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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영적각성 (엡 5: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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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영적각성 (엡 5:14-21)  

  
한국교회 안에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분당중앙교회에 부족한 제가 와서 말씀을 전하게 돼서 하나님께 영광이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시 최근의 어려움을 회복하고 한국교회 안에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많은 분들이 기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존귀하게 다시 쓰임 받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격려와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사랑과 은혜를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이 시간도 주 앞에 나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우리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간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우리 가운데 임재 해 주시옵소서. 참된 교회의 회복이 우리에게 있게 해 주셔서 하나님이여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우리 개인을 통해서 영광을 받아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후 62년 로마의 감옥에 갇힌 바울은 자기가 3년 6개월 동안 목회를 하며 생명을 바쳤던 에베소교회에 마지막 유언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에는 교회가 무엇인지 그 신학적 성경적 토대가 무엇인지를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주석가 스캇은 헨델은 무릎을 꿇고 할렐루야를 작곡했고 바울은 꿇어앉아 이 장엄한 서사시를 기록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에베소서 5장 14절~21절>이 에베소서의 결론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추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의 결론과 같은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의 이 유언과 같은 말씀이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와 하나님이 세우신 몸 된 교회에 주시는 귀한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귀한 말씀의 서두는 <14절>에서 이 본문을 풀어가는 열쇠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추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바울사도는 로마의 감옥에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죽은 사람, 한 사람은 잠자는 사람, 또 한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죽은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다 죽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깨어있는 사람은 세월을 아껴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며 무엇보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잠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잠자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은 사람들과 방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 한 사람은 잠자는 사람, 둘 중에 하나일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자는 사람처럼 깨어있는 사람도 깨어있는 사람처럼 잠자는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잠자지 않는다면 나는 깨어있는 것이고 내가 깨어있지 않다면 나는 잠자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바울사도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다고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에게는 깨어있는 사람, 잠자는 사람」 
저는 이 시간 우리 모두 저를 비롯해서 자문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깨어있는 사람인지, 나는 잠자는 사람인지. 
우리 모두 깨어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깨어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분명하고 어렵지 않게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5절>말씀에 보면 ‘그런 즉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기 위해서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시대에 얼마나 악하고 있습니까? 
일본의 쓰나미로 인해서, 지진으로 인해서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리비아에서는 지금 엄청나게 민주화투쟁 속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주님께서 말세에 주님이 오실 때에 있을 징조들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으로 둔감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가 악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더 세월을 아끼며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될 줄로 줄 믿습니다. 여기에 세월을 아끼라고 하는 말은 기회를 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하는 말은 보상하여 사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존 크리소스톰이라고 하는 황금의 입이라고 알려진 초대교회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선명하게 해석합니다. 

