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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신경(1) :창조주 나의 하나님(창 1:1, 창 1: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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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1) :창조주 나의 하나님(창 1:1, 창 1:26~2:3)
  

길게만 느껴지던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내일이면 춘분입니다. 교회 절기로는 사순절에 접어들었습니다. 사순절(四旬節 Lent)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로 부활절 직전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입니다.3월 9일4월 23일) 사순절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영적인 회복기’입니다. 평소에도 신앙생활 하지만, 다시 한 번 십자가 앞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 자세를 새롭게 다지는 기간입니다. 여러 말씀을 묵상해야 되겠지만, 특별히 이번 사순절에는 사도신경 강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재정립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신경(使徒信經 The Apostle's Creed)은 우리가 교회에 처음 나오자마자 예배 시간마다 따라하면서 자연스레 암송하게 된 아주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너무 익숙한 나머지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습관적으로 말하고 지나가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심하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은 이렇게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 되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사도신경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신경’(Creed)이란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신조(信條)인데, ‘우리가 믿는 내용’이란 뜻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12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작성해서 베드로가 로마로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좀 다른 말을 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이 공식적으로 작성한 게 아니고, 마치 꿀벌들이 갖가지 꽃들로부터 꿀을 모아 오듯이 사도들의 가르침이 전해져 오면서 오묘하게 요약된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 중에서 엑기스라는 뜻에서 ‘사도신경’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겁니다. 좌우간 사도신경은 매우 귀한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도신경의 내용만 확실히 믿으면 분명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느 대목 하나라도 믿지 못하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사도신경을 그대로 고백해야 참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구조를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i)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 - 전능하사 ~ 믿사오며, ii)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 - 그 외아들 ~ 심판하러 오시리라, iii) 성령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고백 - 성령을 믿사오며 ~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마지막 ‘아멘’은 무슨 말입니까? 본래 히브리어로 ‘진실로’ ‘옳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신경 전반을 고백하면서 “이것은 참 진리이며 내가 진정으로 믿습니다”라고 다짐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첫 시간으로, 제일 먼저 나오는 첫 문장을 살펴봅니다. 
  

[1] 내가 믿사오며 : 입술의 고백을 넘어 삶의 체험으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우리 말 사도신경에서는 “내가 믿사오며”가 문장의 맨 뒤에 나오는데, 원문 상으로는 맨 앞에 나옵니다. 영어 사도신경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I believe in God ... ”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게 왜 중요합니까? 사도신경의 내용이 아무리 귀하다 할지라도 만일 내가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은 개인적입니다. 단체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부부가 있었는데, 주일 날 아내가 남편에게 교회 가자고 말합니다. 그러자 남편이 “당신이 우리 집 대표로 갔다 와!” 그럽니다. 이렇게 매번 빤질거리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부부가 임종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천국 문에 이르렀는데, 천사장이 검문합니다. 신원 확인을 마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대표로 부인만 들어오세요!” 신앙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라는 겁니다.  

롬10:9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신앙은 마음속에서 시작되지만, 입술의 고백을 넘어 삶의 체험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 ” 다윗이 위기일발 상황에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몸소 체험한 후에 지은 시입니다. 그는 감격하는 가운데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것을 권고합니다. 체험을 강조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지정의(知情意)에 걸친 전 인격적 체험입니다. 예를 들어, 운전 시험에 합격해서 면허를 받아도 실제로 운전하지 않으면 장롱 면허로 썩는 것처럼 아무 소용이 없죠.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할 때 더욱 깊이 알 수 있는 실천적 진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는 사도신경도 한 구절 한 구절 다 믿어지고 고백되고 체험되어야 마땅합니다. 부디 이 말씀 하나하나가 저와 여러분 마음속에서 믿어지고, 입술로 진실하게 고백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더 나아가 삶에서 체험됨으로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풍성해 지기를 소원합니다. 
  

