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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삶 (시 37: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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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삶 (시 37:23-24)


(시37: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1. 욥은 사람의 경험이나 지혜, 철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환난을 당해 길바닥에 나 앉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소식을 듣고 욥을 찾아와 위로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욥에게서 뚜렷한 환난의 원인을 찾지 못하자, 위로하는듯하면서 자신들의 지혜와 총명을 총동원해 욥을 질타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환난에 대한 전통적인 자신들의 견해가 거의 절대적인 지혜라는 생각으로 욥의 환난을 해석하고 난도질하여 욥을 책망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러한 친구들에게 욥이 한 마디 합니다. 

“(욥12:9-10)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모든 생물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사람의 목숨 또한, 모두 그분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을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욥의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건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모압 평야에 진을 쳤습니다. 이 모습에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을 지나가게 되면 쑥대밭이 되고 말 것이라.’며 두려워합니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리칠 수 있는 묘안을 찾다가 주술사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주술사로 알려진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주문을 외우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돈을 받은 발람이 발락의 요구에 응하기로 하고 모압의 귀족들과 함께 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발람에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발람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이 보낸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돌아가시오. 여호와께서는 내가 당신들과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주술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발락은 다시 그들보다 지위가 더 높은 사람들을 전보다 배나 더 많이 보내 ‘내가 당신에게 충분히 사례하고 또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주겠소. 그러니 제발 와서 나를 위해 이 백성을 저주해 주시오.’라며 다시 간청합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발람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그들과 함께 가는 데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몹시 분노하셨습니다. 

발람이 두 종을 거느리고 나귀를 타고 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의 길을 막아섰습니다. 그러자 나귀는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나귀를 길로 다시 들어서게 하려고 채찍질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천사가 두 포도원 사이에 있는 좁은 길에 섰는데 양쪽에는 담이 있었습니다. 나귀가 칼을 든 천사를 피하고자 몸을 담에 대고 버티며 발람의 발을 담에 비벼 상하게 하자 발람이 다시 채찍질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는 앞으로 더 나아가서 좌우로 빠져 나갈 틈이 없는 좁은 곳에 섰습니다. 나귀는 진퇴양난에 빠져 땅에 엎드리자 발람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 말할 수 있게 하시자, 나귀가 발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 세 번씩이나 나를 때리십니까?’ 발람이 ‘네가 나를 놀렸기 때문이다. 내 손에 칼만 있었더라면 벌써 너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고 대답합니다. ‘나는 오늘까지 당신이 평생 타고 다니는 나귀가 아닙니까?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라며 항의하자 발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자 그는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며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합니다. “너는 왜 나귀를 이와 같이 세 번씩이나 때렸느냐? 네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기 때문에 내가 너를 막으려고 왔으나 나귀가 나를 보고 세 번이나 피해갔다. 만일 나귀가 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만 살려 두었을 것이다.” 이에 발람이 ‘내가 죄를 범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내가 가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돌아갔습니다. 

결국 주술가 발람의 주문은 시행되지도 못하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민22:21-35) 욥이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고 한 말은 바로 이 발람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비록 동물이지만 하나님의 천사를 보게도 하시고 필요하다면 인간과 대화를 하게도 만드십니다. 그런가 하면 동물들은 하나님의 천사를 보는데 인간은 그 천사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밝혀주셔야 비로소 보게 되기도 합니다. 

욥의 고백대로 “모든 생물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사람의 목숨 또한, 모두 그분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의 영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영을 취할 때, 그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욥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기34:14-15입니다.

(욥34:14-15) 만일 하나님이 그의 영과 숨을 거두어 가신다면 모든 생명체는 사라질 것이며 사람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만드셨고, 그 천지만물을 하나님 뜻대로 다스리십니다. 천지만물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대상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욥은 그의 친구들이 자신들의 지혜와 총명으로 욥의 당한 환난을 해석하고 책망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욥의 환난을 이해하고 그 원인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지혜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나귀까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여 비록 죽어 마땅한 주술가지만 죽이지 아니하시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저주할래야 저주할 수 없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능력의 손으로 붙드시는 복 받은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수 있도록 그 홍해를 말리셨던 것처럼 요단 강 또한 그 물줄기를 막아 마른 땅을 밟고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요단 강 건너 편 길갈에 돌 12개를 세워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념 돌을 세우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 4: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그 기념 돌을 보고 하나님의 손이 전능하심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후손들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잠 1:7;9:10)