어떤 부잣집에 강도가 들이닥쳐서 시퍼런 칼을 주인의 목에 들이대면서 “너 가진 것 다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라고 얘기했을 때 이 집주인은 가장 소중한 목숨을 사기위해서 자기가 갖고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주지 않겠느냐?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하는 영원한 가치, 소중한 가치, 아름다운 가치를 위해서 덜 가치가 있는 세상의 것들을 아낌없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멘 이십니까? 
“아멘”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사기위해서 오히려 영원한 가치인 믿음을 아낌없이 주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 아내도 이와 같은 모습 때문에 섬뜩 섬뜩 제가 깜짝 놀라고는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세월을 아꼈던 한 사람을 제 주변에서 만나고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연구실에서 일의 발표를 하는데 학술세미나 발표를 할 때에 정말 좋은 사람을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연락된 분이 한 분 계셔서 그 분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동료들이 혹시 그분이 교회는 다니느냐고 물어봐서 저는 당연히 다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져서 제가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전화를 받으셔서 “혹시 박사님, 교회를 다니시나요?”물어보니까 그 분이 왜 물어보냐고 그러시더라고요. “궁금해서 여쭤봅니다.”그랬더니 그 분이 “예, 다니기는 다니는데 별로 신앙이 없어서요.”그렇게 얘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교회는 다니시는 게 확인이 되어서 “예, 알았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분이 세미나 발표를 하러 오셨는데 칠십이 넘으신 분이 가방에다가 본인이 쓰신 영어책을 한 아름 가지고 오셨어요. 저는 그 분이 그렇게 많은 영어책을 쓰신 유명한 학자인지-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그 분이 책을 다 기증하시고 세미나를 인도하시는데 칠십이 넘으신 분이 원고도 보지 않고 자기 입장을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제시를 하는데 저를 비롯한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큰 도전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 젊은 학자는 그 분의 견해에 동의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분의 강의를 듣고 설복을 당해서 그 분의 입장을 따르는 일도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끝나고 그분에게 적은 사례비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배웅을 하는데 극구 안 받겠다는 것을 작은 사례비라고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잠시 후에 교수들이 함께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한 교수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실, 미국 유학시절에 저분과 함께 같이 같은 교회를 섬겼습니다. 저분은 압도적인 표로 장로 피택을 당했지만 본인은 자격이 없다고 평신도로 그 교회를 섬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뿐만 아니라 그 교회가 속한 그 시내에서는 그 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가 얼마나 그 분에 대한 존경이 배나 생겼겠습니까. 스스로를 평가할 때는 명목상의 신자지만,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는 신자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본받고 싶은 사람,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따라서 세월을 아끼며 성실하게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위해서 시간을 아끼며 바쳤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세월을 아끼며 기회를 사며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속량하여 살 때에 우리 하나님은 손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존귀한 당신의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영적으로 깨어서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 존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17절>말씀에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깨어있기 위해서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라고 하는 말속에는 내 뜻이라고 하는 게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심지어 목사가 되고 그리고 교수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제 안에는 내 뜻과 하나님의 뜻 중에서 제 뜻을 따르려고 하는 때가 너무 많은 것을 제가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바울사도도 자기 안에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갈등이 있다고 이 바울사도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과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 앞에 존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잔을 놓고 그는 하나님 앞에 깊이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이 사명, 그가 구속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이 잔을 져야 된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완전한 인간이신 주님은 십자가의 잔을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속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사건, 십자가에 죽어서 인류를 구속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던 그 주님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때문에 그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고 매일 주기도문에서 기도하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어땠습니까?바울사도는 주님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다음 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로마서 1장~11장>까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교리를 완벽하게 진술한 다음 <12장>에 들어가서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주님께서 바울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갔던 그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끌어져 왔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런 사람이었고 요한 켈빈이 그러한 사람이었고 한국교회의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훈 목사님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이 진리를 깨달은 다음 면죄부나 세상의 모든 것들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구원의 부패한 중세교회를 향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고민하고 갈등하고 번민하고 내 보신을 생각할 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것인지 그는 고민 고민을 하다가 1517년 10월 31일 자기가 믿는 바 95개 조항을 잘 적어서 비텐베르크 교회의 성문에 내건 것입니다. 라틴어로 내건 것은 토의를 위해서 내걸었던 것입니다. 그 작은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지 그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빌립 샤프의 말대로 95개 논지는 복사되고 번역되어 마치 천사의 날개를 빌린 것처럼 몇 주 만에 프러시아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때에 하나님은 마틴 루터를 위대한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주변의 동료들이 감동을 받고 멜랑토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개혁의 대열에 합류하고 그 종교개혁은 하나의 요원의 불길처럼 프러시아와 유럽 전역으로 이제는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이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한 사람,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뜻에 사로잡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비범한 역사를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발발한 지 4년 후 1521년 4월, 그는 자기의 가르침 때문에 보름스회의에 출두하라는 출두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소환장을 불태우고 그러면서도 거기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왜냐하면 존 푸스라고 하는 한 개혁의 인물이 신분의 보장을 받겠다고 하면서도 화형을 당했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문제를 놓고 자기의 보신을 생각할 것인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할 것인지 그는 고민을 하다가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친구 슈팔라틴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가지 말라고 하는 그 슈팔라틴에게 “지붕위의 기왓장들만큼이나 많은 악마들이 기다리고 있다하여도 나는 보름스로 가고야 말겠네.” 그리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보름스로 갑니다. 
그 회의장에 황제, 그리고 특사, 대주교, 공작, 후작, 백작... 수많은 사람들이 다 모인 가운데 에크라고 하는 한 대주교가 앞에 나와서 루터의 25권의 책을 쌓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책이 당신의 책인가?” 
“그렇다.” 
“이 모든 책에 있는 가르침을 철회할 의사는 없는가.” 

