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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 (눅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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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 (눅 13:1-9)


어제 저녁에 일본 이바라키 현, 가시마 시에서 선교하시는 이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지진의 위험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인근 초등학교에 피신해 있다고 하면서, “이번 재난 앞에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뉴스를 통해서 아시는 대로 이번 지진은 8.8의 강도로서 약 5분가량 일어났으나 그로 인한 피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큽니다. 말로써 어떻게 표현할 수조차 없으리만치 엄청납니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도시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가 하면,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된 곳도 있습니다. 수천 명이 죽고 실종되었습니다. 앞으로 피해는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평소에 재난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 있는 일본인들이지만 이번 지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말씀과 같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질학자들은 일본에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까닭은 일본열도가 세계 주요 지진대와 화산대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 곧 여러 개의 판이 만나는 지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분석은 과학적으로 볼 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과학적으로 지진의 발생 원인을 말해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에 수백만의 가축이 떼죽음을 당한 것은 구제역이라는 전염병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수많은 가축이 죽은 것은 구제역 때문인 것이 맞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여러 가지 재난에 대하여 원인을 규명할 수 있습니다. 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할 때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원인을 찾고 처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재난의 원인을 과학적인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 곧 신앙의 차원에서 규명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재난의 원인을 규명하는 신앙적인 방법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 길을 따라 에돔 족속의 땅을 둘러 가게 되었는데, 길이 험해서 백성의 마음이 상한 나머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고 원망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물게 하시니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와서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호소했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불뱀들이 몰려온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슨 이유로 불뱀들이 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또 어떤 이유로 이스라엘 자손이 머물고 있는 곳을 통과하게 된 것이 원인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불뱀 사건이 백성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 불뱀 사건의 첫째 원인은 백성의 불신앙에서 찾아야지, 과학적으로 원인을 규명하려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과학은 일어난 어떤 일의 물리적인 이유를 밝혀내지만, 신앙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  영적인 원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번에 일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원인도 과학적으로 이미 규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신앙적인 차원의 원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과학적인 원인 규명과 신앙적인 원인 규명, 둘 다가 필요합니다. 전자는 수십 년 동안 체계적으로 연구해 온 지질과학의 토대 위에서 매우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자 곧 신앙적인 원인 규명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혹시, 이번에 일본 열도를 뒤흔든 대지진이 우상 숭배에 빠진 일본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먼저 우리가 알아 둘 점은,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우상 숭배를 많이 하지만, 이 점은 우리 민족도 예외가 아닙니다. 민속학자들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토양을 가리켜 샤머니즘 곧 무속이라고 말합니다.  한민족은 고대로부터 조상들의 혼령을 비롯해서 여러 귀신들을 섬겨 왔으며, 지금도 조상숭배 사상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대 지진의 재앙이 우상 숭배의 죄 때문이라면 일본인들뿐 아니라 한국인들도 동일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재난이 죄악에 대한 심판이라고 단정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할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 강진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한국인들이 일본인들보다 선량하고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번 일본 열도를 강타한 대지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불행한 사건과 한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 사건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 드리려고 올라온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살해당한 사건이고, 두 번째 사건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사건입니다. 본문에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한 이유가 무엇인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죽임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어 보면, 이 비극적인 사건을 전한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이 다 살해당한 자들의 불행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자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동정하기보다는 ‘잘 죽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깔려 죽은 열여덟 명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들이 죽을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갈릴리 사람들이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사람들이나,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아무 탈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나, 주님의 기준에서 보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죽은 자들은 살아있는 자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보다 죄가 없어서 생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사람들과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시에 그 같은 참변을 당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아무 탈 없이 지내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했기 때문에 무사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아무 일 없이 편안히 지내는 사람들도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재앙을 당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의 참사는 일본인들이 우리 한국인들보다 죄가 더 많고 불의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들도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불의의 재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에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에 대하여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까지 강림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사람들은 더 이상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심판을 유예시키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을 취소하신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뒤로 미루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회개하여 멸망을 면할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죄를 물마시듯 지어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니까, 죄를 지어도 심판 받을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구나,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가 보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이번에 대지진 해일로 인한 쓰나미를 보세요. 쓰나미 경보가 발령된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서 피할 사이도 없이 해변 도시를 순식간에 휩쓸어 버렸지 않습니까? 그 속도가 비행기 속도와 같은 시속 600킬로미터나 되었다고 하니 승용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린들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경고를 계속해서 무시하면 언제 어디서 하나님의 심판이 쓰나미처럼 엄습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때에는 이미 때가 늦어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의 유예 기간이 한없이 계속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심판의 유예 기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기간이 점점 단축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6)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이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과원지기는 예수님을,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저와 여러분을 의미하고, 포도원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주인은 이 무화과나무를 길가나 야산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여느 무화과나무와는 달리 울타리를 친 포도원에 옮겨 심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 무화과나무가 원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주인의 호의로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인 교회의 일원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아름다움이나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택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 비유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비유에 보니, 포도원 주인이 삼년동안 이 무화과나무에게서 열매를 구했다고 했습니다. 이 주인의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누가 무화과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따먹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희생하시기까지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선한 열매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삼년동안 이 무화과나무에게서 아무런 열매도 얻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나무의 잎사귀를 들추어 가며 열매를 찾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잎도 무성하고 가지도 실한데 있어야 할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요 15:8)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열매가 있으십니까? 

