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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래 위에 지은 집 (마 7: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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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위에 지은 집 (마 7:24-27)
  

들어가는 말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최악의 8.8강진과 10미터가 넘는 쓰나미가 일본 열도를 삼켰습니다.
밀려오는 쓰나미 앞에 인간의 문명은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지금까지 인명피해가 1,100 명이고 적어도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피해는 아직 파악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본정부는 원자로의 파손으로 방사능 물질이 유출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웃나라에 더 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지진사고는 일본에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지난 2월 22일 뉴질랜드 남부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발생한 규모6.3의 지진으로 사망자가 최소 65명에 이른다고 존 키 뉴질랜드 총리가 발표했습니다.
현지 언론은 건물에 갇힌 시민이 최대 200명에 달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어 사상자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내진설계가 안 된 목조건물이나 오래된 가옥은 말 그대로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30만 명에 육박하는 사망자를 낸 지난 해 1월 아이티 대지진이나 10만 명 가까이 사망자를 낸 2008년의 중국 쓰촨성 대지진에 비하면 뉴질랜드의 피해 규모는 훨씬 적은 것입니다.
문제는 건물의 내진설계였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내진설계를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에는 따스한 햇빛이 비취고, 바람 잔잔한 날만 있는 게 아닙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 부는 날이 있습니다.
25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여기서 ‘비’라는 것은 폭우를 말하고, ‘창수’라는 것은 갑자기 불어나 넘쳐흐르는 강물을 말하고, ‘바람’이라는 것은 갑자기 불어 닥치는 사막의 열풍을 말합니다.
팔레스틴에 살고 있던 제자들은 이런 기후 현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을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비와 창수와 바람을 영적으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① ‘비’라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역경을 의미합니다.
질병, 사업의 실패, 사고, 자녀들의 일탈 등 때로는 소낙비 같이 갑작스럽게, 때로는 가랑비 같이 옷 젖는 줄 모르게 다가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② ‘창수’라는 것은 땅에서 오는 시련을 말합니다.
오늘도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정부로부터, 이웃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시련을 당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③ ‘바람’이라는 것은 영적인 시험을 말합니다.
공중권세 잡은 사단이 성도들의 영적인 생활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안 됩니다.
신앙적인 회의가 일어납니다.
절망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낙담의 수렁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집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는 삼중적인 표현입니다.
삼중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형식이지요. 
그리고 27절에 보면 그 말씀이 반복되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이 말씀을 삼중적으로 표현하고, 반복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① 인생에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는 날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그런 시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시련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삼상 13:14, 행 13:22)이라고 기꺼이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도 시련은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43:2)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지 시련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31:8절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②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비로소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시련은 참 성도와 거짓성도를 구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봐야 알듯이 참 성도와 거짓성도는 핍박을 받아봐야 알게 됩니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이란 설교자는 ‘가짜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감람산(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자리)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갈보리(십자가의 죽음이 있는 자리)까지는 갈 수가 없다.’

목회를 해보면 처음 믿는 분들의 기도가 잘 응답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제 막 움 돋는 믿음의 새싹을 귀히 여겨서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심으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시는 것 같아요! 
그러면 새신자는 신이 납니다. 
“목사님, 이렇게 좋은걸 왜 진작 믿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할 때 쯤 그 믿음의 뿌리를 깊게 하기 위하여, 그 믿음의 줄기를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시련의 바람이 슬쩍 붑니다. 

그래야만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요.
물질적으로 어렵기도 하고, 건강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구별이 됩니다. 
한 단계 올라가지 못하고 주르르 미끄러지는 사람이 많아요!
팽개치는 사람이 많아요. 
기도도 팽개치고, 봉사도 팽개치고, 예배도 팽개치고....... 
그렇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는 것은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반석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1. 반석 위에 인생의 집을 지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2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주님은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석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인생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돈 잘 버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지혜로운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 최고 기독교 변증가 중의 한 분으로 알려진 조시 맥도웰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2011년 3월 11일)
지금 반기독교운동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반 기독교적인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의 대답은 오히려 단순했습니다.
‘성도들의 변화된 삶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작은 실천적인 삶을 살 때 반기독교 흐름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입니다. 

