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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떨기나무 불꽃 (출 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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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기나무 불꽃 (출 3:1-14)


I. 기독교 예술

외국 교회를 탐방하다보면 교회안에 성화나 조각 그리고 다양한 예수님 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아주 인상깊은 장면은 제자들의 발을 씻는 예수님 상이었습니다. 그 상을 제작한 예술가가 교회에 기증을 하며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답니다. 누구나 친근하게 예수님 상을 만지고 등에타고 놀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타고 놀아 반질반질해진 예수님 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예배당엔 이런 예술품들이 없어 삭막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예배당을 건축하면 성화나 사진 그리고 예수님 상 등 기독교 예술품들을 많이 두어 말이나 글, 노래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예술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들어내고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교훈과 평안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당엔 다양한 그림과 사진 그리고 예술 조형물들을 배치하게 되었습니다. 

배치과정에서 다른 예술품들은 내 안에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 상을 세우는 일은 잠시 갈등을 갖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람직한 일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신대 예배학 교수, 기독교 문화학 교수, 기독교 예술가, 총회적으로 신학의 방향을 늘 잡아가는 목회자들과 깊이 있는 토의 과정을 거쳐 신학적 확신을 얻은 다음 세우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 가운데 십자가 목걸이를 달고 다니시는 분들이 있지요. 이것은 우상일까요 아닐까요? 우상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가 십자가를 부적처럼 생각하고 숭배한다면 십자가도 우상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듯이 예수님이 좋고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하여 달고 다녔다면 우상일 수 없는 것이지요. 만약 이것을 모두 우상이라고 한다면 기독교 예술은 불가능한 것이요 기독교 역사는 우상 만드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귀를 만드시고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눈을 만드시고 기독교 미술을 기뻐하십니다. 

칼빈은 “인간은 우상 제조기”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늘의 형상이나 땅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 4:17]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신 4:18]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렇다면 모든 동상도, 인형도, 십자가도 우상인가? 

한 권사님이 어느 목사님 집에 가서 “목사님 집에도 인형이 있습니까?”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마치 “왜 우상을 집에 두고 있습니까?”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께서 인형을 불태웠답니다. 

우선 모든 형상은 우상인가? 동상도 다 우상인가? No. 아닙니다.
그러면 성소에, 그것도 지성소에 그 중에도 가장 거룩한 법궤 위에 그룹(천사)의 모형을 만들어서 놓았는데 이도 우상일 것입니다.(출 25장, 출 37:7-9)

우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 자체가 우상인 경우와 하나는 우상으로 섬길 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불상은 우상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자체가 우상입니다. 우상의 목적으로 만들면 그것은 다 우상이 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섬기는 것은 태양입니다. 그러나 태양 자체가 우상이란 말은 불가능합니다. 섬기지 말아야 할 대상이지만 그것 자체가 우상은 아닙니다. 십자가나 교회에 있는 어떤 상징물이 우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그림, 예수님 상 등 자체가 우상이 아니라 어리석은 인간이 십자가 조차도 우상화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 상을 통해 - 
두 팔 벌려 주의 교회를 찾아오는 성도들을 환영하고 안아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이곳에 올때마다 여러분 모두 평안하시길 빕니다. 

오늘 예술 조형물 해설 세 번째 시간 - 모세의 불타는 떨기나무를 주제로 만들어진 머릿돌에 대해 해설하고자 합니다. 

II.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우리가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인간적으로 모세는 영웅이라기 보다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편 친근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아래 종살이를 하던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모세가 출생할 때 애굽왕 바로가 히브리 남자 아이는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아이를 석달 동안 숨겼으나 더 이상 숨길수가 없어 갈대상자에 아이를 달아 나일강 물에 던집니다. 때마침 강가에 목욕하러 왔던 공주와 궁녀들의 눈에 띄어 건짐을 받고 바로의 궁전에서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과 모세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커다란 계시입니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내가 건져 낸다”는 뜻입니다. 물에서 건져냈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지요. 그렇다면 “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자”라는 수동태가 되어야 되는데 모세의 이름은 “건져낼 자”라는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장차 자기 백성을 건져낼 자라는 암시와 사명이 담긴 이름 아닙니까?

