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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출 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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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출 20:1-17)


중세시대를 신앙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이 모든 것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든 학술이든 정치든 교회가 지배했습니다. 갈릴레오를 불러다가 지동설을 가르치지 못하게 한 것이라든가 황제가 교황 앞에 맨발로 무릎을 꿇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앙의 권위, 교회의 권위가 어마어마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시대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 반발하듯 터져 나오면서 계몽시대로 건너오고 르네상스와 현대시대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자녀가 사춘기에 부모에게 반발하는 것처럼 그동안 교회가 독점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 대항하는 생각과 학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화론 ․ 공산주의 이론 ․ 정신분석학 ․ 신은 죽었다는 철학, 그리고 실존주의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모든 이론은 작심이나 한 것처럼 성역에 도전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지됐던 것들이 이제는 누구든지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역은 없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여전히 존재하고 그리고 아직 많은 곳에서 부흥하고 있습니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더 이상 권위에 의존해서 믿음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초이스가 없었더라도 이제는 초이스가 있습니다. 지금은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믿을만한 근거를 보여줘야 됩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고 했는데 믿을만한 증거를 보여줘야 됩니다. 공정하게 경쟁해야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경쟁력, 말씀의 경쟁력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한국사회에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먼저 정치적인 권위주의가 청산되었습니다. 민주화가 그 결과입니다. 과거의 권위주의는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에 문화적인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생각의 자유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종교적인 권위주의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벌써 오래전에 이루어져야 했는데 오래 끌은 면이 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그동안 많은 특혜를 누렸습니다. 교만해졌습니다. 명성과 영향력에 익숙해졌습니다. 대통령을 배출한 개신교, 국회의원들과 장관들이 다니는 교회 ․ 부자들이 다니는 교회 ․ 힘 있는 교회 ․ 돈이 많은 교회 ․ 스타들의 교회 이 모든 것이 거품에 불과한데 한국의 개신교는 거품에 취해버렸어요. 술 취한 다음날 숙취가 오는 것처럼 한국 개신교는 심한 숙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정신 차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방법, 믿는 이유,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서 재정비할 필요가 있고 그리고 목회자는 이것을 다시 찾아서 성도들에게 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지만 권위주의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막무가내가 아니에요.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시키면 자식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왜?’라고 대답합니다. 왜. 그럴 때 부모가 귀찮으니까 뭐라고 말합니까. ‘엄마 말이니까, 아빠 말이니까, 어른 말이니까. 얘가 어디서 대들어. 버르장머리 없이 무슨 말대꾸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그런데 우리가 성경말씀을 가르칠 때도 그렇게 할 때가 많아요. ‘이렇게 해! 저렇게 해!’에 대해서 사람들이 ‘왜?’라고 물어보면 ‘하나님 말씀이니까, 하나님 명령이니까 그냥 믿어!’ 이렇게 대답을 할 때가 많이 있지요. ‘하나님의 명령이니까’라고 말하면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명령이라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대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아요. 그리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계명에는 우리가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그 원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십계명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말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계명은 많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열두 계명이 아니고 열다섯 계명이 아니고 십계명을 주셨을까. 사람의 손가락이 열 개이기 때문에 기억하기 쉬우라고. 사람 손가락이 열 두 개였다면 십이 계명을 주셨을 지도 몰라요. 

그러나 열은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말하는 데 있어서 열 개라는 것은 최소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합니다. ‘열 개는 너무 많다. 계명이라고 하지 말고 권고사항이라고 하라. 지키기가 어렵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십계명을 읽어나 봤는지 모르겠어요. 읽어보고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지만 우리가 얼마든지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무리한 요구가 없습니다. 

먼저 제6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살펴보면 ‘살인하지 말지니라’ 여기에 이의가 있는 분은 말씀해 보세요. ‘살인하지 말지니라’ 다행이지요. 당연한 것이지요. ‘간음하지 말지니라’ 가정과 결혼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당연하지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이 다섯 개의 계명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 없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하나님이 요구하신 말씀은 우리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신앙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종교가 무엇이냐를 떠나서 세상 모든 나라가 법으로 규제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도적질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 나라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살인하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 나라의 법을 어긴 것이고 감옥에 갑니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말씀, 제6계명부터 제10계명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고 그리고 살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6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지키면 누가 유익이냐. 우리가 유익이에요. 우리가 혜택을 입습니다. 이 계명의 수혜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안전한 사회, 범죄 없는 사회, 문 열어놓고 살 수 있는 사회. 자녀를 학교에 보내서 가서 데리고 오는 이유는 세상이 두렵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두려워요. 사람이 사람에게 해야 될 도리가 너무 당연한데 그것을 지키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위로 명하기 전까지는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독선을 보여주는 게 아니고 인간이 얼마나 미련하고 악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유익한 당연한 도리를 스스로 깨닫고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권위로 우리에게 명령하실 필요까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긍휼과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고 인간의 미련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5계명을 살펴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 역시 당연한 것입니다. 굳이 성경이 아니더라도 공자님도 이것을 명했어요. 이게 바로 효사상이 아닙니까. 성경이 아니더라도 부모를 공경해야 되는 것은 삼척동자도 압니다. 이렇게 당연한 계명인데도 듣지 않는 인간이 많다보니까 하나님이 당근을 포함시키셨어요. 그게 바로 ‘그리하면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인간의 완악함을 보여주는 거예요. 

