟁이를 데려다가 수도원에서 한 식구로 삼았습니다.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에 생기가 없습니다. 하나도 기쁨이 없습니다. 

가련하게 생각하던 어느날 이 아이가 기도실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나오더니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겁니다. 한번 기도실에 들어가면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세 시간도 좋습니다. 아니 저 철없는 것이 기도실에 들어가서 무슨 기도를 하길래 기도실에만 갖다 오면 얼굴에 생기가 도노. 몰래 한번 들여다 보았더니 기도실에 들어가서 접시돌리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해 드릴 수 있는 것 이것 밖에 없어요. 내 재롱 보시고 예수님 기뻐해 주세요.󰡓 

수도사가 기도실에 들어가 기도할 때는 늘 근엄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늘 엄숙하기만 하시던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난쟁이와 함께 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저 난쟁이는 도대체 누구이길래, 예수님이 내려와 저 난쟁이와 함께 놀고 있는 것인가?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늘 엄숙하여 나를 심판하고 내려다보는 분이 아니시구나. 늘 나를 재판하는 재판관이 아니시구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시구나. 우리와 함께 놀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재능, 은사, 재주를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놀면 내가 행복해 하면 하나님도 함께 나와 같이 행복해 하시며 나와 함께 놀아주시는 분이시구나. 여러분 놀이터 신앙의 신비를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양무리들이여!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자와 함께 노는 신비의 세계를 깨달아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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