모세는 어릴 때부터 자기 이름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경륜을 알았습니다. 

‘나는 언젠가 우리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야 한다.’

그리하여 모세는 그가 닦은 학문과 40년 동안 축적한 힘으로 자기 동포를 건져 보겠다고 주먹을 쥐고 휘둘러봅니다. 자기 백성과 애굽인의 싸움을 보고 의분과 애국심에서 애굽인을 쳐 죽인 것이 자기 백성의 밀고로 탈로 납니다. 실망과 실패의 한을 품고 망명길에 오릅니다. 이제부터는 하늘을 지붕삼아 떠나는 걸식객이 된 것입니다. 장인의 양을 치는 목동이 되어 험한 산야를 헤매며 밤낮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못 잊어 눈물 뿌려 40년 세월을 보냅니다. 미디안 광야생활 춘풍추우를 보내고 모세의 나이 이제 80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이 다 일장춘몽이요, 이제는 늙은 양의 젖을 짜며 남은 세월을 보내야겠다 모든 것을 접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통하여, 실수를 통하여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실패했다고 앞으로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야훼의 사자가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대화를 할 때보면 야훼의 사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모세와 대화를 하는 듯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신학자들은 이 분이 구약의 예수님 일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만약 제가 이 사건을 주도하는 연출자였다면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벅찬 기쁨의 눈물을 두 주먹으로 닦으며 장인에게로 갔습니다. “장인 어른, 하나님이 드디어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제 저는 내 백성을 건지기 위하여 가겠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손을 붙들고 “여보, 드디어 때가 왔소”. 그래서 모세는 특급 천리마를 타고 광야의 먼지를 일으키며 “이랴, 애굽으로 가자!” 얼마나 스릴있고 박진감이 넘치며 신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11절을 보십시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제가 왜 갑니까?” 여러분, 이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내가 어떻게 갑니까?” 

“하나님 저는 알다가도 모를 분이 바로 당신입니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제 팔에 알통이 남아있고 머리에 총명이 반짝이고 가슴엔 사명으로 불타던 그때 제가 하나님 편에서 손을 쓸 때는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이제 와서 가라구요. 제 얼굴을 보십시오. 주름지지 않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이 늙은 몸을 가지고 누구에게 가며 어떻게 내 백성을 인도한단 말입니까?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아마 군대 졸병이 말대꾸를 하더라도 속된말로 귀 싸대기를 한대 쳤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달래고 설득합니다. 이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도 모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묻습니다. 그러시는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I am that I am. “나는 나다. 나는 내 맘대로 한다”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면 부르고 버리면 버림받는 거지요. 80살에 부르면 80살에 아멘이요, 10살에 부르면 10살에 아멘이요, 120살에 부르면 120살에 아멘입니다. 

“I am that I am.”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온 천하는 그 앞에 잠잠할지니라. 조용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옹기가 어찌 그 만드는 이를 향하여 “나를 왜 장독으로 만들었습니까? 나를 왜 요강으로 만들었습니까? 나를 왜 국그릇으로 만들어요?”뭐라고 대답할까요? “내가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다. 필요해서 만들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옥에 내려가라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아멘! 찬송하며 내려가겠다”고 했습니다. 

III. 떨기나무 불꽃

호렙산.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온 산이 호렙산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호렙산이 나오고 시내산이 나옵니다. 동일한 장소인데 성경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산 전체, 산등성이 전체는 호렙산이고 산의 정상, 꼭대기가 시내산이라고 합니다. 호렙산에서 가장 많이 널려져 있는 것이 떨기나무입니다. 

하나님 제 나이 80인데 이제 와서 무엇을 하자는 겁니까? 이 질문에 대한 가시적인 대답이 “떨기나무 불꽃”입니다. 

