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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나의 자랑은 십자가 (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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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은 십자가 (갈 6:14)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변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요. 또한 그것만이 그들이 사는 길임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4:14에 보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해준 복음에 감사하여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주고자 할 정도로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 그곳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비록 복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행위도 중요하다고 했다. 구원을 얻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율법의 지킴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정말 은혜의 복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그들에게 십자가의 은혜보다는 눈에 보이는 공적과 행위가 그들의 마음을 끌기 시작했다. 비록 은혜가 중요하지만 실제로 더욱 중요한 것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을 가지는 것이라는 것을 의지하고 싶었고 또한 그것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마치 지금의 우리의 교회의 모습과 흡사하다. 중요한 본질은 잊어버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중요성을 두고 그것이 완전하게 보이면 그는 참된 신자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갈수록 형식이 중요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족을 위해서 교회는 세상의 현실과 타협하게 되었고 십자가는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맞추어지는 도구에 불과하게 되었다. 십자가 때문에 교회에 나오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십자가는 사라지고 공적만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생명이 잉태되는 중생의 역사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두 명의 도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목사님의 전도를 받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두 명의 도둑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도 경험해야겠다고 큰 통나무로 십자가를 두 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예수님의 고통을 맞보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인내하며 걸을 수 있었습니다. 

길을 가면서 "아 예수님도 이렇게 힘드셨겠구나"하고 은혜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몇 일을 걷자 그들은 탈진하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십자가의 긴 부분을 잘라내었습니다. "어차피 이것을 잘라도 십자가는 십자가니까" 하며 위안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도 십자가를 깍아서 얇게 만들었습니다. 그도 동일하게 "비록 얇지만 이것도 십자가이니까" 그들은 나름대로 편하게 만든 십자가를 지고 계속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막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벼랑이 있었습니다. 바로 벼랑을 지나면 바로 마을이 있어서 잠시 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벼랑을 건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를 사용해서 건너려고 했지만 한 사람의 십자가는 긴 부분을 잘라내었기 때문에 짧아서 맞은 편에 닿을 수가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의 십자가는 너무 얇아서 그들이 몸무게를 지탱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에게 편한 것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나름대로의 관점에 십자가가 맞지 않는다면 그것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고전 1:23에는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는데,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들의 마음에 맞는 그들이 원하는 기적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평이한 십자가의 교리는 그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경멸하였다.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에게 구원받을 소망을 품으라니! 비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가 죄인으로 판결을 받아서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을 믿으라니! 이것은 학식과 인간적인 이성과 교만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형태의 십자가를 원하고 십자가가 그런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면 십자가를 왜면해 버리는 십자가 없는 기독교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러한 현 기독교를 가리켜서 십자가 없는 기독교 십자가 없는 크리스챤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고난을 부인하고 아픔을 부인하고 슬픔의 현장을 왜면하는 거짓 크리스챤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은혜를 간증하고 성경적인 삶을 나누고 그렇게 살도록 노력은 한다고 하지만 실제의 모습에서는 십자가가 부인되는 고통이나 고난을 부인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간증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세상이 어리석다고 말하고 고리타분하다고 말하며, 모두가 회피하려는 그러한 십자가를 그는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랑한다"는 말에 대해서 존스토트 목사님은 강박관념을 가질 정도로 집착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미치도록 원하는 것이었고 그 삶이 아니라면 자신을 살아있는 이유조차 없는 죽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유일한 목표는 십자가이고 두 번째도 십자가인. 한 마디로 십자가 인생을 원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왜면하고 모두가 지기 싫어하며 모두가 어리석다고 말하는 그 십자가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하게 자랑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이라고 연결짓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과 똑같이 만들려고 인생을 산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철저하게 본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축복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위해 30평생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렇게도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그에게 있어서 삶의 참다운 의미는 십자가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생각하며 "너희들은 그렇게도 십자가를 벗어버리려고 하고 어리석다고 하지만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함이 없다"라고 강하게 의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철저하게 예수님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막 8:3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지고 가게 두지를 않습니다. 자꾸만 내려 놓으라고 합니다. 이런 유혹을 이겨내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해성의 성도님들은 나에게 맡겨진 소중한 십자가를 끝까지 잘 지고 나가셔서 승리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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