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값없이 받은 은혜 (롬 3:19-31)

첨부 1


값없이 받은 은혜 (롬 3:19-31)


21세기가 된지 11년이 되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아주 확실한 특징이 나타났는데 지구상에 대재앙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 쓰나미보다도 방사능 누출이 훨씬 더 큰 재앙으로 누출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는 체르노빌에 두 번 다녀왔습니다. 만약 일본에 원전 터진 것이 체르노빌처럼 된다면 일본은 상상할 수 없는 재앙으로 가게 됩니다. 바람이 한국 쪽으로 불면 한국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행히 뉴스를 보니 바람이 태평양 쪽으로 불고 있다고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은 우리가 일본을 위해서 계속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이 됩니다. 

요즘에 세계 문화는 이웃집이 망하면 내 집까지 망하게 되는 관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의 침착한 인내와 용기로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우리가 협조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협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일본은 환태평양지진대에 속해서 지진의 나라입니다. 저도 지진 지역에서 몇 십 년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중국은 내륙 쪽 나라인데도 일본만큼 지진이 많이 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끼어있는 한반도는 지진이 없습니다. 

아마 5천년 역사에 지진 피해는 우리나라에 한두 명의 사람이 희생되고 그 외에는 역사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한반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헌금 많이 내고 살아야 될 거 같습니다. 이번 6월에도 저는 일본에 미국에 계신 한국목사님들이 300명 정도 오시는데 저더러 강사를 하라고 하셔서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고 일본에 있는 선교사분들이 저에게 오라고 하셔서 두 가지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 행사는 매년 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해마다 갔었는데 제가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일본 사람들은 주변 정리를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고 확실하게 할까?’ 이것입니다. 

정말 일본 사람들은 정리를 세계에서 제일 잘합니다. 자기 사는 집도 반듯하고 완벽합니다. 농사짓는 농토도 그림 그려놓은 것 같습니다. 일정하게 규격을 맞추어서 반듯하게 합니다. ‘일본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정리를 잘하나?’ 이처럼 자기 주변을 분명하게 하는 민족입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천재지변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그림 같은 집이나 도시나 농토가 시커먼 진흙탕 물과 함께 삽시간에, 한두 시간 만에 완전 폐허가 되어 버리는 것을 보고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습니까? ‘아! 세상은 불완전하다. 이렇게 자기 주변을 완벽하게 하는 일본 사람들이 이렇게 삽시간에 완전 폐허가 되다니!’ 저것을 회복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세상은 요란하고 불완전하니까 성경에는 뭐라고 하였습니까?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필요한대로 네가 살아가라.” 이것이 성경의 교훈 아닙니까? 지금은 일본이지만 내일은 또 어디가 터질지 또 모릅니다. 이 세상은 항상 불안 요소가 있어서 참 평안이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느껴지는 일이 이번 주간에 지나갔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바울이 했는데 이 신학에서 말하는 의로움이라는 것은 하나의 잣대로 표현합니다. 여기 지금 어떤 물체가 곧은 물체인지 아니면 구부러졌는지 잣대를 갖다 대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건축가들은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건축기구가 하나 있습니다. ‘수평’이라는 것입니다. 가운데 물방울이 움직이게 되어 있어서 이 주춧돌이 똑바로 놓여있는지 그것을 대어 보면 물이 정확하게 그 금에 와 있으면 된 겁니다. 