떨기나무란 곧 가시나무를 말합니다. 호렙산 광야에 많은 나무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많고 많은 나무가 이 떨기나무요, 꾸불꾸불 휘어져 쓸모없는 나무가 가시나무였습니다. 기둥감은 고사하고 석가래 감도 못되는 가시떨기, 천덕꾸러기 나무였습니다. 떨기나무는 건조한 기후와 사막의 열기에 가끔 불을 안 붙여도 불이 난다고 합니다.  한번 불길에 타오르다 푹 꺼지면 그만입니다. 이 보잘 것 없는 떨기나무는 노예로 살아가는 히브리인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40년 동안 남의 종살이하는 모세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떨기나무의 불꽃은 좀 이상합니다. 나무가 타지 않습니다. 보통, 불이란 연소할 재료가 있어야 타오르는 법입니다. 지금 떨기나무 불은 혼자 타고 있습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모세야, 너는 40년 전 너 자신을 태워 내 일을 하려고 했다. 너를 태우자 두 번도 못 태우고 24시간 만에 홀랑타고 남은 것이라곤 재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네 몸 태워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능력 받아서 하는 것이다. 100kg도 안 되는 네 몸이 역사를 뒤집는 땔감으로 될 것 같으냐?”

여러분! 하는 일마다 힘들고 어지러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태우는 방법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24시간 땔감밖에 못됩니다. 그래서 네 발의 신발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네 인생은 끝났다. 모세, 너는 죽었다. 공주의 아들이 되어 애굽에서 신던 신발 벗어라. 학문과 경험의 신발도 벗어라. 지위와 권세의 신발도 벗어라. 낙심, 절망의 신발을 벗어라. 네 발로 걷던 것은 무엇이든지 벗으라는 말입니다. 네 힘 내려놓고 겸손해 지라는 것입니다. 네 발로 걷지 말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데로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신발 벗고 사는 사람은 노예밖에 없습니다. 네가 사령관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종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지도자인 것이다. 

사람들이 일하러 갈 때 내 놓는 게 있습니다. 이력서라는 겁니다. 네 이력서를 집어 던지라 말씀하는 겁니다. 이력서란 밟을 리(履), 신바닥 력(歷) 즉 자기 발로 걸어온, 신이 다닌 경로를 쓰는 것이요, 신이 다닌 자취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앞에서는 이력서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발로 다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일은 내 이력서,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를 포기한 때부터 가능합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곧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인간이 궁지에 몰렸을 때가 곧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는 기회입니다. 

40년 전 모세는 생각하기를 큰 나무더미가 아니면 큰 불을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큰 인물이 아니고서는 큰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을 자기 자신이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자신의 힘과 능력과 그가 배운 학식과 재능과 경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바논의 백향목을 태우지 아니하시고 보잘 것 없는 몇 포기 가시나무에서 꺼지지 않는 놀라운 불을 일으키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①“모세야, 역사는 백향목이나 상수리 나무같은 거목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가 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백향목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너는 그 일을 할 수 없다. 40년동안 네가 미디안에서 고생한 이유를 알겠냐? 백향목 같은 네 고집이 가시나무로 낮아지고 꺽여 지기 위함이었다. 모세야, 너는 가시떨기 같은 존재니라.” 바로 이 말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를 향한 메세지가 여기 있습니다.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내가 큰 사명을 주는 줄 아느냐? 너는 쓸모없는 떨기나무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너 같은 떨기나무에 임재 할 때 너는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성품입니다. 여기에 쓰임 받는 감격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바로 여러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메시지임을 믿으십니까? 

쓸데없는 교만과 자아가 불쑥 불쑥 튀어 오르거든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가시떨기다. 교만하지 말자. 깨끗이 죽자.” 

호렙산 떨기나무에 타올랐던 그 불은 나무를 태우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그 불은 인간의 마음을 태워 뜨겁게 하는 불이었습니다. 그 불은 식은 소명을 새롭게 하는 불이었고, 인간의 삶을 거듭나게 하는 불, 죄를 태우는 불, 성령의 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불을 받으면 세상을 태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IV. 떨기나무 같은 우리를 통해 

때문에 교회사는 불의 역사였고 사도행전은 불의 행전이었습니다. 성령의 불이 타오르는 곳마다 어둠이 변하여 빛이 되었고, 좌절이 변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꺼져가는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다락방에 그 불이 내려지자 예루살렘을 태웠고 로마를 태웠습니다. 환란도 핍박도 죽음도 그 불을 끄지 못했습니다. 그 불은 내 몸을 뜨겁게 하고 마음을 뜨겁게 하고 내 삶, 내 사역을 뜨겁게 하는 불이었습니다.  

