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도의 구원 (벧전 1:3-12)

첨부 1


성도의 구원 (벧전 1:3-12)


어느 목사와 이발사가 시카고의 빈민거리를 나란히 걷게 되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그 주변은 몹시 지저분하여 악취마저 풍기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세상에 어찌 저렇게 처참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신단 말입니까.”라고 회의론자인 이발사가 말했습니다. 
그때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너덜거리는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지나가는 것을 본 목사는 “저 친구를 보십니까? 저 친구는 수염도 깎지 않고 머리는 어찌나 긴지 어깨를 완전히 덮어버렸군요. 어찌 당신같이 훌륭한 이발사가 젊은이들이 저렇게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두십니까?” 라고 이발사에게 물었습니다. 

이발사는 “그야 저 친구가 이발해달라고 이발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죠. 이발해 달라고 들어오기만 한다면야 아주 미남자를 만들어줄 텐데 말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는 조용히 입을 열어 “하나님께서도 당신과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간은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에 더러운 죄악 중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훌훌 털고 주께로 나오려는 용기를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밭에 콩도 심지 않은 채 콩이 나지 않는다고 하지 말고, 콩부터 심어야 하나님께서 싹트게 하시고 길러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운데는 믿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오늘까지 살아오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이 세상에 태어난 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비로소 믿음을 가지게 된 분들도 계십니다. 

원래 믿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난 모태 성도들은 그런 감격이 조금 덜 할 수 있겠습니다만 나중에 어떤 계기를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된 분들로서는 문득 나를 불러 주셔서 믿도록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어떻게 내가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 한편 참 감사하죠. 지금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다면 내 삶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만드실 때 마지막 날에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독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좋은 만남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고 서로 말이 통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 돕는 배필도 지어주셨습니다. 

그래 돕는 배필 하와를 보는 순간 아담이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이끌어 모든 동물의 이름도 짓게 하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행복한 시간들이 오래가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아내의 말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아내 하와는 자기 남편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에 그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버리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죽으리라고 까지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가죽 옷을 지어 입혀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영원히 에덴에서 살 수도 있었을 아담과 하와는 결국 때가 되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보다 큰 문제는 죄 값을 치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값은 사망입니다. 영원한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드시 죽되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점점 더 큰 죄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을 보며 대홍수로 세상을 멸하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대속의 은혜를 마련하셨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짐승의 생명으로 그 생명을 대신하셨지만 그건 일시적인 효과밖에는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 안에 있는 죄의 뿌리를 뽑아내지 않고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큰 결심을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짐승이 아닌 사람이 그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 태어나는데 어떻게 자기도 죄인이면서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세상을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하셨던 하나님은 자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기로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라는 뜻의 예수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마치 어린 양이 제단에 바쳐지듯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산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한데 주님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항상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 죽은 자들이 다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날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모두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까지나 풍성하신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내가 뭐라고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까지 예수님 십자가에 죽어주신 것일까요? 그러니 그 하나님께 우리는 그저 감사하며 찬양 돌릴 뿐입니다. 

