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선택과 결정의 원칙 (빌 1:12-26)

첨부 1


선택과 결정의 원칙 (빌 1:12-26) 
 

1. 선택 혹은 결정을 할 때 …

어떤 결정이나 행동에 대해 여러분이 취하는 나름의 행동 양식은 어떻습니까? 옛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는 어떤 일에 대한 사람의 행동 유형을 ‘햄릿형의 인간’과 ‘돈키호테형의 인간’으로 구분했습니다. 햄릿형의 인간이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소설 『햄릿』에 나오는 주인공 덴마크 왕자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이다”라는 대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문제를 앞두고 골똘하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타입의 인간을 말합니다. 

이 경우, 길고 깊은 고민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고민하고서도 그 결과로써 어떤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처럼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앞두고 어떻게 할지 먼저 熟考하는 형의 인간을 햄릿형의 인간이라고 하지요. 반면에 돈키호테형의 인간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유형입니다. 스페인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가 지은 소설 『라만차의 돈키호테(Don Quixote de La Mancha』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혹은 내키는 대로, 그리고 단순 무식하게 행동하는 경우입니다.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타입이고, 事後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유형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유형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까우신가요? 행동하기 전에 먼저 숙고하고 고민하는 쪽입니까? 아니면 일단 본능에 따라, 혹은 내키는 대로 행동부터 하고 보는 쪽이신가요? 저의 결론은 모든 사람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나 감정 등이 먼저 발동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동부터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행동 전에 나름의 기준이 발동한다는 것이죠. 그 기준은 그의 本能일 수 있고, 오래된 기억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그 날의 감정과 생각에 따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행동을 하거나, 또는 어떤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각자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선택의 순간에 다음과 같은 것을 기준으로 삼으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 욕심을 따르지 말고 양심이 원하는 대로 하라! 당장을 보지 말고 미래를 내다보라! 절망보다는 희망을 선택하라! 혼자 선택하기 힘들 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라! 행운의 주인공이기보다 노력의 주인공이 되라!” 물론 살면서 이와 같은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행동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이나 조건이 좋은가 나쁜가?’, ‘내게 利로운가 害로운가?’, ‘得이 되는가, 失이 되는가?’를 우선적인 기준으로 삼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준을 갖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는 어떤 중요한 문제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더 나아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까지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을 가진 한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의 선택 원리, 그의 결정의 원칙은 무엇일까요?

2. 바울의 원칙

1) 본문의 배경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마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서 체포되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惡意에 찬 거짓 告訴를 당해 2년 동안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감옥 생활을 하면서 모진 訊問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지중해를 가로질러 로마로 이송되었고, 로마에서도 2년 이상을 결박된 몸으로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최소한 4년 정도를 묶인 몸으로 지냈다는 말입니다. 

사실 세 번에 걸친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바울의 소망은 그 후 로마로 가서 거기서 당시 “땅 끝”으로 여겨지던 스페인으로 파송 받아 스페인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소망이 좌절되고, 육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유대인들로부터 치욕스러운 모욕과 비난을 받는 자리로 떨어지고 만 것이죠. 빌립보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 즉 바울이 로마에서 죄수로 있을 때 지은 書信書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나자, 바울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빌립보 교인들은 후원금을 거두어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었습니다(빌4:18). 

그런데 이 후원금을 가지고 로마로 오던 에바브로디도가 도중에 중병에 걸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만,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묶인 몸으로 지낸 지 3년, 로마에 온 지 1년 되었을 때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에게로 온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 교회의 후원금은 바울에게 물질 그 이상이었습니다. 정말 큰 위로였고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자신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있는 그들을 위로하려고 편지를 쓰게 된 것이죠. 그러나 바울이 편지를 쓴 데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 안에 분열의 조짐과 함께 율법주의와 비도덕주의 등이 들어와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바로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배경을 가진 빌립보서는 이상에서 말씀드린 정황과는 달리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명 “기쁨의 편지”라고 불리는 이 빌립보서 안에 ‘기쁨’이란 말이 무려 16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울의 기쁨과 연관된 것입니다.