② 동시에 떨기나무 경험은 나 같은 것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나 같은 가시떨기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면 일어설 수 있다는 소망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료 여하에 상관이 없이 큰 불을 일으키십니다. 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타다 남은 숯덩이 조각으로 자처하는 요한 웨슬레를 불러 하나님은 영국 교회에 큰 불을 붙여 주시고, 오늘 세계에서 가장 큰 교단중의 하나인 감리교를 만들게 했습니다.

한나 모아 여사는 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을 예배당엔 노인들 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성경책은 단 한권 그것도 화분 받침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에서 끄집어낸 타다 남은 조각이라고 고백하는 요한 웨슬레에 불을 내려 그를 태우셨고, 요한 웨슬레 한사람의 불길은 영국 전역을 태우고도 세계를 태우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었던 평민 어부들을 불러 사도를 만드시고, 성령의 불을 일으켜 오늘날 세계를 복음의 불로 태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늙어 마른 막대기가 된 아브라함과 사라를 불러 이삭이라는 자식을 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5에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메마른 아론의 지팡이에 하나님의 손이 닿자 싹이 나고 꽃이 피었습니다.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시간 나 자신을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마른 막대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계십니까? 한 포기의 떨기나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성령의 불이 떨어지면 그 크신 역사를 여러분이 이루어 가게 될 것입니다. 

모자라도 하나님의 부름 앞에 아멘하면 하나님이 감당할 불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끝까지 거절하면 다리를 꺾어서라도, 손발을 묶어서라도 보내고야 마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순종하면 하나님이 불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실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의 종들의 실력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 쓰십니다.

떨기나무가 내게 임하는 경험 한번만 하고 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게 불을 주시는 경험 한 번만 하고 나면 내 앞에 가는 것들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문제가 소멸됩니다. 나를 묶고 있는 악한 사단의 밧줄이 소멸되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여 나아가는 사람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맨손으로 그냥 보내시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2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누구관대 당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모세의 물음에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이제는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 당신이 누구입니까? 묻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네가 누군지 아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존재다! 너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존재다. 역사의 주인이 함께 하는 존재이다. 전능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존재이다.” 할렐루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순간, 전능하신 그 주님, 능력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삶을 붙잡는 그 순간 우리는 벌떡 일어섭니다. 가시덤불 같은 내 인생의 나무에 하나님께서 불을 붙여주신 것을 느낍니다. 당신에게 이 불이 붙었습니까?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이 선교 보고차 고국에 들렸다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누가 물었습니다. 이미 이 때는 리빙스턴이 사자에게 물려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 빈소맷자락이 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굶고 못먹어 얼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바라만 보고서도 모인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님, 사나운 맹수, 야만인들 속에서 그토록 어려운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리빙스턴이 대답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여 지도자로 나서는 사람을 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십니다. 

V. 머릿돌

한소망교회엔 성령님의 불을 받아 함께 이루어 가야 할 꿈이 있고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 머릿돌엔 이런 비전선언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소망교회를 주님의 심장속에 있는 
바로 그 교회로 세워 한국교회 한민족을 섬기고 
열방에 예수님의 복음과 비전을
나누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
비전채플을 세우노라」

어떻게 우리의 이 비전을 이루어 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 없이 우리는 세상에 버려진 떨기나무 한 그루에 불과합니다. 

• 하나님이 비전을 주셔야 합니다. 
•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야 합니다. 
• 하나님의 임재,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떨기나무는 기둥이 될 수도 없고 땔감이 될 수도 없고 꽃이 피는 나무도 아니고 열매가 맺히는 나무도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불이 붙어 꺼지지 않는 큰 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전에 올때마다 신을 벗는 경건한 자세로 오십시요. 그리고 모든 예배, 모든 사역, 모든 모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시길 빕니다. 기도시간마다 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우리의 비전처럼 우리교회를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심장속에 있는 바로 그 교회로 세워 한국교회를 살리고 한민족, 세계 열방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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