이 기둥이 똑바로 서있는가 갖다 대어보면 금방 나타납니다. 이것을 가지고 균형을 잡아서 건축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잣대입니다. 갖다 대어보면 내가 의로운 사람인지, 의롭지 않은 사람인지 금방 물방울을 보고 알 수 있는 의미의 내용을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이 의로워졌다는 말은 혹시 세상에서 말하는 사회 정의나 아니면 어떤 당연한 일을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느 때 길을 가다가 돈 뭉치 같은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고 해서 파출소에 찾아가서 “이것을 내가 길에서 주웠습니다. 주인을 찾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갖다가 맡겼을 때 그 사람은 아주 좋은 일을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의로워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가끔 기사에 이런 것이 납니다. 어떤 택시 기사가 손님이 모르고 두고 내린 돈 보따리를 찾아주어서 뉴스 기사화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택시 기사는 의로워졌습니까?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당연한 일을 의롭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나에게서 완전하게 죄가 없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 정의를 행하고 아니면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은 이 로마서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죄와는 절대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제일 먼저 해야 되는 일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없애는 작업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죄를 어떻게 없앱니까? 내가 무엇을 잘해서는 평생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죗값을 다 치러주신 것을 내가 신앙 고백할 때 주님의 의가 내게 오도록, 그래서 내가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제사 방법이 많이 나옵니다. 양을 끌고 와서 속죄 제사를 드립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양을 끌고 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양을 자기 손으로 잡습니다. 그러면 피를 흘리는데 그보다 먼저 하는 순서가 양의 머리에다 안수 기도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이 지은 모든 죄를 끄집어내서 그 양에다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죄가 없어졌고 양은 죄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이 죄가 있는 양은 어떻게 합니까? 죽여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피를 뿌림으로 “당신의 죄는 다 사하여졌도다.” 하나님이 이런 방법을 통해서 속죄의 기쁨을 누리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아사셀 양 같은 것은 성경에 보면 불쌍합니다. 대 속죄일에 온 백성의 죄를 모두다 대제사장이 모아서 그 양에게 뒤집어 씌어서 한 마리는 죽이고 한 마리는 방목합니다. 그러면 이 방목하는 어린 양은 막 도망을 가는데 맹수들이 금방 달려들어 다 잡아먹습니다. 그래서 살은 뜯어먹고 가죽만 길바닥에 새빨갛게 피가 묻어서 버려진 것을 보면 사람들이 ‘아! 아사셀 양이 우리를 위해 또 속죄의 피를 흘렸구나.’ 이것을 보고 또 속죄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는 피를 흘리고 희생이 될 때만이 하나님의 의가 살아나는 것이 성경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제사를 우리에게 드려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 제사가 필요 없다고 성경 히브리서 9장 2절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예수께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래서 지금은 그런 제사를 안 드리고 십자가에서 예수가 자기 몸을 드려서 드려주신 그 제사의 능력으로 우리가 의로움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세상 죄,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다 거두어서 예수에게 뒤집어 씌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죄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다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별안간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모든 죄를 예수님이 다 뒤집어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겁니다. “내가 제물이 될 테니까 죄인이 나한테 다 가지고 오라.”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이 가진 의는 우리에게 주고 우리가 가졌던 죄는 가지고 가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십자가의 그 공로를 믿는 그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었느니라. 

이때 비로소 우리는 죄가 없어지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성경에 있는 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느니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이 죄는 세상에서 죄의 개념과 또 다르게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6장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너희들을 가르칠 텐데 세 가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칠 것이다. 거기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예수 안 믿는 것이 큰 죄인 것을 성령께서 너희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의 최대의 죄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신세진 것이나 갚았다고 당연한 일이 나를 의롭게 한다든지 죗값으로 매나 좀 맞았다고 내가 죗값을 치렀으니까 내가 의로워졌다든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존재인데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번제로 드려서 제사를 지내 주었기 때문에 그 제사의 공로를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되고 죄는 다 사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3장 23~24절 오늘 말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이 죄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제사를 지내주셨다는 신앙 고백을 통해서 내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 곧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께서 다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세상 죄를 다 가지고 갔기 때문에 그 죄가 많아진 예수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제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절대 금욕종교나 고행종교가 아닙니다. 이 금욕이나 고행은 내가 무엇을 노력을 해서 의로워지려는 의도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중세기 때 수없이 많이 고행종교로 변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다 소용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의로워 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이렇게 의로워지는 것이지 내가 고행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의로움을 가지고 온다고 생각하지 말라.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것을 오늘 말씀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24절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갈보리 산 위에서 예수님과 함께 두 강도가 지금 처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강도들은 이 세상에 살려둘 수가 없어서 사형시키는 겁니다. “이런 놈이 세상에 있으므로 세상이 점점 더 어지러워지니까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가장 선이다.” 이런 사회적 제약이란 말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우리가 행한 일의 당연한 보응을 받거니와” “우리는 죽어서 마땅하다.” 그렇게 인정합니다. 절대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아니고 당연히 죽을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도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가 회개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죽어서 당연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께 구원 요청을 했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허락하십니다. 그러면 그 강도의 의는 무엇입니까? 무슨 선한 일을 했습니까? 아무 것도 안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내가 좀 무엇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인정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공짜로, 값없이 은혜를 주셔서 나를 의롭다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감격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몸을 바치고 사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철학입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지금은 우리나라도 입양 문화가 많아져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입양하려고 고아원에 갔습니다.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그 중에 하나를 선택했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내 아들로 삼아서 잘 양육하겠으니 주십시오.” 한 아이가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된 아이는 1급 신체 장애인이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간다고 하니까 그 곳에 다른 아이들도 많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 그 건강한 아이들이 “아저씨! 우리 고아원에는 똑똑하고 예쁜 아이들도 많은데 왜 힘든 장애인인 이 얘를 데리고 가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분의 대답은 “내 마음이다.”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한테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야! 우리를 다 제쳐놓고 너를 아들로 삼아가는 이유가 뭐냐?” 그 아이한테 물었더니 그 아이의 대답은 “나는 알 수 없다.” 그겁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우리가 날마다 찬양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의사에 의한, 하나님의 선택권에 의한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택함 받은 우리는 감사만 있을 뿐이고 그 이상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사요 하나님의 선택권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그 선택 안에 들어와 있는 자가 보니까 내가 죄도 없어지고 하나님의 자녀이고 영생을 누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사건이 너무나도 감격한 사람이 주님을 위해서 몸을 바치게 된 겁니다. 