하루만 여유를 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루터가 마음에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에크가 25권의 책을 다 쌓아두고 라틴어와 독일어로 당신의 것이라고 인정한 모든 책들을 방어하겠는가 아니면 일부분을 철회하겠는가라고 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성경의 증언에 의해 또한 명백한 논증에 의해 논박되거나 정죄되지 않는 한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말씀에 정복당해있고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양심에 속박당해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도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에 어긋나게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안전하지 않고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Here I stand 라고 하는 그 유명한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필립 샤프의 말대로 루터의 이 선언은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루는 불후의 위대한 선언으로 작용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개혁의 이상에 동조하고 함께 생명을 바치며 그럴 때 30년 전쟁이후에 1648년에 루터의 이 종교개혁은 유럽의 개신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고 그 신앙의 유산은 우리에게까지 넘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하는 존 캘빈은 어떻습니까? 
그는 젊음을 불태우며 제네바를 위해서 온 개혁을 다 생명을 바쳐 했지만 그는 제네바로부터 추방을 당합니다. 1541년 그를 다시 불렀지만 그는 가야될 것인지 말아야 될 것인지 주저합니다. 자기를 추방했던 그곳에 다시 불렀을 때 그는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친구 비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이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이 도시를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이 도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산적해 있는 수많은 개혁의 과제 앞에 자기의 몸을 먼저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그 뜻을 이루겠다고 하는 그 부르심에 자기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훗날 시편의 주석에 그날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비록 그 교회안위가 내게 너무나 소중해서 그것을 위해서라면 아무 어려움 없이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소심함 때문에 나는 내가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질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을 생각해내었습니다. 그러나 의무감이 나를 압도하여 결국 나는 강탈당했던 내 양떼들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슬픈 눈물 커다란 근심과 불안 속에서 이런 결단을 하였습니다. 이 일에 주님이 나의 증인이십니다.’ 

어쩌면 우리와 평범한 칼빈 자기의 보신을 생각하고 자기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을 그가 거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로 다시 돌아갑니다. 캘빈이 순종하고 제네바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이 제네바를 얼마나 위대한 개혁의 유산으로 우리가운데 남길 수 있도록 역사에 사용하셨습니까? 

존 녹스는 그가 제네바에서 있는 동안 가장 완벽한 개혁을 배우고 자기의 스코틀랜드로 가서 스코틀랜드에 다시 종교개혁의 불을 지피게 되어서 장로교회의 그 아름다운 유산을 오늘날까지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제네바야 말로 사도시대에 가장 완벽한 학교라고 예찬을 했습니다. 
주의 뜻을 따르면 손해처럼 보이지만 축복의 길인 줄로 믿습니다. 
저를 따라서 하시죠. 
“주의 뜻을 따르면 손해처럼 보이지만 축복의 길이다.” 