[2]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 창조주 나의 하나님  

그러면 무엇을 믿는가? 그 첫 번째 믿음의 내용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① 하나님의 존재 :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 전에 우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게 순서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도 그렇고, 성경도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 설명하거나 논증하지 않습니다. 다짜고짜 하나님의 존재를 선언합니다. 성경의 첫 머리인 창1:1을 보십시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무런 전제도 설명도 없이 그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이러고저러고, 그러니까 분명히 있는 거 맞지?”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한다면 오히려 우스꽝스럽죠.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나는 네 아빠다. 봐라! 눈도 닮았지 코고 닮았지, 특히 발가락을 봐라. 쏙 닮지 않았니? 그 중에서도 새끼발가락은 아주 빼다 박은 것 같잖아! 그러니까 내가 네 아빠야, 알았지?” 이렇게 말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부모 자식의 관계가 말이 필요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는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선언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설명해 달라고 한 적이 있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러 가야 되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하나요? 하고 묻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뭐하고 대답하시죠? 출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Who I Am) ...” 간단히 말하면, “나는 나야!” 이런 뜻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겁니다. 
  
② 창조주 하나님 :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yhila)으로 복수형입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못합니다. 믿는 자들은 답답하니까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창조냐? 진화냐? 논쟁이 계속되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다고. 왜냐하면 과학자들 중에 신자도 있고 불신자도 있는데, 이 말씀은 과학적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차원입니다. 인간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창조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됩니다. 인간이 이성의 능력으로 창조가 아니라 진화라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입니다. 물론 신자들은 맹목적으로 믿어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창조가 이성의 범주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반이성적이 아니라 초이성적입니다. 과학자들이 독실한 신자가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20세기 최고의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학을 모르는 종교는 장님이며, 종교가 없는 과학은 불구이다” 그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지만 과학자로서 신앙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초웡ㄹ하는 세계를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학자 중의 한 분인 정근모 장로님은 심지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 이 말은 그의 간증집 제목이기도 하죠. 그분은 과학기술처 장관 두 번이나 지내고 세계원자력기구 의장을 지낸 분입니다. 24세에 플로리다 공대 교수가 학생들보다 어린 ‘꼬마 교수(Boy Professor)’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이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을 이렇게까지 드러내는 것을 보면 창조냐 진화냐 하는 논쟁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창조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신론자인 터키인 학자가 탐사를 위해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과 동행했는데, 해가 질 무렵 그들이 아름다운 석양을 보며 찬양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터키인이 빈정거리면 물었습니다. “당신들 뭐해요?” “기도하죠.” “아니, 누구에게?” “당연히 하나님께 하죠.” “하나님? 눈으로 봤어요? 손으로 만져 봤어요?” “그건 아니죠.” “참 어리석군요!” 다음 날 아침 유식한 터키인 학자가 천막에서 나와 말했습니다. “어젯밤 자는데 밖에 낙타 한 마리가 나타났어요. 나에게 해를 끼칠까봐 혼났네. 어디로 갔지 ... ?” 

그러자 아프리카인이 말했습니다. “당신 낙타 봤어요? 만져 봤어요?” “아뇨.” “참 이상한 분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알아요?” 그러자 터키인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 “이것 보시오! 천막 주위에 낙타 발자국이 이렇게 많지 않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프리카인이 마침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을 가리키며 소리쳤습니다. “저것 좀 보시오! 바로 저게 하나님의 발자국이란 말이요. 이래도 하나님이 없다고요?”그러나 터키인의 얼굴이 새빨개졌습니다.   

③ 전능하신 하나님 :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전능하신 분입니다. 창조 자체가 그 사실을 증거합니다. 창조한다는 단어가 특이합니다. 히브리 원어로 바라(ברא)인데, ‘무에서 유를 만들다’(ex nihilo) 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인간은 엄밀히 말해서 창조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유에서 유를 만드는 데 불과합니다.   