“나는 내가 살아야 될 이유를 여기서 찾았어. 나는 이것을 위해서 이제 평생 살아야 될 거야.”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죄를 가르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죄를 없이하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관계를 유대인들이 잘못 알고 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수정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로마서라는 성경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된 동기가 어떠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그 방법을 통하여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리에 의한, 이런 하나님의 혜택 안에 들어있는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일 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큰 것인가 이것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란 그것을 깨닫고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생명까지 순교할 수 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예일 대학에 잠깐 가서 연구생으로 1년 동안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 가니까 하버드나 예일 대학은 처음에 다 성경 공부하는 성경학교였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다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서 세계적인 대학이 된 것입니다. 거기 갔더니 예일 대학원생들이 나더러 어디서 왔냐고 해서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잘 됐다. 샘슨의 이야기를 아느냐?” “그게 무슨 소리냐?” “모르는가 보군. 우리 신학교는 옛날 한국과 관계된 아주 감격적인 이야기가 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저에게 샘슨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신학대학에서 2학년 학생이 군대에 나갔는데 때마침 한국에 6·25전쟁이 터졌답니다. 

그래서 한국 파병 군인이 되어서 중부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에 배치되어서 보병 사단 소속으로 열심히 복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이름이 샘슨이었고 자기 친구 베이커라는 친구와 함께 전투병으로 싸웠는데 이 전쟁이 치열하던 1951년 어느 날 베이커가 총에 맞아서 쓰러졌는데 상황으로 봐서는 도저히 회생 가능성이 없는 결정적 상처를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게 되었답니다. 죽어가는 이 베이커가 신학대학에 다니다가 군인으로 온 샘슨에게 말을 하는 겁니다. 

“샘슨! 너와 나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다 죽으니까 괜찮다. 보람 있게 살다 죽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앞으로 내가 가야 되는데 나는 아직 세례를 안 받았다. 너는 신학 공부하는 학생으로 앞으로 목사 될 사람이니까 내 생명이 끊어지기 전에 빨리 나한테 세례를 줘라.” 그래서 샘슨은 자기 배낭에 있는 성경을 급하게 꺼내서 세 군데를 읽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7~38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오늘 말씀 로마서 3장 23~24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 다음에는 누가복음 23장 42~43절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리고 자기 수통의 물을 꺼내서 “내가 너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 물을 그의 머리에 쏟아부어주고 자기 배낭에 있는 비상식량 빵을 급하게 꺼내서 “이것은 너를 위해서 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수님의 살이다. 이것을 받아먹으라.” 

그래서 그의 입에다 빵 한 조각을 넣었는데 빵을 물고 그냥 죽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 샘슨은 자기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휴학했던 학교에 복학을 해서 신학교 전 학생의 채플 시간에 자기가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서 한국과 관계된 이 이야기가 거기에서는 굉장히 아름다운 이야기로 퍼져서 저도 거기 가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내가 무엇을 잘 해서 점수가 올라가서 그 공로 때문에 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공짜로, 값없이, 그냥 하나님의 의사 결정으로, 하나님의 선택권에 의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 안에 있는 내가 되었기 때문에 이 감격이 너무나도 고마워서 사람들이 순교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서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지 나는 알 수 없도다.” 하나님의 선택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이 주는 진리!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권이며, 아버지의 의사대로 주어진 결정입니다. 그 은혜 속에 내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해서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런 큰 감격을 가지고 있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평생을 통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몸과 마음을 드리면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