2. 모래 위에 인생의 집을 지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26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모래 위에 인생의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세상에 누가 자기 인생의 집을 모래 위에 지으려고 하겠습니까?
바보입니까?
여러분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싶으세요?
그렇지만 자기 인생의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상하이 스캔들이 신문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은 못 배우고, 지위가 낮고, 머리가 둔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문에는 “‘치파오 자락(중국여성의 전통의상)’에 넋 나간 엘리트들 한순간에 추락”이라고 타이틀을 뽑았더라고요.
중국 여성 덩신밍(33)씨에게 농락당한 상하이 영사들은 명문대를 졸업하고 고시를 패스한 잘나가던 엘리트들입니다.

법무부 감찰에서 덩씨와의 불륜관계를 시인한 H전 영사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해 검찰사무직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덩씨의 협박으로 ‘내 사랑 변함이 없다.’는 각서를 써준 지식경제부 소속 K영사 역시 서울 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패스한 사람입니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덩씨와의 부적절한 관계의혹을 받고 있는 외교부 소속 P전 영사도 외무고시 출신의 1등 서기관입니다.
덩씨와 찍은 사진이 공개된 K 전 영사는 ‘경찰청장감’이란 기대를 받던 인재였습니다.

경찰대 재학 중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경찰대 출신 중 최연소 총경 기록도 남겼습니다.
너무 아까운 인재들이 아닙니까?
그들 중 누가 자기 자신이 모래위에 집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모래 위에 인생 집을 짓고 있었고, 그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3. 그러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1)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 깊은 혐오감을 가집니다.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신앙인은 그 인생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악을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성도는 죄를 지으면 그 자신이 소스라치게 놀라야 합니다.
성도는 죄를 지으면 양심의 고통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어야 합니다. 
반석 위에 인생의 집은 짓는 사람은 죄를 미워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가집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자기의 믿음을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세웁니다.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여자가 밥상을 차려 부엌에서 안방까지 올 동안에 그의 감정이 열두 번 변한다고 하잖아요?
‘이 밥상을 갖다 줘 말아. 어제 생각하면 갖다 주고 싶지 않고, 내일을 생각하면 갖다 줘야하겠고.......’
따라서 감정에 바탕을 둔 믿음은 감정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119:89-90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창12:4절은 아브람과 롯의 차이를 명확하게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롯은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결국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자기 부인조차 소금 기둥으로 만들 정도로 몽땅 망하고 말았습니다.
반석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3) 체험적인 신앙을 가집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체험적인 신앙을 갖지 못하면 능력이 없습니다.
아는 소리를 많이 하는데 능력이 없어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체험은 신앙생활에 자신감과 능력을 줍니다.
체험적인 신앙을 얻도록 기도하십시오.
한 사람이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친구에게 ‘성경에 뭐 믿을게 있느냐?’고 비웃듯 말했습니다.
새신자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직 믿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성경에 믿을만한 내용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네. 그러나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 책을 읽었고, 그 책은 나를 웃게 만들었고, 나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이네. 나는 주정뱅이었고, 거짓말 쟁이었네. 그런데 이 책이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었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 성경은 믿을 만한 책이라네.”

체험이 주는 확신입니다.
이런 체험적인 성도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반석위에 인생의 집을 지으려는 사람은 체험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나가는 말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미래에 관심을 가진 세계적인 학자들이모여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결론은 ‘인류의 미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의 미래는 없습니다.

히12:26-27절을 읽어봅니다.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여기에 ‘진동’이라는 단어와 ‘영존’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세상의 것들은 진동합니다.
건물도 흔들립니다.
빌딩도 흔들립니다.
사람도 흔들립니다.
돈도 흔들립니다.
건강도 흔들립니다.
가정도 흔들립니다.
안 흔들리는 게 없어요.

오직 하나님 나라만 견고하고, 영존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목적으로 인생을 살아야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성공하려면 다섯 가지 ‘쌍 기역’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깡, 끼, 꾀, 꿈, 끈, 꼴이랍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끝’입니다.
‘끝’이 좋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1) 죄를 미워하십시오.
2)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3)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십시오.
그래서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잘 지어 끝이 좋은 삶이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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