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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적이 필요하다! (요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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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필요하다!  (요 6:1-15)
 
 
1. 사람들이 바라는 기적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기적은 많습니다. 건강을 잃은 사람들은 건강이 회복되는 기적을 바라고, 사업이 어려운 사람은 사업이 번창하여 일어서는 것을 바라고, 失職한 사람은 정년을 보장해주는 좋은 직장을 바라고,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은 이번 시험에서 좋은 성적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부자가 되어 있다든지, 마치 신데렐라처럼 정말 멋진 신랑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느 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죽은 아이를 보노라면 ‘일어나라!’고 외치고 싶고, 병든 사람을 볼 때면 ‘당장 나아라!’고 말하고 싶고, 걸음걸음을 힘들게 옮기시는 꼬부랑 할머니를 만나면 ‘똑바로 서세요!’라고 선포하고 싶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다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바람에 대해서 “그러한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서도 안 되는 자연의 법칙에 위반되는 현상들이라는 것을 제발 깨닫고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대신 참고, 견디며, 실력을 쌓고, 영업을 하며, 노력들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예, 한편으로는 정말 옳은 말입니다. 성경의 정신과도 위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왜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시며 능력의 하나님,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능력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발휘하십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기적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바라는 기적도 사실 그렇게 엄청난 것들이 아니고요.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작은 일도 놓치지 않으시고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의 삶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법칙이나 인간의 법칙으로는 안 되는 일이 창조주께서 개입하심으로 되는 것, 바로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성도의 삶에는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오병이어로 일어난 기적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오늘 본문은 기적의 기록입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은 헤롯 안디바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여겨 세례 요한에게 했던 것보다 더 심한 蠻行을 저지를 것을 아시고, 헤롯 안디바를 피하여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있는 벳새다로 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헤롯 안디바는 잠시 피할 수 있었으나 무리들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로 가신 것을 안 수많은 무리들이 거기까지 예수님을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이유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때문이었습니다. 보고 듣고 즐길 것이 없던 시대인지라, 기적을 보는 것만으로 놀랍고 신나고 즐거운 일도 없었기 때문이고, 그러다가 자신이 기적의 주인공이라도 된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을 것이기에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따라 그 먼 길을 온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이에 날이 저물었으며, 그 무리 중 대부분은 넉넉하게 먹을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이라 그동안 얼마나 굶었는지 알 수조차도 없는 형편에 그날 하루도 쫄쫄 굶었거나 아니면 굶은 채로 흩어져야할 처지였습니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몰라도 그래도 그날 하루 종일 주님을 따랐거나 혹은 주님과 함께 했기에 주님은 그들을 책임지려 하셨습니다. 그들이 배를 곯은 채 밤을 맞거나, 혹은 자기 집으로, 혹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 동네로 가는 것을 주님이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품에 있는 사람은 굶기지 않겠다.’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무리들을 먹여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5). 이 질문은 빌립과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할 목적으로 던지신 것이었습니다(6절). 이 질문에 대해 빌립은 무리들이 먹을 최소한의 식사에 해당하는 비용을 계산한 뒤, 예수님께 무리를 먹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 그는 무리들의 숫자를 어느 정도 파악한 후, 그들에게 겨우 허기를 면할 수 있는 음식만 준다고 해도 일반 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돈인 ‘이 백 데나리온’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필요하다는 것, 사실 당시 제자들은 무일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또 설사 그만한 돈이 있다 해도 수많은 무리들이 먹을 수 있는 빵이나 음식을 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그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이 이런 대답을 하자 제자 중 한 사람인 안드레가 나섰습니다. 8절에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라는 표현은 예상치 못했던, 혹은 기대치 않았던 일이라는 의미가 그 속에 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안드레의 답은 무엇입니까? 

9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안드레는 일반 평민들의 主食이었던 작고 납작한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도시락으로 가지고 온 한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 와있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던 유일한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적은 양의 음식으로 남자 壯丁만해도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말하기를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결국 ‘안 된다, 방법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理性的으로 合理的으로 따져본 결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빌립과, 적극적으로 찾아보니 뭔가 있기는 한데 그 역시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안드레, 그리고 그런 不可能의 상황에서 차라리 침묵을 지키거나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다른 제자들의 태도와 우리 주님의 자세는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10).” 누가복음 9장 14절에는 “오십 명씩 앉히라”고 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주님은 음식을 나누어주기에 편리하도록 50명씩 앉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후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셨습니다(11).”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축사하다”인데요. 이 말은 기적을 부르는 어떤 특별한 용어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식탁의 감사기도의 표현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일반적인 식탁의 기도를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것이고, 그렇게 기도하신 후, 한 아이의 한 끼 식사에 불과하던 오병이어는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 얼추 2만 명은 됨직한 그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도 남았습니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12,13).” 오병이어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셨으며, 무리들이 배부르게 먹고 남긴 것을 거둔 것이 그 기적의 재료였던 아이의 도시락 양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오병이어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의 보고입니다.

