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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레위 지파의 아들로 물에서 건져낸 모세 (출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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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지파의 아들로 물에서 건져낸 모세 (출 2:1-22)


2011년도 교회표어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로 연초부터 정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근본 자세가 무엇인지 말씀을 드렸고, 복음의 내용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을 담기 위하여 구약의 출애굽기를 강론함으로 옛 하나님 나라를 알고 이를 따라 신약의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왜 출애굽기를 복음의 내용을 말하는데 중요한 책으로 강론하는 것이냐 하면 이미 여러 번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출애굽기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의 근본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를 신약의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재해석하게 되면 교회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출애굽기를 강론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려고 할 때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인데 출애굽기를 통해 신약의 그리스도의 나라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설교본문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말하는 것이 중심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히브리 산파들의 믿음을 통하여 출애굽의 새로운 역사 경영을 나타내실 때에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이루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어떻게 태어났으며 무슨 일을 하였는지 말을 합니다. 그런 후에 2장 끝에서부터 3장에 모세를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을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을 22절에서 끊은 이유는 23절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출애굽기 1:8절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시작해서 이 왕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모세를 시내산에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애굽 왕의 죽음을 통해서 한 세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대가 시자되는 것으로 말하기 때문에 본문 단락을 끊어 잡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을 강론할 때 말씀드릴 때 예수님이 성령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로부터 광야의 시험을 받으신 후에 ‘요한이 잡힌 후’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단락을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 선포를 시작하실 때 그 말씀이 ‘때가 차매’라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출애굽기 표현과 같습니다. 애굽 왕이 죽은 후의 시대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처럼,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의 복음 사역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출생과 그의 광야 생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본문을 접근하여 이해하기 좋게 하자면 이런 일을 생각하면 됩니다. 모든 왕조의 태조 왕에 대하여 알고 계시면 이해하기 좋습니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 대하여, 또 고려의 태조 왕인 왕건에 대하여 아시면 오늘 본문과 관련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서 나라를 새롭게 출발했다는 출애굽기 전체적 내용을 따라 보면, 이제 오늘 본문은 모세에 관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출생하였으며 광야에서 나그네가 된 일을 본문은 말씀합니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는 성씨 이름이 박씨가 된 까닭은 박을 깨고 나왔기 때문에 그리 되었답니다. 신라는 박씨의 나라인 셈입니다. 알에서 나왔으니 파충류라고 할 수도 있나요? 혁거세라는 이름은 세상을 밝힌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을 밝히려고 알에서 나온 자가 박혁거세이며 곧 신라의 시조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본문의 모세의 출생을 박혁거세처럼 신화로 보자는 뜻은 아닙니다. 처음 나라를 세운 임금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이는 2:14절에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출생과 자기 동포를 위한 일에서 출애굽기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일을 재판하는 출애굽기 18장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줄거리는 레위 지파의 아들로 모세가 태어났고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난 뒤 자기 동포를 위하다가 사람을 죽여 바로 왕으로부터 쫓겨나 광야에서 생활하며 거기서 아들을 낳았는데 게르솜이라고 하여 모세가 타국에서 나그네 된 일을 말합니다.  

구약의 출애굽하여 세운 나라는 레위 지파 모세로 말미암아 세운 나라입니다. 그가 레위 지파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니 이는 마치 조선이 이씨의 나라이고 고려가 왕씨의 나라인 것처럼 레위씨의 나라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 애굽에서 구원하여 세운 나라입니다. 나중에 성전제도에 대하여도 보면 전부 레위 지파를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을 통해서도 레위 지파의 나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2장 처음에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레위 지파로부터 출생했습니다. 모세가 출생할 때 이스라엘은 애굽 왕 바로의 학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1:22절에 잘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고 하였더라.” 

레위 지파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을 숨겼다고 2절에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금방 모세가 매우 잘 생긴 미스터 코리아라도 되는 모양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이 말은 뛰어난 외모를 가졌다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약 본문을 따라 이 말을 보면 달라집니다. 신약 본문이 해석하는 것을 보아야 우리는 바르게 이 말을 해석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의 스데반 집사의 설교 가운데 오늘 본문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7장17-29절까지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 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 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당 동안 길리더니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의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헤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스데반의 설교 가운데 ‘나이가 사십이 되매’가 있고, 30절에도 ‘사십 년이 차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여러분께 성경이 말하는 40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있었던 것,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다가 승천하신 것, 노아의 홍수 기간이 40일인 것 등입니다. 이 40일은 주로 새로운 시대에 넘어가기 전 과도기와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스데반 설교에서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히브리서에서도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11:23-26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사도행전의 스데반 설교에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예수를 주께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내용 가운데 모세의 말을 거절한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큰 박해를 눈 앞에 두고 있으니까 어떻게 모세가 바로의 궁전에서 함께 하는 낙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좋아했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런 가운데 모세의 외모를 말하는데 이는 인간적인 외모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세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따라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하는 자로서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물에서 건져낸 자입니다. 이 이름과 같이 모세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의 군대가 뒤쫓아오는 것으로부터 건지는데 홍해 물에서 건집니다. 그렇게 하여 여호와의 백성으로 구별시켰습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의 아들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물로부터 건져내기에, 그리하여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는 아름다운 자였습니다.