세상에 죽지 않을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다 죽게 마련입니다. 누구는 말합니다. 천국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냐? 그건 그렇게 말하는 사람 마음일 뿐이고 아무리 부인해도 지옥이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세요. 부자는 당연히 떵떵거리고 살았고 거지는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구걸을 하며 겨우겨우 살았는데 둘 다 죽고 난 다음에 보니 정말 기가 막힙니다. 세상과는 정반대로 거지였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데 부자는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그 음부가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청합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불꽃 가운데 괴로움을 당하는데 얼마나 힘들면 물 한 바가지도 아니고 한 컵도 아닌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여 달라고 하겠습니까?
이런 음부가 있음을, 소위 지옥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애써서 그것을 모른 척 합니다. 그리고 지옥이 없다고 부정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지옥이 있는 걸 어떡합니까? 
저도 그렇고 우리 모두는 다 이 지옥 백성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볼 때 너무 불쌍합니다. 음부에 들어가서 지옥에 떨어지고 난 다음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때는 더 이상 기회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시던 끝에 아직 세상에 있을 때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공짜가 아닙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천국 가는 길을 만드시기 위해서 먼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지 않고는 다시 살 수가 없습니다. 뭐 안 죽고 가면 되지 않나 하지만 사람은 다 죽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죽으리라고 정하신 것 아닙니까? 그럼 방법이 있죠? 그게 뭡니까? 다시 살리면 됩니다. 그래서 그 길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심을 통해서 예수 안에서 우리도 죽지만 다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요 이를 통해서 우리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으로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까지도 용서하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가는 길 그것도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인간 예수의 모습으로 오셔서 직접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 열어놓으신 그 길은 결코 싸구려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개나 소나 다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 베데스다 못가 그곳에는 병을 고침 받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각색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 모든 사람의 눈길은 다 한 곳으로 쏠려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못의 물이 동하는 순간 제일 먼저 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느 병에 걸렸든지 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눈이 빠지게 베데스다 못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을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그중의 하나 38년 된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말씀에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놀랍게도 곧 나았습니다. 그래 자기가 깔고 누워 있던 자리를 들고 돌아갑니다. 
이 사람이 한 일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일어나라 할 때 그 사람은 일어났을 뿐입니다. 아니 아픈 사람보고 왜 일어나라 마라 하느냐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일어나기에는 몸이 너무 아프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면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대로 따랐더니 곧 나았습니다. 
거기 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고침 받는 사람 주님이 관심을 가지고 만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한 사람은 이 병자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뭐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까?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로마서 10:10은 말씀합니다. 그 말씀을 누가 들려주셨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들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이름처럼이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내게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깨닫게 만들어 주셨어요. 갈 4:6~7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깨닫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아들이 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을 듣고 깨달아 나는 아멘하고 믿었을 뿐입니다. 베데스다 못가 은혜의 집이라는 그 곳의 많고 많은 병자 중 유독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신 것이 그 사람에게 은혜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고 말씀을 듣게 해 주셨을 뿐 아니라 성령을 보내 주셔서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가 믿음에 이르게 하여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우리가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다 하셨어요. 내가 한 일은 단 하나 믿는 것뿐입니다. 베데스다 못가 38년 된 병자가 순종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순종함으로 믿었을 뿐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잘난 체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잘한 것이 있다면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보호하심을 입어야 합니다. 나 혼자 힘으로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아주 눈이 벌게서 덤벼드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호하심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럼 누구를 보호하십니까?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기억하세요. 우리가 왜 흔들리냐 하면 예수를 믿었는데도 여전히 나 자신을 보니까 별게 없단 말입니다. 뭔가 좀 달라지고 변화되고 좀 멋져지고 뭔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냄새도 나고 그래야 되는데 조금 된 것 같다가도 어느 때보니까 이게 전혀 믿음도 없는 사람 같아요. 세상 사람보다 나을게 하나도 없어요. 아니 나은 건 둘째 치고 오히려 더 못난 것뿐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치고 오래 믿은 아무개 집사 아무개 권사 아무개 장로 아무개 목사는 좀 나을까 했더니 어느 순간 보니까 아니 이제 믿기 시작한 나만도 못한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아이고 말짱 헛것이로구먼.” 그러고 주저앉아 버리더란 말입니다. 다시 돌아가 보세요.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지금보다도 못했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보신 것은 단 하나 믿음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만 주님께 나아가고 믿음으로만 보호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를 때 나의 삶에서 예수 냄새가 나게 하시고 나의 얼굴에서 예수 광채가 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고 우리가 용납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주님이 그렇게 나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이 먼저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믿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바로 주님의 용서하심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의 마음으로 나도 용서하는 것이고 나도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아니 그 누구에게 보다도 먼저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 오직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보셨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실망하십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오직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흔들림 없는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날마다 간구해야 할 것이요 그 어떤 경우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날마다 덧입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길이 어찌 보면 참으로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앞에 근심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시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음은 이 시험으로 인한 근심은 잠깐에 불과한 것이요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잠깐은 근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금덩어리를 불에 넣는 것은 정금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믿음으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불로 연단한 금 모든 불순물을 걸러낸 정금만큼 귀한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변함없는 아름다움, 결코 녹슬지 않는 순결함을 뽐내는 정금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삼고자 해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시험이 우리 앞에 있게 허락하십니다. 그러니까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정금과 같은 믿음 잠시 근심하다가도 곧 바로 크게 기뻐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나가는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훈련이 쉬운 게 어디 있습니까? 당연히 힘들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나를 또한 도와주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로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서 그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하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 안에서 흔들림 없이 순종함으로 주님을 섬겨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먼저 선지자들을 성령을 통해서 깨우쳐 주심으로 고난을 받게 될 것과 고난 후에 얻게 될 영광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베풀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우리에게 알려주셔서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우리를 또한 하나님이 보호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까지 이르게 만들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음 안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모든 복으로 누리는 자요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