창조를 통해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는 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만드실 때마다 성경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창조 전 과정이 완성된 후 성경은 뭐라고 증거합니까?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 말씀은 창조의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인 동시에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 가운데 함께 해 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3] 전능하신 하나님과 인간 : 축복과 영광의 하모니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27절~28절을 보면 인간 창조의 기록이 나옵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뜻도 있지만, 하나님과 사랑으로 교제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 교제 가운데 축복과 영광의 하모니가 이루어집니다.   

① 인간에게 축복 :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축복하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2:2절~3절을 보시죠.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삶을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한 게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이 창조된 후 제일 처음 맞이한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이 인간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휴대폰을 사용한 후 충전합니까? 아니면 충전한 후 사용합니까? 당연히 충전 후 사용하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안식하며 영적 은혜를 받은 후 살아야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후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안식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이 땅이 오신 겁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 은혜로 안식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킵니다.(마28:1, 계1:10 참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죠. 이게 바로 구원의 완성이요 ‘재창조’입니다. 그러므로 안식 후 첫 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일로 정하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주일입니다. 달력을 보세요! 제일 먼저 나오고, 빨간색이잖아요! 이 날에 먼저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적인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 안에 거하며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품 안에 있으면 평안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불안합니다. 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시121:1~2,7~8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면 마음 턱 놓입니다. 반대로 세상을 바라보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지금 일본 대지진 때문에 난리잖아요. 속히 복구되고, 무엇보다 방사능 피해가 없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이번에 놀라운 것은 우리 한국인들이 예전과 달리 일본을 그렇게 염려하면서 기도하고 후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일본인들의 침착성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다른 데서 사재기를 하고 난리입니다. 요오드 성분이 방사능 피폭 예방과 치료에 좋다나, 그래서 중국에서 홍콩에서, 우리나라에서 요오드 구하려고 야단입니다. 소금에 그 성분이 있다고 소금 사재기도 합니다. 그런다고 안전한가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앞으로 이런 일들은 언제 어디서나 터질 수 있습니다. 그 뿐인가요? 세상 곳곳에 전쟁과 난리,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 등이 줄을 잇잖아요. 세상에 사는 동안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안전지대를 찾기는 해야 되는데, 어딜까요? 전능하신 하나님 품 안입니다! 시46:1~3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 거하며 늘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따라가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순종의 삶입니다. 

잠3:5~6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또 신28:2을 보면 아란 말씀이 있습니다. 신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부디 전능하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고 늘 평안을 누리시고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② 하나님께 영광 :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피조물의 책임이요, 특히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그 중에 우리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나의 행동거지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실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이 될지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하나님께도 효도해야 합니다. 

프로 축구 이영표 선수 미니 홈피에 들어 본적이 있습니다. 미니 홈피 이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효도하자!” 축구를 하는 것도, 모든 삶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고백입니다. 참으로 귀한 신앙입니다.   

요즘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교회 직분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분위기가 아닙니다. 때로는 창피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봤어요! 우리도 그런데, 하나님은 얼마나 창피하실까! 우리도 자식 기르다 보면 그들 때문에 자랑스럽고 뿌듯할 때도 있지만 부끄럽고 창피할 때도 있잖아요. 영광스런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이 잘못하는 것 때문에 망신을 당하시는 겁니다.(롬2:24 참조)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흔히 안티기독교인들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인터넷에 들아 가면 아예 밥 먹고 그런 일만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화도 나고 엄청 속이 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안티기독교인이 아닌 겁니다. 그들은 본래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진짜 안티기독교인은 교회 안에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니까 안티기독교인인 겁니다.   

이런 사실을 잘 인식하고 저와 여러분은 효자 크리스천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그렇게 살기만 하면 세상에서 걱정할 게 없습니다! 전능하신 한님, 창조주 나의 하나님이 내 인생을 평생 보증해 주십니다. 아니, 영원한 생명을 보증해 주십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라는 ‘통치’, 의는 ‘바른 뜻’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세상 살 동안 필요한 모든 것들)을 더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평생 보장이요 영원 보장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고, 전능하신 창조주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체험하며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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