그러나 나이 40이 되었을 때 그는 이 일을 이루려 하다가 자기 백성으로부터 거절당하여 바로 왕에게 쫓겨나 광야로 망명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쫓겨났음에도 모세는 애굽의 학식에 능통했다고 스데반 설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물가에 온 목자들과 싸워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학식에 능통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갖추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모세는 아마 무예에도 뛰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자들이 몇 명인지 말하지는 않지만 모세가 그들을 제압하고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에게 우물물을 먼저 먹이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힘은 항상 태조 왕들에게 나타납니다. 단순히 모사로써 뛰어난 지식이 있는 것 정도가 아니라 싸움에 선봉에 나서서 적장을 제압하는 능력이 있어야 왕이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집에서 지내고 그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얻어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타국에서 나그네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게 무슨 의미냐? 이런 일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김구선생이 함께 했던 상해 임시정부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 타국에서 떠돌던 나그네와 같지 않았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그와 같이 모세는 비록 광야에 있지만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따라 이스라엘의 구원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짓는 일에서 그런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일을 마가복음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1:9-13절을 보십시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요단 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부터 올라오셨습니다. 그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이 일을 마태복음은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 하자 거절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일이 합당하며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홍해에서 건져내어 여호와께 속하였던 옛 나라의 구원을 완성하여야 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음에도 친히 물 세례를 받으시고 그 이스라엘 백성의 신분을 다 이루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비천한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오셔서 옛 구원을 완성하여 새 구원으로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들은 이제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모세와 같지 않습니다.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하늘을 가르고 땅에서 하늘로 구원을 얻게 하는 새 구원의 인도자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 하면 그 백성의 자리에서부터 함께 함으로 구원해야 합니다. 서민의 대통령이라고 하면 서민의 삶을 살아보아야 합니다. 그 서민으로 사는 삶에서 자신이 승리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서민의 대통령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태생이 부자이고 서민의 삶을 하나도 모르고 경험하지도 못한 자가 말로만 서민을 위한다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친히 자기 백성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셨고 그를 통해서 이제 성령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레위 지파의 아들로 물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는 가나안 땅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렇게 출애굽하여 세운 모세의 나라는 결국 다윗의 후손 왕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를 완성하시는 하나님 아들로 오셔서 그는 죽음의 권세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땅의 나라를 세우시지 않으시고 보좌 우편에 취임하는 하늘 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렇습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어 사람의 몸으로 나셔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모든 질고와 고통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친히 맛보셔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주님은 새 백성 교회의 왕으로 오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모세의 구원을 완성하는 자로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통해서 하나님 아들로 취임하셨습니다. 모세가 장성하여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돌아볼 생각이 났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 주님은 성령세례를 통해서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일을 시작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모세는 애굽 바로 왕으로 말미암아 광야로 쫓겨났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과 그의 딸의 봉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들짐승과 함께 거하시며 천사가 수종들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처럼 모세의 신분과 예수님의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사가 수종들면 곧 시녀가 수종을 들었다는 말이니 예수님은 왕족이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아들을 낳음으로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탄식에 가까운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모두 이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구원한 영광과 권세가 예수님이 구원하신 영광과 권세가 서로 다릅니다. 이는 곧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여호와께 속한 나라요 모세를 통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나라요 예수를 통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이 교회는 죽음의 권세를 친히 이기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갈릴리 산에 세우신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서로를 보고 형제 가운데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겠습니까? 잘 생긴 것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어떤 가문과 배경과 학식과 부를 소유했는지를 보셔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추구하는 목표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아이의 잘 생긴 것에 있습니까?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나 애굽의 학식에 능통한 아이로 성장시켜야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은 레위 지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자녀들은 성령 세례로 태어났습니까? 어느 나라 속한 아들로 태어난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의 말씀을 참고로 하면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1:3-6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교회론, 교회가 무엇이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찬송합니다. 왜 찬송을 합니까? 신령한 복을 주셨으니까 찬송합니다. 그 신령한 복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사 그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보화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의 영광과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다 비우시고 도리어 육신의 몸을 입어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여 우리가 받을 고난과 죽음까지도 다 담당하셨습니다. 이는 모두 우리의 구원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 하신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고 흠이 없는 자녀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때가 차매 우리 가운데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모든 고통과 고난을 맛보시고 친히 죽음에 이르기까지 낮아지셔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그의 사랑 안에서. 

이를 알게 하심은 지혜와 총명의 신을 부으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시고 하늘 영광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주님이 받으신 고난을 우리도 받고 세상의 기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하늘의 영광과 기쁨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를 존귀한 백성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질서로 형제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외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가진 재물로 사람을 점수 매기지 않습니다. 나와의 이익관계를 통해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내 욕심과 내 가족만을 위하는 생각으로 사시지 마시고, 하늘 가족으로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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