저는 우리 모두와 하나님이 세우신 몸 된 교회가 주의 뜻을 따르는 것, 이전보다도 더 나라와 민족과 세계선교를 위해서 존귀하게 쓰임 받는 역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의 뜻을 따를 때에 가장 평범한 사람을 통해서 비범한 역사를 이루어 가셨던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한국교회사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 한 사람을 꼽는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주기철 목사를 꼽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 반대 때문에 순교했기 때문에 그를 꼽는 것은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생동안 목회에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완벽한 주의 뜻을 따르는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1925년 12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산의 초량교회에 부임을 합니다. 사실 부산의 초량교회는 문제투성이의 교회였습니다. 아무도 가기를 원치 않는 교회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산 초량교회에 가서 백 명 남짓한 교회를 얼마 후에 삼백 명으로, 그리고 얼마 후에는 한국교회가 주목하는 교회로 만들어놓습니다. 어느 정도 목회에 안정을 기하고 있을 때에 마산 문창교회가 위기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선배들이 마산 문창교회는 주기철 목사가 가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조언도 듣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마산 문창교회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1931년 마산 문창교회에 가서 그는 갈기갈기 찢어진 마산 문창교회를 다시 하나씩 엮어서 얼마 후에 한국교회가 주목하는 교회로 만들어놓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신사참배가 한국에 몰아치면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에까지 신사참배의 요구가 강하게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후임자로 주기철 목사님을 모시고자 조만식 선생을 보냅니다. 조만식 장로의 손을 잡고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평양에 와서 그는 위대한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센터로 산정현교회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 소문은 한국교회에 퍼지게 되면서 수많은 의식 있는 사람들이 신사참배의 반대운동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 때문에 8년 후에 순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순교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그 의지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역을 이루었는지 그의 생애를 볼 때마다 도전과 그리고 우리 신앙의 옷깃을 여미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랐을 때에 하나님의 뜻은 그를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사용해주신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그랬고 존 캘빈이 그랬고 그리고 주기철 목사가 그랬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영적으로 깨어있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은 이제는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매너리즘에 빠진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 성령충만은 그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옥한흠 목사님 책을 읽다가 옥한흠 목사님이 교경협 목사님들을 모아놓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종이하나를 주고 가장 필요한 가장 자기가 소원하는 기도제목 하나를 응답해주시겠다고 우리 주님이 종이를 나눠준다면 그러면 뭐라고 쓰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진 다음 자기는 주저하지 않고 성령충만이라고 쓰겠다고 하는 그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이 성령충만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딱 한 가지 기도제목을 응답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게 성령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을 때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면 죄의 유혹과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충만을 받기 이전과 이후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모세의 뒤를 이어서 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았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쭉 읽다가 <민수기 27장 18절>과 딱 만났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왜 모세의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를 후계로 삼았는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에 감동되었다고’ 라는 말은 a men in whom is the sprite-성령이 거하는 사람, 신약의 표현을 빌린다면 성령충만한 것입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게 아니라 성령의 충만을 받았기 때문에 모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의 사회와 경제가 심지어 종교와 왜 문제입니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지도자로 나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준비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서 성령충만을 받아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성령충만은 명령형으로 쓰였습니다.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복수형으로 쓰였습니다. 한 사람만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야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동태로 쓰인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사모할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성령충만을 우리가운데에 주시는 것입니다. 명령형이지만 현재형으로 쓰인 것입니다. 이 말은 반복적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한 번 성령충만을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성령의 충만을 가지고 사모하다가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말씀과 만났습니다.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의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정립된 우리에게 성령이 우리 안에 내조하시지만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제가 보다가 삼위일체를 완벽하게 정의한 것을 보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성령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Holy ghost it's early trinity in from the father and the sun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어제도 나오시고 오늘도 나오시고 내일도 나오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면 그 성령은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음란과 타락의 도시 우상숭배의 도시 수많은 문제들이 있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에베소서의 에베소 교회는 성령의 인치 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간구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이 우리 안에 내조하시지만 우리는 다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우리가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비결은 없지만 그래도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사모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 없는 부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말대로 성령충만은 없는 존재에는 부흥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성령충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흥의 계절이 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 기도하는 게 아니라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구하는 대로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간절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명령하기 전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먼저 술 취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 가리었던 죄의 관계-이것을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충만을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성령충만을 놓고 간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가리었던 죄에 대한 장벽을 우리가 끊어버려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때에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에 담배를 피웠는데요, 너무너무 담배가 인이 박혀서 학교까지 가지고 가서 들켜서 점심시간에 얼마나 선배한테 맞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선생님한테도 얘기를 못했어요.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가지고 그런 거라서. 
담배를 끊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래도 학교를 가면 공부를 못하지 않았으니까 모범생이라고 하고 교회가면 열심히 교회를 다녔으니까 그런데 이 담배문제가 제게는 너무 큰 걸림이 되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용기를 내고 담배를 끊었습니다. 담배의 근원은 대단히 고집이 세더라고요. 밤마다 담배피우는 꿈을 꾸는데 그래도 그 이후에 담배를 제가 끊었습니다. 하나님이요, 담배 끊는 것 하나 기뻐하시더라고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데 그 이후에 손을 잡고 저를 인도하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렸던 우리 각자의 이 담이 있습니다. 이 담을 헐 때 우리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상의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 주님께서 주시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갈 때 세상은 어떠한 유혹에도, 어떠한 유혹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들이 너무도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 교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데 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은 성령충만할 때에 자기의 두 아들 동신과 동인을 살해했던 그 아들을 양자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피터 바이엘하우스가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 보네프만 유명한 줄 알았지 이렇게 한국에 유명한 목회자가 있는 줄 몰랐다고 그래서 그걸 가지고 독일어로 번역해서 독일어로 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령 충만할 때에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에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에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 이 분당중앙교회에 왔을 때에 예배를 드리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영적으로 깨어있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다시 왔을 때에 얼굴에 수심이 가득차고 참 여러분들이 예배드릴 때에 힘이 없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깨어있으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십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 예배가운데 놀랍게 임재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세 가지 수단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말씀과 기도와 섭리입니다. 이 세 가지 외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수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한데 녹아있는 게 예배입니다. 