2. 그러므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된 사람이 복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의인의 삶의 여정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그 의인이 잘못된 길, 곁길로 나가려할 때 바로 잡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의인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그 의인이 때로 불행해지기도 하고 어려운 처지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의인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역경이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역경과 고통으로 인해 실패와 불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잠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자들에게 기뻐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약속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엎드러지고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미7:8)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신 성도 여러분, 예수 믿음으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의인들이십니다. 때로 실수와 죄로 인해 엎드러지고 어두운데 처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믿는 아버지 하나님은 여러분의 빛이시며 구원이십니다. 생명의 능력이 되십니다.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고발로 억울하게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총독들의 심문 결과는 무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합법적으로 바울을 죽이려는 계략이 무산되자 암살을 모의합니다. 이 사실을 바울이 알고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암살을 피해 로마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바울이 승선한 알렉산드리아 호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여러 날 동안 해와 별도 보이지 않고 사나운 폭풍만이 계속되어 결국 살아날 가망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이 말씀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276명의 사람들을 다 바울의 손에 붙이셨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276명의 생명이 비록 죄수로 압송되어가지만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는 바울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자신이 억울하게 고발당한 것은 자신에게는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바울의 걸음을 정하신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동족들의 암살을 피해 로마로 가는 길에 들어섰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걸음을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왕위에 등극하기까지 약 20년 동안 사울왕의 질투와 시기로 인해 끝없이 도망하는 유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20년간의 세월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시시각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긴박한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울의 추적을 이러저리 피하다 급기야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신하들은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알아보고 살해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다윗은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위기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환난에서 더 큰 환난으로, 어둠에서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다윗이 부모와 함께 모압으로 피신합니다. 모압으로 피신한 이유가 있습니다. 모압은 바로 다윗의 증조 할머니 룻의 고향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삼상22:5)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아무리 사울 왕의 추격이 두렵고 유다 땅에 피할 곳이 보이지 않다는 해도 약속의 땅을 벗어나는 것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걸음을 정하시는 하나님께서 곧장 유다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앞뒤가 아무리 캄캄해도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일사각오의 믿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신 다윗이기 때문에 사울 왕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다 해도 결코 다윗을 넘어지거나 엎드러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는 추격자이고 다윗은 도망자였지만, 하나님께서 붙드신 다윗의 손에 사울 왕의 생명이 달려있었습니다.

(삼상24:4)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이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31:15)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천하만사(萬事)에는 정한 때가 있고, 그 모든 일의 정한 때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시104:27,욥38:32,렘 8:7) 마찬가지로 다윗 자신에게도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시련의 때와 형통의 때가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인간들(원수들)에 의해서, 또는 우연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으시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은 일시적으로 다윗을 핍박할 수는 있어도 약하여지고 맥이 풀리는 힘없는 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삼하 4:1,렘 50:43). 그 어떠한 인간의 손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정해 놓으신 형통의 때를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인간의 손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다윗을 엎드러지거나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나의 삶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는 고백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3. 더 나아가 다윗의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다”(시 31:15)<My times are in your hands> 는 고백은 “내 앞날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내 일생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앞날이 누구 손에 달려 있습니까? ‘주의 손에 달려 있다’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의 앞날이 사람이나 돈, 환경에 따라 좌지우지 된다고 여기십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위대함과 능력과 영광과 승리와 존귀가 모두 주의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도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는 만물의 머리 되신 분이십니다. 부와 존귀가 주께로부터 나오고, 주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으시니, 사람이 위대하고 강하게 되는 것도 주의 손에 달렸습니다. 이러한 주님께 지금 감사하고, 주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대상29:11-13) 