3. 기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이러한 오늘 본문에 대한 理解 혹은 解釋 方式이 있는데요. 그 중 두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1) 첫 번째는 굶주린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의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러한 일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해석이지요.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으시고 그것을 해결해주시는 분이지만, 주님의 진정한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님을 육신의 양식보다는 영혼의 양식,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으로, 즉 신령한 양식으로 우리를 채우시는 분으로 이해해야지 예수님을 그저 기적을 일으키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타당한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이 보인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14,15).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해 먼저 제자들을 배를 태워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혼자 산 속으로 피신하다시피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가버나움까지 따라온 무리들을 보시고서는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6,27).”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본문과 주님의 기적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먹고 배부른 문제로 주님을 찾는 것은 바르지 못한 태도이고, 주님께서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영적인 것, 영혼의 양식, 보다 신령하고 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을 추구하는 신앙이 바른 신앙이고 옳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2) 이와는 달리 오늘 본문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먼저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후, 당신께 나아온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인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문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우신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신 분이기에 사람들이 가진 배고픔과 경제적인 문제와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더욱 확실하게 갖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바라보는 두 번째 해석입니다.

이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첫 번째를 택하면 두 번째는 버려야 하고, 두 번째를 택하면 첫 번째는 버려야 할까요? 

3)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주님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표적, 이적, 혹은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奇蹟이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은 奇蹟을  “자연의 법칙이나 현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거나 나타나는 경우”,  “상식이나 보통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 놀랍게 느껴지는 일”, 또는 “ 기독교에서 神에 의해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不可思議한 현상”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자연법칙, 일반적인 원칙,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일이 일어난 것을 기적이라고 하는데, 성경에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그 대부분의 ‘기적’들은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100세의 아브라함과 90세의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은 일, 사렙다 과부의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계속 된 일, 먹지 못해 기진맥진한 엘리야를 까마귀를 통해서 먹이신 일,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치신 일 등과,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눈먼 소경을 보게 하신 일 등, 그 대부분이 실제적인 삶의 문제이고 육신의 일이었습니다. 

즉 일반적인 자연현상으로 일어날 수 없으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났고, 그것을 본 증인들이 다들 기적이라고 놀란 일들이 성경에 얼마나 많냐 하는 것이고, 우리가 믿는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성경에 기록된 것과 똑 같은 일들을 행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다만, 성경이 경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을 전부로 삼거나 기적이 신앙의 최종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 계속해서 또 다른 기적을 구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첫 기적을 경험한 그들에게 기대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기적이 가리키는 의미, 즉 그 기적이 화살표라면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적은 안내도일 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주시려는 것은 먹고 배부른 음식이 아니라 영생을 얻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저 현실적인 기적 그 자체에만 열광했을 뿐입니다.

성경의 이러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오늘 여러분의 삶에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여러분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오늘 본문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지 않고, 또 주님을 바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날 기적만 구하니 그것이 옳은 태도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믿으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러분과 동행하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기적을 구하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고, 따라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기적은 기적이 아닙니다. 온 우주와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 계신 흔적, 그 증거를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현실의 생활 가운데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기적은 당연히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기적이 필요하다

사실 신앙적인 면에서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정말 미련하고 둔하여, 잘 깨닫지 못하고, 잘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 주님에 대해서, 주님의 나라에 대해서, 주님의 뜻에 대해서, 잘 알 수 있게 해주고,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안내도가 필요하고요.  우리의 믿음과 믿음의 여정을 인도할 가이드가 필요하고,  우리가 최종적으로 믿고 바라보아야 할 것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안내도, 가이드, 혹은 화살표가 없으니까 세상사와 사람들 속에 갇혀서 믿음의 역사가 없고 주님을 제대로 證據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항상 주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믿음을 증진시키기 위한 기적이 필요했다면, 저와 여러분은 오죽 하겠습니까? 그런 믿음의 증거가 될 기적이 없이 무조건 “믿어라”, “포기하고 희생하라”, “성숙해라”고 강요하는 것은 여러분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안내도, 화살표, 혹은 가이드 없이도 주님을 믿고 성숙한 신앙에 이른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주님과 신앙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실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단히 존경스러운 분들이지요.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너무나 平凡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아니 平凡 그 이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하지요!

