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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생하는 존재 (3) (요일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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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하는 존재 (3) (요일 3:13-18)


요한일,이,삼서는 사도요한이 영감을 받아 기록하였습니다. 요한일,이,삼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도요한의 말년에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교훈을 달라고 애원하자 “내게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밖에 줄 교훈이 없다”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도요한이 요한복음과 요한일,이,삼서를 기록하고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요한복음3장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주셨으니 ...”라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4장7장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3장에서도 사랑을 강조합니다. 3장 전반부를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라고 강조를 합니다. 소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이면 순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순결하시기 때문입니다. 중반부에서는 하나님 자녀가 되려면 “죄를 거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자녀는 그 수준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사람이 수준 높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종반부에서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요한일,이,삼서의 주제가 사랑입니다. 

4장1절에서는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마땅하다”는 헬라어로 “오페일로멘”(opeilomen)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뜻입니다. 여기 “사랑하라”는 말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의무적인 실천사항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성도는 예수의 죽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 있게 하는 일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14). 고로 “너희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16). 

사랑  

사랑은 섬김입니다. 사랑은 언어나 말이나 문자나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이며 섬김입니다. 섬김 없는 사랑은 허구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을 외치기만 하고 십자가에서 죽지않았다면 그 사랑은 허구요 철학이요 개념으로 머물렀을 것입니다. 오늘 세상에는 허구적 사랑이 많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많은데 섬김이 없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부들에게 갈등이 많습니다. 갈라서기도 합니다. 그 이유를 성격차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랑 부족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니까 섬김이 없고 섬김이 없어지니까 자기를 주장하게 되고 곧 바로 갈등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결혼 초에는 갈등이 없습니다. 사랑하니까 서로 섬기고 양보하고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살면 서로 시큰둥해집니다. 그리고 섬김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갈등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이라는 말은 많은데 행동이나 섬김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가는 곳 마다 갈등이 나타나고 가정에도, 부부들 사이에도, 오늘 교회에도 다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섬김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사랑은 섬기는 일입니다. 

섬김 

섬김은 희생입니다. 희생 없는 섬김은 없습니다. 섬김은 형식이 아니고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은 행동 즉 희생입니다. 희생 없는 섬김은 허구입니다.  섬김은 이론이나 철학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셨습니다. 제물이 되셨습니다. 제물은 희생이 전제가 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벌써 전제와 같이,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디모데후서 4장 6절). 여기 관제, 전제는 Drink Offering 즉 “제물 위에 붓는 포도주”를 말합니다. 

이제 내가 제물이 되어 피 흘려 순교하리라는 것을 암시한 말입니다. 제자의 삶이나 신앙인의 삶은 희생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고 평안하고 만사형통하고 재미만 있고 웃음만 있는 줄 알면 안 됩니다. 그것도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값싼 은혜입니다. 진정한 예수의 제자는 나 때문에 죽으신 예수의 희생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그 동참하는 생활이 섬김의 삶이고 희생의 삶입니다.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말은 장밋빛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섬기고 희생하라”는 말입니다. 왜 희생해야 하는가 하면 희생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보람의 열매입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일에서, 섬김에서, 희생에서 기쁨과 보람을 얻습니다. 성공이나 승리나 이익을 얻는 것 보다 더 큰 보람을 얻습니다. 괴테의 “앉은뱅이 꽃의 노래”라는 시를 보면 산비탈에 피어난 앉은뱅이 꽃이 어느 날 양의 젓을 짜는 청순한 시골 처녀의 발에 밟혀 죽어갑니다. 그러면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무지막지한 머슴애들 발에 밟혀 죽는 것 보다 훨씬 보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보람에 살고 보람에 죽는 존재입니다. 방학 때 봉사대로. 돈 내가며, 수고하며, 땀 흘리며 선교지로 농촌으로 봉사를 떠납니다. 얼마든지 방학동안 평안하게 놀며 시간 보낼 수 있는데도 스스로 선택하고 돈 내고 시간 투자하고 수고를 합니다. 왜냐하면 희생에서 보람을 얻고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군에서 근무할 때 어느 소대장이 전방 근무하다가 부하가 수류탄을 잘못 다루어 터질 위기에서 소대장이 부하들 살리려 자신이 덮쳐 스스로 죽었습니다. 