2) 제 1 원칙

바울의 현재 상태는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매여 있는” 상태입니다. “나의 매임이(13,14,17)” 여기서 매임이라는 것은 ‘사슬, 올가미, 차꼬, 구속, 결박’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현재 로마에서 죄수로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이 말은 그가 현재 감옥 속에서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수갑이라고 할 수 있는 사슬이나 혹은 차꼬에 의해 결박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결박되어 수감되어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 ‘유익이 되었다(21)’고 말합니다. 그 유익은 복음의 “진전”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의 진전이란 ‘복음 전파의 새로운 문이 열렸다’, 혹은 ‘복음 전파가 더 활발해졌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진전은 먼저 바울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갇힌 시위대 안에서 군인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이 시위대라는 것은 로마 황제를 지키는 뛰어나고도 고도로 훈련된 군인들을 말합니다. 일종의 경호부대지요. 또한 황제 직속 부대였기에 상당한 권세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6시간씩 4교대로 바울을 지켰는데요,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여러분, 간수가 죄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몰라도 죄수가 자기를 지키는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것도 로마인이자 황제를 경호하는 부대의 병사들이나 간수들의 입장에서 바울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하찮은 한 유대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들어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울은 시위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구체적인 결과가 드러났기에 오늘 본문 13절은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3). 

역사적인 자료들도 이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 이후 로마 황제의 측근에 신자들이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네로 황제의 삼촌,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어머니와 딸, 그리고 고급 관리들 중 상당수가 신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시위대 안에 갇혀서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한 결과 나타난 복음의 진전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수감된 것으로 나타난 복음의 진전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의 진전의 또 다른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보인 태도 혹은 반응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상당수의 형제들이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老 사도가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또 그것 때문에 고난당하는 모습에서 자극을 받았습니다. ‘저렇게 年老한 바울 사도께서 복음을 위하여 저토록 애쓰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는가!’ 이런 착한 뜻, 선한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하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妬忌와 分爭으로, 즉 바울의 不在를 틈타 교회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로마교회 지도자들과 로마교회에 속한 전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罪囚로 로마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있는 성도들 뿐 아니라 멀리 있는 성도들로부터까지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을 보고 질투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고자 순전하지 못한 의도로 복음을 전한 것이죠. 이런 바깥세상의 분위기에 대해 바울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 왜요? 이러나저러나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처럼 복음 전파에 진전이 일어났다는 것, 바로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익이 되었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실제적인 이익, 이득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으로 인해서든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든, 선한 뜻으로든 다소 나쁜 뜻으로든, 복음의 진전이 일어난 그 자체가 자신에게 큰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울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매였던지 아니면 자유하든지 그것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에게 이익이 돌아가느냐 아니냐’였습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하는데, 여기서 “존귀하게 된다”는 말은 ‘누군가를 위대하게 만들다, 누군가가 위대하다고 선언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위대하게 여겨지는 그 일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포함하여 자신의 전부를 다 드릴 수 있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의 선택 혹은 결정의 원칙은 ‘그리스도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냐 아니냐’였습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 혹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그에게 次善의 문제였습니다. 그에게 優先의 문제는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택할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선택과 결정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 나의 삶, 생명과 죽음,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 우선’이라는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내가 하는 행동이, 내가 하는 선택이, 내가 내리는 결정이 그리스도에게 유익이 되느냐 아니냐’를 우선 원칙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3) 제 2 원칙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오늘 본문에는 마치 한편의 詩처럼 어떤 ‘감정의 흐름’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발견되는 ‘감정의 흐름’이란 바울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만 한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에게 본능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어떤 열망이 있었고, 그것이 본문에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 특히 23절 말씀을 옛 개역성경은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번역했는데요. 여기에 그 본능적인 감정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욕망”은 굉장히 원색적인 단어인데, 그 뜻은 ‘욕망, 갈망, 정욕, 색욕’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고조된 감정, 혹은 본능은 어떤 것입니까? 23절, “…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즉 바울이 욕망하는 것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원칙은 ‘그리스도’라고 설명하다가, 순간 그리스도에 대한 애정과 천국에 대한 사모함이 넘쳐서 ‘지금 당장이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을 더 열망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천국과 이 세상’, ‘그리스도와 사람 혹은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사역’, 그 가운데서 그가 더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천국이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님을 그리워하듯 본능처럼, 사무치는 열망으로, 소원한 것이 ‘어서 빨리 천국에 가고 싶은 열망’, ‘하루라도 빨리 주님을 뵙고 싶은 열망’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과 천국을 향한 이러한 열망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부분에서 바울은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또 다른 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23절 말씀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훨씬 더 좋은 일”은 지금 당장 천국에 가는 것이지만, 그러나 24절,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한 쪽을 택하노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또 하나의 원리는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이었습니다. 

