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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실하신 하나님 (애 3: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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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하신 하나님 (애 3:18-25)


여러분,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어떻습니까? 누가 그러더군요. ‘답’이 하나여야 하는데, 답이 두 개라고. ‘답답’하다는 말입니다. 어느 한 구석 시원한 데가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종교계까지 난리입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불안한데다 리비아 사태 등 국제정세까지 심상치 않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피곤할 정도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표현이 요즘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져 먹어야 합니다. 자칫 마음이 흔들려 낙심하고 절망하면 나만 손해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즐겨 사용하던 예화입니다. 사탄이 부하들과 무기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어떤 무기가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을지 토론하는 자리입니다. 첫 번째로, 박해가 최고 무기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론이 나왔습니다. 박해를 당할수록 그리스도인들이 더 열심히 기도해서 역효과라는 의견입니다. 두 번째로, 유혹이 최고의 무기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 역시 반론이 나왔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넘어지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걸 보고 더 조심하게 되니까 비효과적이라는 의견입니다. 세 번째로, 실패가 최고의 무기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여기에도 반론이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실패하면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며 더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서 오히려 더 크게 성공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주장들을 펼쳐보지만 모두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 때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제시되었습니다. 절망입니다. 바로 이 절망이 최고의 무기라는 주장이 아무런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하면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끝내는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이 녹록치 못해도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희망이 있어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 절망에 부딪치게 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참 희망을 발견하심으로 용기백배하여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고통이 가득한 현실 : 절망의 어둠 속에서 

본문은 예레미야 애가(哀歌 Lamentations)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쓴 슬픈 노래입니다. 그런데 잘 읽어보면, 구구절절 슬픔이 배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이 묻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슬픔의 노래인 동시에 희망의 노래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배경은 B.C. 586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이 무수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강대국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완전히 망해 버린 것입니다. 예루살렘 시가지가 잿더미가 되고, 화려했던 성전이 무너지고,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고 ... 한 마디로 말해서 고통만이 가득한 현실이었습니다. 절망 그 자체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절망의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며 절규합니다. 

구구절절 당시의 비참한 상황이 그려져 있고, 선지자의 슬픔과 눈물이 배어 있습니다. 애1:1~2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 ” 아름답던 예루살렘 성이 폐허가 됐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려도 그치지 않습니다. 2절을 한글개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애1:2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 ” 밤새도록 애곡하는데, 눈물이 뺨에 하염없이 흐르고 또 흐릅니다. 

애2: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 ” 구름으로 덮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가로막혔다는 겁니다. 마치 태양을 구름이 가리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1:1과 2:1에 반복되는 말이 있죠. ‘슬프다!’ 이 말은 감탄사로 성경원어 히브리어로 ‘에카’(hk;ya)인데, 우리 말 ‘아이고!’에 해당합니다. 선지자는 ‘에카’, ‘에카’, ... 절망 중에 계속 탄식합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런 가운데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아무런 희망이나 가능성이 없는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도 이렇게 절규할 수밖에 없습니다. 18절~19절.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모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쓰디쓴 고통으로 낙심하는 모습입니다. 

[2] 어둠 속에 비취는 희망의 빛 : 성실하신 하나님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참담한 현실 속에서 그는 희망을 찾아냅니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취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세상의 현실 속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희망,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는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근거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레미야가 바라본 그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21절~22절.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현실을 보면 모든 게 끝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인자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중요합니다. 성경원어 히브리어로 ‘헤세드’(ds]j)인데, ‘언약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신 사랑으로 절대 취소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택한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23절을 보세요!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faithfulness)이 크시도소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성실이 크다고 외쳐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만일 변덕스러운 것이라면, 이랬다 저랬다 하면 불안해서 못 삽니다. 

아침마다 동녘에 태양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어제 떠오른 태양인 동시에 오늘 새롭게 떠오른 태양입니다. 1년 365일 어김없이 떠오르고 지곤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하루는 동쪽, 또 하루는 서쪽, ... 이렇게 왔다 갔다 한다면 불안해서 어찌 살겠습니까? 이것이 태양의 성실성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날마다, 아침마다 새롭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실성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는 성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밤이 깊어가는 것 같아도 분명히 아침은 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성실하심으로 우리의 일생을 지켜 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절망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노래합니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Put your hope in God)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때때로 절망의 어둠이 덮쳐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과연 무엇입니까? 어금니를 꽉 다물고 참아내는 인간적인 의지입니까? 아닙니다! 계속 몰아닥치는 고통의 현실은 아무리 강한 인간의 의지라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맙니다. 오직 성실하신 하나님의 사랑, 절대로 변치 않는 그 사랑만이 확신의 근거요, 희망의 근거입니다. 세상이 곤두박질치고 아수라장이 되어도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신 약속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영원한 천국이 들어갑니다. 승리의 확신이요 구원의 확신입니다.

지진이 나서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잔해 속에 많은 사람들이 깔려서 죽었습니다. 또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자꾸만 흘러갑니다. 구조대가 밤새워 구조 활동을 벌이지만 역부족입니다. 잔해 속에서 어둠의 공포 가운데 한 사람 두 사람 죽어갑니다. 그러기를 무려 한 달,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 소년이 생존해 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것입니다. 그는 아빠의 품에 안겼습니다. 