다시 한 번 ‘내 앞날이, 내 일생이 주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는 믿음의 고백으로 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평강 교회의 앞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반석위에 세운 교회 흔들 자가 없습니다.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습니다. 우리 평강 교회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헛된 모든 영광 아침 안개 같으나 주의 손에 있는 성도와 교회가 받을 복은 영원합니다.’(찬210장)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성도들이 세상과 죄악을 이기고 축복의 삶을 삽니다. 예수 믿음으로 사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나 물질, 환경에 따라 가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살게 될 때 물질이 따르고 환경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 빛과 어둠, 행과 불행 등이 모두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다 맡길 때 생명과 복과 빛과 평강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사람이 가장 복 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앞날, 자신의 일생을 주의 손에 맡기고 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자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야곱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야곱을 죽여 한을 풀고자 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리브가는 수 천리 떨어진 밧단 아람의 외삼촌 집으로 야곱을 도피시킵니다. 도피 중 밤이 되어 돌 하나를 베개 삼아 잠을 청하는데 이내 잠이 들어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하늘에까지 닿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리는데 “(창28:13-15)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하여 두렵고 고독한 길에 자기 홀로인 줄 알았는데 이내 말로만 듣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 그리고 조상에게 약속하신 축복들이 자신에게 계승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 야곱은 잠이 깨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28:16)며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며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서원합니다. 

(창28:20-22)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그리고 마침내 외삼촌 집에 도착하여 첫 눈에 반한 외삼촌의 둘째 딸 라헬과 연애하게 됩니다. 야곱은 라헬과의 결혼을 위해 7년을 무보수 봉사하겠노라고 약속하고 그 7년을 수일같이 지내다 드디어 결혼식을 마치고 첫날밤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7년을 연애하던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가 옆에 누워있는 것이었습니다. 외삼촌에게 속은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은 자기 지방 풍속에 형보다 아우를 먼지 시집보내지 않는다면서 그래도 라헬을 원한다면 7년을 더 무보수 봉사하라고 요구합니다.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는 야곱은 또 다시 7년을 머슴 생활로 보내고 마침내 라헬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20년 종살이 끝에 두 아내와 아내의 시녀들을 통해 12명의 아들을 두고 거부가 되었습니다. 때가 되어 늘어난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창31:3)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모든 가족들을 약대에 태우고 자신의 모든 짐승과 소유물을 이끌고 라반이 집에 없을 때 고향으로 출발합니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20년 만에 귀향길이었습니다. 고향이 가까워 오자 제일 먼저 형 에서가 두려웠습니다. 형의 마음을 돌려보기 위해 예물을 잔뜩 실어 보냈지만 여전히 불안하여 얍복 나루터에서 날이 새기까지 간절히 기도합니다. 환도뼈(엉덩이뼈)가 어긋날 정도가 되기까지 천사와 씨름하며 기도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형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형은 야곱을 기쁘게 맞이하고 그간 맺힌 한을 풀어버립니다. 그리고 앞장서서 야곱 일행을 에스코트까지 해줍니다. 가는 도중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성 여자들을 구경나갔다가 그만 그 성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이 사태 해결을 위해 추장의 아비 하몰이 야곱을 찾아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디나를 자기 아들과 결혼시키고 자기 땅에서 계속해서 생활하는 게 어떠냐며 협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여동생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는 못하겠다.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누이를 줄 수 없다. 그러나 허락할 수 있는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너희 족속의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는 것이다.”며 협상 조건을 제시합니다. 하몰과 그 아들 세겜 추장이 협상 조건을 좋게 받아드리고 돌아가 일제히 할례(circumcision)를 시행합니다. 할례를 행한 후 삼일 째 되는 날, 가장 고통스러울 때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성을 급습하여 할례로 인해 꼼짝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세겜 족 모든 남자들을 몰살하고 하몰과 그 아들 세겜까지 죽여 버리고 누이 디나를 데려옵니다. 게다가 그 성의 모든 재물들을 약탈하고, 그 자녀들과 아내들까지 사로잡아오게 됩니다. 거룩한 할례 의식을 악용하여 세겜 족을 속이고 학살한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이 놀라 두려워하며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 입장을 난처하게 하였다. 이 땅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냄새를 맡고 나를 증오할 것이다. 우리는 수가 얼마 되지 않는데 만일 그들이 합세하여 공격해 온다면 우리 집안은 망하고 말 것이다.”(창34:30) 