세계적인 설교자요 전도자인 ‘빌 브라이트’ 박사는 자신이 경험한 기적을 다음 세 가지로 간증했습니다. 그가 경험한 첫 번째 기적은 전도를 시작할 初期에 있었던 일입니다. 너무나 힘든 사정 때문에 485달러가 필요해서 급하게 그 금액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끝나자마자 자신에게 전도 받은 한 스위스 인이 500달러짜리 수표를 보내주었습니다. 두 번째 역시 전도 집회 비용으로 1만 달러가 필요해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와서 1만 달러를 이자 없이 빌려주겠다고 하면서,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사업을 축복하면 그 돈을 그저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 주셔서 1만 달러를 그냥 헌금했습니다. 그가 경험한 세 번째 기적은 큰 전도 행사를 계획하고서 그에 필요한 자금으로 110만 달러를 달라고 기도한 일로 인해서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있던 어느 날, ‘버드밀러’란 사람이 와서 “도움을 주고 싶은 데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습니다. 빌 브라이트 목사로부터 행사 계획을 다 들은 그 사람은 마침 자신의 사업체 하나를 정리한 돈이 있다고 하면서 선뜻 110만 달러를 헌금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하여 빌 브라이트 박사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더 깊어지고, 신앙은 더 성숙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전도 사업을 더욱 자신 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D. J. 칸트’라는 열차 기관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한 목사님이 이 칸트 씨가 통행하는 역 부근의 별장에 와서 묵게 되었습니다. 칸트 씨는 그 부근을 지날 때마다 경적을 울렸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사전에 약속한 신호로서 “목사님,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라는 뜻이었고, 자신도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는 신호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목사님이 급한 일이 있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열차에 사고가 났습니다. 이 사고에 대해 신문에 기사가 났고, 그 기사 가운데 다음의 문구가 있었습니다. “상당히 큰 사고였다. 

그러나 한 사람도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이것은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다.” 이 기사를 본 목사님은 칸트 씨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목사님에게도 동시에 똑같은 성경 구절과 내용이 담긴 칸트 씨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 가운데는 “목사님께서 기도해주신 덕택으로 한 사람의 사고도 없었습니다. 신문 기자들이 기적이라고 평했습니다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지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계신 주님을 믿으십니까? 주님의 능력과 위대함이 성경 그대로임을 믿으십니까? 주님의 능력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도 감함이 없이 그대로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적이라고 하니까, 무슨 특별하고 대단한 것, 금방 병든 이들이 고침을 받고,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하게 되고, 어느 누구도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술술 풀리는 것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저는 그러한 기적도 분명 오늘 우리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일상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곧 기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흔적, 그 자취가 나타나는 것이 기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성도에게 기적은 기적이 아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작은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약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서도, 처음의 양보다 더 많은 열 두 광주리를 남게 하신 주님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지를 전하고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게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육신의 양식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소중한 진리를 가르치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을 맛본 사람들은 그 기적이 가리키는 진리를 외면한 체, 기적 그 자체만 요구하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기적이 가리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 기적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적을 구하는 신앙은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기적이 신앙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죠. 보다 영적이고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믿습니다. 
병 낫기보다 병을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병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기적일 수 있습니다. 
배부르기보다 배고픈 자체를 이겨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픈 중에도 힘차게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기적일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문제를 받아들임으로서 성숙해지는 것이 기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무조건 믿고, 무조건 따르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험악하고, 우리 자신은 너무 약합니다. 이런 우리가 주님을 보다 더 잘 믿고, 주님의 뜻을 더 잘 알아 그것을 실천하고, 이 땅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성경의 주님이 오늘도 그대로 살아 계신 것을 경험해야 더 확실한 믿음의 자리에 설 수 있고, 세상과 사람 앞에서 더 담대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격언에 “기적은 기적을 믿는 이에게만 나타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B. 비렌슨이라는 분 역시 “기적은 그것을 믿는 자에게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주님과 주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과 그런 곳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기적이 일어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지금 기적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참으로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 자리는 자연과 초월, 일상과 기적의 한계가 사라지지 않을까요? 주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참 믿음을 갖게 합니다. 이런 놀라운 복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합니다. 또한 이러한 복은 우리로 하여금 생의 어떤 고난과 절망이 다가오더라도 극복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적을 경험함으로서 주님이 참으로 살아 계시고, 오늘도 여러분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임을 체험하시고, 그로 인하여 세상에서 승리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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