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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세적 신앙의 특징 (딤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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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적 신앙의 특징 (딤후 3:1-5) 
 
 
지상의 교회는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서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해야 됩니다. 그것은 죄 아래서 영원히 멸망받을 인류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하는 사역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도리와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창 18:19). 기독교 복음이 가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지금부터 120여 년 전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우고 이 민족에게 순수한 복음과 청교도적인 경건한 생활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고, 이 민족은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교회가 본래의 순수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어 사람들에게 밟힐 지경이 되었습니다(마 5:13). 말세적 현상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1. 인본주의적 신앙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했는데 이는 신앙적 이탈 현상으로 오는 고통을 뜻합니다. 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본분임을 알려 줍니다(전 12:13). 

1) 신앙의 기준이 무너졌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비결은 그의 요구를 수용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명기 28:1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하여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삶의 목적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31). 삶의 자세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롬 12:2). 그 방법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빌 1:20).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입니다. 이 기준이 자기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2) 윤리의 기준이 무너졌습니다.

여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삶의 행태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성경 말씀이 규정하는 삶의 원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스라엘이 지켜야 될 왕도를 제시하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고 하였습니다(왕상 2:3). 그리스도인에게 생활의 강령이 되는 성경적 윤리는 시대나 상황에 상관없이 지켜져야 되는 절대적 윤리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습니다(딤전 1:5).

3) 대책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하고 탄식하였습니다(시 11:3). 지축(地軸)이 흔들리면 지구 표면과 생태계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옵니다. 신앙의 근본이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선은 자유를 누리고 즐기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상은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 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여호수아 이후 왕국이 수립되기까지 300년 어간을 사사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때는 왕이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제멋대로 생활하였으나 결과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공멸을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사사기 21:25에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2. 쾌락주의적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을 거룩한 무리(聖徒)라고 합니다. 이는 경건한 신분을 의미합니다(딤전 3:16). 그렇지만 절제하지 못하는 것,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것,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 등은 거룩한 것과 반대되는 세속적인 행위입니다. 

1)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의 실상을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하였습니다(막 8:38). 음란한 행위는 제7계명이 규정하는 죄악입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비정상적인 관계로 이루어지는 범죄행위를 뜻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음행하는 자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신 22:22).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성적 타락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그랬고(창 19:23-25), 화산재에 파묻힌 폼페이(Pompeii)의 최후도 음란의 대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6:18). 본문 말씀 4절에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 하였으니 오늘날 교회마저도 쾌락을 즐기며 경건을 멀리 한다는 뜻입니다.

2) 세속문화에 길들여졌습니다.

사람은 문화와 환경의 지배를 받고 거기에 적응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이중적인 신분과 책임이 있습니다(빌 3:19-20).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14-16에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전통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고 말씀이 정한 도리를 좇아서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예배나 의식이 대부분 세상문화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대중문화의 행태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3) 거룩한 삶이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고 하였습니다(레 11:45).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기관입니다.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밝혀주는 빛의 기관입니다(마 514-16). 그리스도인은 전에는 어둠에 속해 있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의 신분입니다(엡 5:8). 에베소서 4:24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면 어둠 속에서 살았던 옛사람의 습성을 벗어 던지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삶을 실천하기 위하여 경건의 훈련을 쌓게 됩니다. 육체의 욕심과 함께 그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실천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입니다(롬 6:6). 이와 같은 경건의 훈련이 없이 그냥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있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5절).

3. 실용주의적 신앙입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전통적인 가치관은 성경 말씀의 척도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의 가치관은 자기들의 기준을 가지고 어떤 것이 더 유리하고 불리하느냐에 따라 판단합니다. 

1)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현실적인 목적 추구의 도구로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말세적 예배의 현상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실리를 챙기려는 속셈을 드러냅니다. 사사기 17:13에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라는

사람은 자기 집에 우상의 신당을 만들고 레위 사람 제사장을 고용해놓고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내게 복을 주실 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삿 17:13).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의적인 종교행위를 하면서 하나님께 복 받기를 기대하는 심리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고르반’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구실로 자식의 본분을 회피하는 경우입니다(막 7:11). 이런 사람들은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딤전 6:5).

2) 사람에게 대하여

말세의 교회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인 본분을 무시한 채, 인간들의 사랑과 연합만을 강조하는 불신앙적인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예배의 목적을 하나님의 눈높이에 맞추려 하지 않고 사람들의 즐거움만을 의식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축제로 전락시키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갈 1:10). 본래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지만 멸망으로 가는 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가는 자가 많은 것입니다(마 7:13-14). 교회가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일에만 치중한다면 결국 주님께 외면당하고 말 것입니다(마 7:23).

3) 자신에 대하여

성숙된 그리스도인의 이상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자라는 것입니다(엡 4:13). 이를 위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합니다(빌 2:5). 사도 바울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갈 4:19). 

여인이 아기를 낳을 때의 산고와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자기와의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나 그의 삶을 십자가에 고정시키는 희생적 삶을 싫어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 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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