기자가 나중에 물었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한데다가 어둠 속에서 무서웠을 텐데 어떻게 버텼느냐고. 그러자 소년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우리 아빠가 오실 줄 알았습니다. 아빠는 항상 약속을 꼭 지키는 분이에요. 아빠는 제가 무서울 때마다 항상 달려오셨거든요!” 아버지의 성실한 사랑이 그 소년에게 버틸 수 있는 희망을 주었고 마침내 그를 살려낸 겁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배반하고 방치해 두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수도 없이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한 번도 배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성실하신 사랑을 기억하고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롬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39 ...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절망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죽음의 상황에서도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다. 영생의 희망이 있습니다. 혹시 절망의 상황이 닥쳐온다 해도 성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꼭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성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 회개, 간구, 감사

그러면 성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① 회개 :

절망의 상황은 때때로 우리의 죄악 가운데 닥쳐옵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는 성실하신 하나님 앞에 불충하고 범죄했던 것을 회개하자고 백성들에게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사랑하시는데 어찌하여 그런 극한 고통을 주십니까? 사리에 맞지 않죠. 애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의 본심을 백성들에게 좋은 것만 주시는 겁니다. 평안과 기쁨,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왜 고통을 주실까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백성의 죄악이 고질화되어 매를 맞지 않고서는 정신을 못 차리고 하나님께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게 뻔합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매를 드신 겁니다. 선지자는 눈물로 호소합니다. 애3: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나님께 돌아가면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건져 주십니다. 회복시키시고 치유해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아버지가 매를 든다고 반항하고 튀어나가면 끝장이죠. 그러나 아버지 품에 안기면 다 해결됩니다. 탕자가 잘 한 것이 딱 한 가지라고 했죠.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겁니다. 그 한 가지로 인생이 완전히 회복됩니다. 

지금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우리가 절망하지 말고 원망도 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 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해법이 없지만 하나님께로 가면 해법이 있습니다.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분명히 어려움을 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간구 :

예레미야는 또 호소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자! 간절히 기도하면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겁니다. 24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업은 상속 재산을 가리킵니다. 무슨 말인가요? 기댈 데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데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성실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25절. “기다리는 자들에게나(to those whose hope is in him) 구하는 영혼들에게(to the one who seeks him)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께 희망을 거는 것이고, 구한다는 것은 간구를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오래 전 전남 해남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하게 됐는데, 형편상 중학교 진학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소년은 너무 공부하고 싶어서 40일간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순진한 생각으로 하나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 전상서 ... 하나님, 저는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에 못 보내준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세죠.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잖아요. 남의 집 머슴살이 해도 좋고, 굶어도 좋습니다. 공부만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우표도 안 붙이고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우체부 아저씨가 이 편지를 보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버릴 수도 없고 ... 궁리 끝에 읍에 있는 교회 목사님에게 배달했습니다. 감동을 받은 목사님이 소년을 불러 양자 삼고 중학교에 보냅니다. 

다행히 공부를 잘 해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길도 열렸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교수가 됩니다. 마침내 대학 총장이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아무 것도 없는 절망의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당당히 승리한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성실하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감사 :

절망의 때에 가장 좋은 것은 감사하는 겁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감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감사를 강조합니다. 특히 시편 136편을 보면 특이합니다. 26개 절인데, 감사하라는 말이 26번 나옵니다. 매 구절마다 감사하라, 감사하라, ...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절 이하에도 보면 ‘ ... 이에게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인자’라는 단어는 앞에 본 것처럼 히브리어로 ‘헤세드(ds]j)’입니다. 성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확신하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혹시 고난 중에 처한다 할지라도 필시 무슨 뜻이 있을 겁니다. 그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범사 감사’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좋습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 기도의 능력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애매하게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문을 당해서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한밤중에 일어나 찬송하며 기도합니다.(행16:25 참조) 감사한 겁니다.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립니다. 출옥하면 되는데, 그 순간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친 줄 알고 문책 받을까봐 자결을 시도합니다. 

바울이 이를 중지시킵니다. 놀란 간수는 바울을 선생이라 부릅니다. 집으로 데려다 씻기고 대접합니다. 복음을 듣습니다. 그 결과 간수와 그 가족이 예수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 다음 날 하나님의 섭리로 바울 일행은 자연스레 출옥합니다. 이렇게 해서 루디아 가정과 간수 가정이 빌립보교회의 개척 멤버가 됩니다. 이게 바로 감사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이지선 자매를 잘 아시죠. 몇 달 전 일간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나왔습니다. 10여년 전 아리따운 여대생이 귀가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7중 추돌에 차에 화재가 났고 얼굴과 몸 55%에 중화상을 당했습니다. 수도 없이 수술하며 고통을 통과하고 승리했습니다. 그녀도 처음에는 참담한 현실 가운데 절망도 하고 원망도 했지만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오히려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됐습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남을 위해 살겠다고 보스턴대에서 재활상담학 석사 과정을 UCLA에서 복지학 박사과정 공부 중입니다. 

이렇게 된 전환점이 바로 감사였습니다. 한참 고통의 한 가운데 있을 때 어머니가 제안했습니다. 하루에 1가지씩만 감사 제목을 찾자! 그런 상황에 무슨 감사? 그러나 감사할 제목을 하나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 발로 화장실에 가게 됐을 때, 손가락이 움직이게 됐을 때, 그 손가락으로 환자복 단추를 하나 끼웠을 때, ... 감사는 진통제보다 더 강력했습니다. 마음 속 가득 평화가 임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기고 인생의 목적을 찾게 됐습니다. 감사는 이처럼 신비로운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난이 없는 때도 없습니다. 요즘만 어려운 게 아닙니다. 늘 그래왔습니다. 앞으로 그럴 겁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도종환,「흔들리며 피는 꽃」) 여러분, 이게 우리 인생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비바람에 젖고 흔들릴지라도 꺾이지 않고 뽑히지 않습니다. 마침내 꽃을 피웁니다.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를 보장합니다. 어렵고 힘든 현실이지만 부디 성실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음으로 꼭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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