고향 떠나 파란만장한 20여년 고생 끝에 대가족을 이루고 거부가 되어 금의환향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사랑하는 딸이 강간을 당하고, 이 사건으로 학살극이 벌어져 주변 가나안 동맹 족속들이 분개하여 합세 공격을 해온다면, 그간 이룩한 20년 세월의 모든 축복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창35:1)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하여 두렵고 외로운 밤을 홀로 보낼 때 나타나셔서 항상 함께 하여 어디로 가든지 지키며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던 곳,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것과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대가족을 이루고 거부가 되어 평안히 돌아오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자신이 약속한대로 제일 먼저 벧엘로 올라가서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어야 마땅했습니다. 야곱은 애초에 ‘벧엘로 가라’는 하나님 말씀대로 벧엘로 가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장 눈에 그 많은 가축떼들을 먹이기에 좋아보이는 세겜으로 갔다가 엄청난 봉변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길을 바로 잡기 위해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곧장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 땅과 밭을 사들이고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살고자 했던 것은 그곳이 가축을 키우기에 좋아보였고, 장사하기에도 아주 편리해서 여러 가지로 유익해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혜서 잠언14:12에서 “(잠 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고 했습니다. 

“(잠 5:21)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길을 지켜 보시며, 그 모든 길을 살펴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길을 지켜보시다가 필경 그가 갔던 길이 망하는 길이기 때문에 잘못된 그 길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야곱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약속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래서 야곱의 앞날, 야곱의 일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그의 걸음을 바로 정하시고 그의 앞날을 복된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4. 그러면 주의 손으로 붙드시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겠습니까? 시편147:6을 보겠습니다.

(시 147: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 뜨리시는도다
 
B.C. 1150년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붙여 7년간이나 지배를 받으면서 고통을 당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실컷 농사를 지어놓으면 약탈당하기 일쑤이고 가축들마저 약탈당해 이제 먹을 것 마저 떨어져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는 고통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삿6:1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기드온은 “감히 여쭙습니다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또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삿6:15)며 사양합니다. 한 마디로 기드온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겸손한 기드온을 붙드셔서 300명 정예부대를 이끌고 무려 13만 5천명의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붙드십니다. 

유명한 세계적인 전도자인 디엘 무디는 모세의 일생을 성경을 통해서 공부하다가 그 일생 120년을 세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처음 40년, 중간 40년, 마지막 40년, 이렇게 3단계로 나누고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의 처음 40년은 애굽의 궁중에서 왕자로 자라났습니다. 모세는 그 40년간 왕자로 왕궁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굉장한 인간인줄 착각 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무디는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I am somebody, I am somebody” 모세의 두 번째 단계인 중반 40년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내몰아낸 시기였습니다. 자신이 왕궁에 살다보니 뭐 내가 굉장한 인간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든 모세를 광야로 밀어내었고 그래서 모세가 광야에서 배운 교훈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즉 I am nobody,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처음에 I am somebody, 나는 굉장한 인간일줄 알았다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들여 다 볼수록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 이러한 고백을 토해내도록 하기 위해 중반 미디안 광야 40년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40년 세월이 흐른 뒤에 하나님이 모세를 보고 “너 됐어 이제 겸손해 졌구나. 내가 너를 붙들어서 쓰겠다. 너 내 백성을 이끌어내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너무나 겸손해진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 이제 못해요. 아무것도 못해요 정말 못해요. 전 말도 할 수 없고요 이 백성을 설득할 수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도 기가 막히니까 “야! 너 말할 수 있는 것 그것, 그 능력 그것 누가 준 줄 알아? 네 입을 누가 만들었느냐? 네 주둥이를 누가 만들었느냐?”시며 “네가 정말 말을 못한다면 내가 말하는 사람, 아론을 대신 세워 줄께, 나 믿고 가!” 이때 비로소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디는 모세의 나머지 마지막 40년, 마지막 세 번째 단계의 40년을 가리켜서 그때 정말 자기의 부족을 알기에 이제는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었든 모세, 그 걸 무디는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I am God's body, 하나님의 종, 이제 somebody가 아니고 Nobody도 아니고, I am God's body, 이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하나님만 의뢰하고 사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붙들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된 삶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 걸음을 정하시고 그 삶을 붙드시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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