청개구리 같은 인간들.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청개구리 같은 인간들 때문에 당연한 인간의 도리를 하나님이 명령하시면서 듣지 않을까봐 당근을 포함시켜서 ‘이렇게 하면 네가 오래 살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제4계명은 어떻습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아하, 이건 하나님을 위한 거다. 이건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게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게 아니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삼천 오백년 전에 모세가 이 계명을 발표했을 때 제일 먼저 박수치는 사람이 누구였을 것 같습니까. 노예, 여자, 아이들,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남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박수쳤을 것입니다. 

이 제4계명이 없었더라면 힘이 없는 사람들은 일 년 365일 뼈가 빠지도록 일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 제4계명이 없었더라면 아내들은 남편을 위하여 뼈가 빠지도록 일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들을 배려해서 일주일에 하루는 쉬게 했어요. 그래서 ‘너나 네 아들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심지어 육축이나 네 문에 거하는 객이나 모든 사람이 쉬어라’ 이건 하나님의 혜택을 위한 게 아닙니다. 사람의 혜택을 위한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 스스로 쉼을 결정할 수 없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또한 하나님이 이렇게 명하시기 전까지는 남을 종처럼 부리려는 인간의 욕심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남자들이 여자를 부려먹고, 돈 있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부려먹고, 힘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착취하는 인간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이 쉬게 하신 것입니다. 쉬게 하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지만 인간의 혜택을 위한 것입니다. 그

그러면 제2계명은 어떻습니까.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이거 하나님 위한 거 아닙니까. 천말의 말씀입니다. 우상금지는 인간에게 큰 자유를 선사했어요. 삼천 오백년 전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귀신 ․ 잡신 ․ 미신 ․ 타부, 우상에 매여 살던 인류에게 영적인 자유함을 선사한 것입니다. ‘우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을 섬기지 말아라.’ 

그럼 제1계명은 어떻습니까. ‘너는 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건 하나님의 독선 아니냐. 왜 당신만 믿게 하고 다른 신을 금지했느냐. 하나님 한 분 믿기도 어렵습니다. 도대체 몇 분을 섬기겠다는 얘기입니까. 한분도 믿을까 말까 한데 몇 분을 섬기려고 하십니까. 마누라 한 명 건사하기도 힘든데 몇 명을 둘 수 있겠습니까. 전혀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합리적인 말씀입니다. 

첫째는 무신론에 대한 경계이고 둘째는 종교의 횡포에 대한 견제입니다.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종교의 횡포에 시달렸습니다. 종교인의 횡포에 시달렸습니다. 많은 신들의 횡포에 시달렸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범한 실수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에요. 진리는 하나에요. 그런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많은 자유함을 선사하고 생각의 자유, 발상의 자유, 삶의 자유, 선택의 자유, 어떤 두려움에 매여 살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서 자기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삶을 하나님은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제1계명은 인간의 교만에 대한 경고입니다. 스스로 신격화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되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의견이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말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았던 사람이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는 자기를 하나님처럼 높이 생각하고 실수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더 큰 오해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이에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휴브리스 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인간이 자기를 신처럼 생각할 때 교만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옛날 얘기가 아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너에게 있지 말지니’ 너는 신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너는 흙에 불과하다는 얘기에요. 나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라는 얘기입니다. 

다만 십계명에는 하나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3계명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당연한 얘기지요. 부모님의 이름도 함부로 입에 올리면 안 되는데. 그래서 부모님의 성함이 무엇입니까. 하면 함자를 정중하게 말해야 되지 않습니까. 부모님의 성함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십계명을 하나의 예로 들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혜택을 위한 게 아니고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렵다고 말하고 반항하고 내가 왜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들어서 유익을 얻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에요.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만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와서 아침을 먹으라-come and have breakfast'' 아침을 먹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아침을 먹어야 비만에 빠지지 않고 건강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까지 주님이 일일이 말씀을 하셔야 우리가 듣겠습니까.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우리가 스스로 하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자꾸만 외면하고 거부하려고 합니까.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지켜야 될 도리, 너무 당연한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당신의 권위로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미련함, 인간의 완악합니다. 참 미련해요. 청개구리가 따로 없어요. 

청개구리가 하도 엄마의 말씀을 안 듣고 가라고 하면 오고, 하라고 하면 안하고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실 때가 되어서 아무래도 나를 산에 묻어달라고 하면 개울가에 묻어줄 것 같아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에게 엄마가 죽으면 개울가에 묻어달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청개구리가 엄마의 마지막 말씀은 내가 지켜야 되겠다 해서 개울가에 묻고 비만 오면 엄마의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개골개골 운다는 게 청개구리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게 개구리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렇다는 얘기에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안 지키는 위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독선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명하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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