이 “유익”이라는 말은 성경 원어로 ‘필요한’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아직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25절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것,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나의 삶, 나의 생명, 나의 사역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다면 바로 그것을 선택과 결정의 더 중요한 원칙으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좋은 것보다, 혹은 자신의 본능이 원하는 것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바울은 본능적으로, 진심으로, 그리고 간절히 어서 빨리 천국에 가는 것과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최종적인 결정은 그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아무리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것, 이것이 바울 사도의 두 번째 원칙이었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가 이 말을 한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우상숭배가 만연했고, 시민들의 모든 삶이 神殿에서의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음식이나 육류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후 물린 것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성도들이라도 본의 아니게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도 나는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음식이라는 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면 거리낄 것이 없다는 믿음 때문이며, 사실 우상 그 자체도 헛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으면 괜찮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자신은 자유롭게 먹을 수 있으나, 주변에 있는 다른 성도들, 그 가운데 혹 신앙이 약한 초신자가 그 모습을 보고, ‘어,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인데도 그냥 먹네? 저렇게 해도 되는가?’라고 하여 그 마음이 불편해 지거나, 신앙에 시험이 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자유롭게 먹을 수 있지만,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그 자유를 포기하겠다는 말이지요. 사도 바울은 내게 있는 귀중한 자유도 다른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시험에 들게 한다면, 그것까지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삶의 원칙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옛날, 육지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제주도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힘겹게 가족을 부양하는 제주 여성의 삶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어떻게 해서든 육지 청년을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책임지는 남편 덕을 보고 싶었습니다. 한편, 일하기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육지 총각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의 꿈은 여성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제주도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은 일하지 않고 놀고먹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은 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그 가정이 행복했을까요? 불행했을까요? 이와 비슷한 寓話가 있습니다. 소와 사자가 열애 끝에 결혼을 했습니다. 첫날 저녁, 소는 사자를 위해 맛깔 나는 채소와 풀로 진수성찬을 차려 사자에게 내어놓았습니다. 밥상을 본 사자는 속으로 실망했지만 참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사자는 일찍 일어나 사냥을 하여 최고로 맛있는 고기 요리를 해서 소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소가 속으로 뭐라고 했겠습니까?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결국 둘은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헤어지면서 소와 사자가 서로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난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 무슨 말입니까?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자기 위주의 사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죠. 유명한 배우였던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은 “다른 사람이 먼저고 나는 그 다음이라는 생각이 중요하다. … 이것이 내가 자라면서 배운 윤리의 전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하여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성도의 선택과 결정의 원칙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떤 알코올 중독자에게 어린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도저히 두 아들을 키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시청 복지과 직원에 의해서 아들들은 각각 다른 집으로 入養되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후, 담당 복지과 직원은 두 아들의 삶이 궁금해서 그들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과연 알코올 중독자의 두 아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첫째 아들을 찾아가 보았더니, 아버지와 똑같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수용소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너는 네 아버지하고 똑 같이 사냐?” 그 아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인데, 어떻게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안 될 수 있습니까?” 父傳子傳이라는 말이 맞는 듯 보였습니다. 

다음으로 둘째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형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부인과 자녀들과 함께 아주 단란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너는 네 아버지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었니?” 그때 둘째 아들은 역시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사셨는데, 내가 어떻게 그와 똑같이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아버지의 불행한 삶을 자신은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알코올 중독자의 두 아들은 똑같은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고, 어린 시절 똑같이 처절한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다른 아들은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생각의 기준, 행동의 기준, 선택과 결정의 기준이 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생각의 차이, 판단의 차이가 엄청난 삶의 차이를 낳은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여러분은 선택을 하고 결정을 내릴 때 따라야 하는 중요한 두 가지 원칙을 배웠습니다. 첫째, 이 선택 혹은 결정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가? 둘째, 이 선택 혹은 결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가? 놀라운 것은 이 두 가지 원칙에 충실했던 바울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처지에서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기쁨,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손해되느냐는 기준이나, 득이냐 실이냐 하는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제시한 삶의 원칙, 선택과 결정의 원칙이 이제부터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이 땅을 항상 기쁘게 살 수 있는 방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