그래서 1541년 요한 켈빈이 제네바로 다시 3년 동안 시트라우스 분교에서 유배생활을 마친 다음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을 때에 그가 제일먼저 단행한 게 예배개혁이었습니다. 그의 기록에 보니까 어느 날 ‘나는 이번 주에 열일곱 번 설교했다. 주일날 세 번 예배를 드리고 평일에도 세 번 예배를 드리고 일주일 내내 예배가 삶이었고 삶이 예배였습니다. 그런데도 제네바가 굶어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외보의 말을 빌린다면 제네바가 자본주의와-여러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켈빈주의가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로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일주일동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의 사업이나 가르침이나 어떤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와 총명과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어떤 교수 한 분이 예배를 드릴 때에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듣는 것을 적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수첩에는 반이 딱 나누어져서 왼쪽에는 목사님의 메시지를 쭉 듣고 오른쪽에는 그 메시지를 어떻게 자기 분야에 적용할 것인가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메시지를 쭉 듣다가 보면 어떻게 내 분야에 글을 써야 될지, 어떻게 전개해야 될 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는 거예요. 그 글을 통해서 열심히 하다가보면 인정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예배를 회복시켜 준다고 그랬습니다. 예배의 진정한 회복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우신 은혜 세상에서 일주일 동안 살 수 있는 지혜를 예배를 통해서 공급받는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가운데 다시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은혜가 있습니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하나님께 감사하며... 
여러분 감사가 회복되는데요, 감사에는 ‘항상’과 ‘범사’가 늘 따르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게도 도전이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9년 11월 21일 제가 작은 병원에 대장내시경을 받았을 때 의사가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아시죠? 
제가 아내에게 전화했더니 아내가 흑흑 울더라고요. 저 때문에 우는 건지 자녀들 걱정이 돼서 우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 아내가 울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연세대 병원에서 대장 내시경을 받으니까 김원호 선생님이 “제가 좋은 외과 의사를 소개할 테니까 수술합시다.” 암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고요. 

제가 이강영 선생님을 만났더니 이강영 선생님이 “들으셨지요? 암입니다. 수술하십시다.”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혹시 모르니까 가슴도 한 번 촬영해보자고. 그리고 가슴을 촬영하고 그 다음날 결과를 보러갔더니 이강영 선생님이 필름을 쭉 보시더니 여기 하나 이상한 게 있는데 혹시 이게 암이 아닐 수도 있지만 한 번 확인해보는 게 좋겠다고 흉곽외과 그 분을 소개하는 거예요. 그래서 또 가서 그분 앞에 이렇게 섰더니 그 분이 이렇게 필름을 보시더니 암이 아닐 수 있지만 100% 암입니다. 
난 이런 진단은 처음이에요. 암이 아닐 수도 있지만 100%암이라고. 
앞에는 위로해주려고 한 거고 뒤에는 의사로서 소신 있게 진단했던 것 같아요. 
제가 하루아침에 대장암과 폐암이 생긴 거예요. 

제가 이강영 선생님을 뵈러갔더니 혹시 모르니까 전신페트를 한 번 찍어보자고. 
제가 어떤 기도가 나왔겠어요. 
‘하나님 대장하고 폐 두 개는 제가 수용하겠는데 하나님 더는 아니잖습니까?’ 
페트를 찍고 다른 데는 이상이 없는데 위로를 주신 게 있어요. 
그것은 드물지만 폐와 대장이 전이된 게 아니라 독자적으로 생긴 거 같다고 위로를 주셨어요. 제가 수술하고 회복되어서 학교에 다시 강의를 하고 또 이 단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지만 우리가 힘든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감사의 조건을 헤아리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더 큰 감사가 예비 돼 오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많이 어렵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어려운 가운데 주시는 은혜들을 헤아려보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 큰 감사의 조건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침체가 되었을 때 ‘네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들을 헤아려가면서’ 제가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데 주님이 그 때마다 기뻐하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를 회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 다음 부부관계가 나옵니다. 그리고 종의 상전관계가 나옵니다. 성령의 충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에게 부부관계가 회복되고 종의 상전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제가 목사지만 참 좋은 아내를 만났다고 제가 믿지만 어떤 때는 도대체 내가 저런 여자를 어떻게 만났는지 깊이 고민할 때가 있어요. 세 번째 선 본 여자가 더 나았는데... 뭐 이런 고민할 때가 있어요. 
아내는 변함이 없는데 제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제가 발견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내가 밉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아내가 남편이 밉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백만 원이 되지 않는 월급 지금도 많이 받아옵니다. 그 월급을 그냥 딱 던지면서 이 월급 가지고 어떻게 사냐고 그러면 여러분 남편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아내는 “여보, 백만 원이 되지 않는 월급이지만 당신이 성실하게 일한 것에 비하면 삼백만원, 사백만원, 오백만원의 아깝지 않은 돈입니다. 이 월급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살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와 은혜를 주시지 않겠느냐. 나는 이 적은 월급에 개의치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당신이 너무 존경스럽다고. 당신은 이 자녀들에게 성실이 뭐지 진실이 뭔지를 몸으로 피부로 보여주지 않았느냐고.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신뢰한다고.” 여러분, 남편이 얼마나 큰 격려로 들을까요? 
영적으로 우리가 깨어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인 것입니다. 

오늘 시대에 분당중앙교회를 향해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세월을 아끼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고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함으로 영적으로 깨어나십시다. 
그럴 때에 교제가 회복되고 예배가 회복되고 감사가 넘치고 부부관계 종의 상전관계 우리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과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용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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