아까운 생명이 죽었습니다. 장례식 때 그 아버지가 모인 장병들 앞에서 인사를 했습니다. “내 아들아 나라를 위해 군복무하다 죽고 부하들을 살리려고 스스로 죽었으니 장하구나”하고 말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데도 보람있게 죽었으니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내 아들이 희생하였으나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생에 담겨진 의미입니다. 사람은 보람에 살고 보람에 죽습니다. 사람들이 그 보람 때문에 때로 기꺼이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 이룸입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부모의 희생은 대단한 희생입니다. 자기 몸을 상해가며 아이들을 낳습니다. 10남매를 낳은 어머니의 몸매, 얼굴, 피부를 보면 엉망입니다. 축 늘어진 할머니들의 젓을 보면 그것이 희생의 모습이고 흔적이고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아이를 낳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희생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뱀들은 다 알을 낳아 부화합니다. 

그런데 살모사는 유독 새기를 낳습니다. 살모사는 새끼를 낳을 때 자신의 배를 째고 새끼를 낳습니다. 그리고 새끼를 낳은 후 자신은 죽습니다. 미생물이지만 엄숙한 모습입니다. 자신이 희생하지 않으면 이런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연어도 자신의 몸 안에서 알을 모두 빼내고 자신은 껍데기만 남은 채 죽습니다. 그렇다고 살모사와 연어가 새끼배기를 주저하지도 않습니다. 그 일을 기쁨으로 주저하지 않고 행합니다. 이 세상의 엄숙한 일에는 모두 이런 희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또 모두를 살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희생은 반드시 열매가 열리고 효과가 주어집니다. 이 세상을 살리고 세우고 유지하게 하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잘 살고 있음은 우리 부모님 세대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내가 잘 나서 오늘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오늘 때로 젊은 세대들은 선배나 부모님 세대들의 수고와 희생을 부정하기도 하고 그냥 건너뛰려고 합니다.  아주 큰 배은망덕입니다. 경고망동 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이미 지난 시간의 결과요 열매임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이미 전 시간의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36년의 고난은 우리 조상들의 잘못이 있어서 당한 고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고 온갖 희생을 다했습니다. 

단재 신채호 같은 독립운동가는 매일신보 주필로 있을 때 일본으로부터 사임압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할 수 없이 사표를 던지고 북한 땅 정주 오산학교로 가서 아침에 세수를 하는데 뻣뻣이 서서 세수를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이광수가 보고 “무슨 세수를 그렇게 서서 하느냐“고 묻자 “나는 이 나라가 해방이 되는 날까지 허리를 굽히지 않고 서서 세수를 할 것”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 그 한사람이 서서 세수를 하였다고 이 나라가 해방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역사의 중요한 골목마다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에 이 나라가 해방된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사람들이 없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회피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모님 세대들처럼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익만 얻으려 합니다. 오늘의 평화는 지난날의 무명의 우리 선배들과 부모님 세대들의 수고와 희생의 열매로 오늘 이 나라된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오늘은 어제의 산물입니다. 오늘의 실패는 어제의 부주의 때문이고 나태함 때문이고 무책임의 삶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공은 어제의 수고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심지 않고 거두는 법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심은 그대로 거두게 되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성경의 법칙입니다.  

예수님이 희생당하셨습니다. 철두철미하게 희생당하셨습니다. 그 희생의 열매로 부활의 열매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나같이 순교로 희생해서 죽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열매가 되어 오늘 세계에 복음화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섬김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오늘 이 세상은 지난날 어떤 사람의 희생으로 오늘 우리들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어떤 분들의 희생 때문에 오늘 많은 사람들이 평안하게 열매를 따먹고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대다수 사람들은 몇 사람의 희생을 통해서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은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달려간다고 했다고 했습니다.(빌립보서3장14절). 십자가에서 부끄러움을 참으신 예수를 쫓아간다고 했습니다(히브리서12장2절). 내 동족이 예수를 알고 믿는다면 나는 저주받아 낙오되어도 바라는 바라고 했습니다. 멀게도 말고 오늘 현재 우리도 매주일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도 여러 사람들의 사전 준비와 봉사 때문입니다. 