열매를 얻지 못한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에 대하여 화를 냈습니다. 주인은 지금까지 무화과나무에게 정성을 쏟고 수고하며 기다린 것이 허사가 된 데 대하여 분노했습니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면 결과가 신통치 않아도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기대를 가지고 정성을 다한 일은 나중에 결과가 형편없으면 크게 실망합니다. 이 주인은 삼년을 기다렸습니다. 그것도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과원지기를 시켜서 정성껏 거름을 주고 가지를 쳐주면서 열매 맺기를 기다렸습니다. 3년이란 열매 맺기에 충분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린 자녀가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방을 어지럽혀도 그 때문에 속상해 하지 않습니다. 어리니까 응당 그러려니 생각하고 기꺼이 참아줍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철부지처럼 행동한다면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도 이와 같습니다. 처음 전도 받아 교회에 나온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교회가 무엇인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 초보자는 이따금씩 교회에 나와 주는 것만으로도 환영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도, 한 동안 어린아이와 같아서 실수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체험이 적어서 의심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잘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로 그 신자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경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롬 14:1)고 어린 신자들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조가 한해 두해 더해 갈수록 우리의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젖을 먹는 수준에서 단단한 식물도 먹고 소화하는 수준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신앙의 초보 단계를 벗어나서 성숙한 신앙인의 단계로 들어서야 합니다.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보고 화를 낸 두 번째 이유는, 이 무화과나무로 인해 손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말하기를 “왜, 이 나무 때문에 땅만 못쓰게 만들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가지를 사방으로 뻗기 때문에 땅을 많이 차지합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땅만 낭비할 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 무화과나무는 포도원의 기름진 토양에서 자양분을 열심히 흡수하면서도 열매를 맺을 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그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지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잔의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면서 오래오래 참아 주시는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며,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죄를 범하고도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할 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신 대로, 즉시로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술로만 회개한다고 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책망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크나큰 은총을 받았으므로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또 이웃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이 무화과나무는 주인의 명령에 의해서 그만 찍힐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래도 무화과나무로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입이 열 개인들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찍혀서 아궁이에 던짐 받더라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과원지기가 나서서 이 무화과나무를 위하여 호소했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과원지기는 우리 주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셔서 우리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금년에도 저들에 대한 심판을 유예하시고 한 번 더 열매 맺을 기회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 간절한 중보기도 덕분에 우리가 지금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또 한 번의 만회할 기회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거룩하고 엄숙한 시간이며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절박한 기회입니다. 이 기간은 마치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도끼가 준비되어 있으나 단지 내려찍는 것만 지연되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금년에 이 무화과나무가 실과를 맺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포도원 주인도 기뻐할 것이요, 과원지기도 그 동안의 수고를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무화과나무가 찍히지 않게 될 뿐 아니라 도리어 사랑받는 자랑스러운 나무가 될 것입니다. 원래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흉악한 범인이 되어도 여전히 믿어 주고 싶어 합니다. “친구를 잘못 만나 그렇지, 원래는 착한 아이입니다. 

다 제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벌을 주시려면 저에게 주십시오.” 이와 같이 부모의 사랑은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로 돌립니다. “주인이여, 이 나무가 원래 열매를 못 맺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다시 일 년을 최선을 다해 보살펴서 꼭 열매를 맺게 하겠습니다.” 이 과원지기의 호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호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변경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무화과나무에게 주어진 유예 기간이 일 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는 마지막 기회요, 종말론적인 기회이며,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이 마지막 기회에는 분명히 열매를 맺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과원지기로서도 어찌 할 수 없는 순간이 오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들판에서 포도원으로 옮겨심긴 무화과나무와 같이, 죽음의 세상길에서 부름 받아 하나님의 포도원인 교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농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배려를 받아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 드릴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이 은혜를 받기만 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데 실패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한량없이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인색하지는 않습니까? 믿음의 형제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고서도 형제들을 사랑하는데 무관심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마지막 일 년이라는 기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기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회개할 기회요 또한 열매 맺을 기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것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아무리 죄가 많아도 회개하는 사람은 심판을 면하고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뒤로 미루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회개함으로 심판을 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열정을 가지고 주의 일에 힘씀으로 강림하시는 주님 앞에서 받을 상급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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