매주 우리들이 이 장소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아침 일찍 나와 여러 사람들이 수고한 결과입니다. 몇 사람의 수고와 희생은 여러사람을 살리는 열매가 맺힙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그렇게 희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수고와 섬김과 희생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공짜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고도 없이 무임승차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고생도 수고도 없이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부실한 사회입니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의 사카가미 교수가 개미사회를 연구하였습니다. 개미는 다 부지런 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연구해 보니까 아니였습니다. 개미사회에도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20%였고 나머지 80% 는 빈둥거렸습니다. 빈둥거리는 개미들이 괘씸해서 제거하고 부지런한 개미 20% 만 남겨놓고 이제는 개미사회가 100% 모두가 부지런한 천국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그 20% 중에서 80% 는 또 빈둥거리고 그중 20%만 열심히 일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이 20%의 힘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공짜로 살아갑니다. 오늘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한 부류는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가고 또 한 부류는 빈둥거리며 살아갑니다. 사람 인자를 보면 한 변은 늘 기대고 있고 또 한 변은 평생 떠 밭치고 있는 형상입니다. 평안하게 기대고 있는 변이 길고 힘쓰며 떠받치고 있는 변이 짧습니다. 오늘 이 세상은 소수의 수고자들과 헌신 자들의 희생 때문에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희생이 시간이 지나면 많은 사람들의 평화로, 안녕으로, 번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이런 희생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희생은 시간이 흐른 후 건실한 열매가 맺힙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부모의 희생은 계산해 보면 눈물겹습니다. 옛날에는 자식들이 스스로 컸는데 오늘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이가 너무 공부를 하지 않으니까 붙잡고 “링컨은 네 나이 때 돈벌어가며 공부했는데 너는 다 주는데도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하니까 아이가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링컨은 아버지 나이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어요”라고 대꾸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들이 희생하다가도 또 계산해 보고 때로 포기하려고도 하고 그래서 용기를 잃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계산이 문제입니다. 아이를 낳는 일과 신앙의 일은 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인 희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주어야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복음화는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희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피 흘리고 죽임을 당했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이 땅에 복음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한 사회의 민주화는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미국의 민주화도, 노예제도 폐지도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는 희생과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피 흘림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가 오늘의 민주화를 이루는데도 1960년대 초부터 많은 사람들이 피 흘림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중동사태를 보니까 이제 중동에도 민주화의 첫 발자국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얼마의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인지 이제 시작입니다. 그리고 저 중국도, 북한도 이제 그 기운이 감도는 것 같은데 거기에도 희생이 있어야 뭔가가 이루어집니다. 누군가 희생이 있어야 그 사회에 민주화의 열매가 맺힙니다. 

주님의 요구 

16절을 보면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18절에서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였고 4장7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섬김이고 섬김은 희생입니다. 이 희생이 세상을 살리는 요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희생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희생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자발적이었고(요한복음10장18절) 스데반도 스스로 희생당하였고 12제자들 모두 스스로 기꺼이 희생당하였습니다. 그들의 그 희생을 통해서 오늘 이 세상이 살림을 받은 것입니다. 또 대가를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많은 대가가 필요합니다. 우선 평안함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헌신자들이 대부분 이 부분에서 멈추거나 주저하게 됩니다. 목회자들이 제일 힘든 것도 이 대가를 감수하는 일입니다. 목회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새벽기도하는 일입니다. 

목회자의 새벽기도는 연단이고 훈련이고 자기부정이고 대가를 감수하는 시간입니다. 이 일을 평생 하여야 합니다. 그 대가는 안락한 잠을 반납해야 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때로 우리의 꿈이나, 기대나, 명성이나, 평안한 삶을 포기하기를 요구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그것을 때로 포기해야 합니다. 그 포기로 인해서 누군가를 풍요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희생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사랑, 섬김, 희생을 강조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세상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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