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룩을 주의하라 (마 16:5-12)

첨부 1


누룩을 주의하라 (마 16:5-12)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미국의 유명한 투자의 귀재로 알려져 있는 워렌 버핏이 금번에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워렌 버핏은 자기 재산의 삼분지 이인 370억 달러를 빌 게이츠의 자선 재단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온 세계에 커다란 감동을 주기도 했는데, 그 워렌 버핏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직해야 돈을 번다!’ 여러분 이 말이 믿어집니까? 이와 반대로 우리 사회에는 옛 부터 ‘정직해가지고서는 못산다.’는 말이 마치 진리인양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대부호가 ‘정직해야 돈을 번다.’고 했으니, ‘정직해가지고서는 못산다.’는 말은 진리가 아닌 오도 된 교훈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오도 된 교훈, 잘못된 교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신에게 나아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 것을 계기로 하여, 제자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을 경계하도록 교훈하신 것입니다. 

5-6절에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챙기는 것을 잊어버린 부주의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이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바로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집중적인 공격과 배척에도 불구하고, 영적 각성이 없는 제자들을 깨우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누룩은 술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발효제 곧 효모를 가리키나, 성경에서는 주로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누룩은 다른 것에 영향을 주는 성질을 가졌다는 것과, 적은 양이 많은 부분을 변화시키는 속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상징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러한 누룩은 성경에서 긍정적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곧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누룩 비유’에서는 누룩이 긍정적적인 면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누룩이라는 이스트를 밀가루 속에 넣으면 단순히 혼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룩은 보이지 않게 활동합니다. 이스트는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듯하지만, 변화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 속에 효모라는 생명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밀가루 속에 들어간 효모는 그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퍼져 나갑니다. 맛없는 밀가루를 맛있게 해줍니다. 빵이 되고, 피자가 되고, 과자가 되게 합니다.

이처럼 복음은 누룩과 같습니다.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슴에 들어가면 생명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질적 변화를 일으킵니다. 내 가슴에 생명의 복음이 들어와 있다면 반드시 변화의 현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어느 날 교회에 나가 예수 믿더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더라는 얘기를 들어야합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에 ‘어느 날 변한 여자’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우같은 여자에서 여유 있는 여자로, 화난 여자에서 환한 여자로, 따지는 여자에서 따뜻한 여자로, 착각하는 여자에서 자각하는 여자로, 색기 있는 여자에서 색깔 있는 여자로, 밝히는 여자에서 밝은 여자로, 남들에게 애 먹이는 여자에서 남들 때문에 애 태우는 여자로, 답답한 여자에서 답을 아는 여자로, 빚이 많던 여자에서 빛을 발하는 여자로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어가는 은혜 속에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성들도 가정과 사회, 캠퍼스, 직장에서 변질이 아닌 변화를 일으키는 누룩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이렇게 변화시키는 긍정적인 면으로 사용된 적이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잘못된 교훈이나 악이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침투해하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 당시 지도층이었던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사두개인들의 세속주의를 경계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바리새인은 약 6천 명 정도였고, 사두개인은 이보다 수가 적었던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민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교훈을 누룩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교훈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떡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7절에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교훈을 주의하라고 가르치신 것인데,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떡을 두고 온 일에 대한 책망의 말씀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와 같은 오해를 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관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영적인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그래서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는데, 제자들은 아직도 육적인 삶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떡에 대한 말씀 곧 육적인 문제에 대한 말씀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관심이 다르면 이해도 다릅니다. 비록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지라도,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관심이 다르면, 그 말씀에 대한 해석과 이해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즉 성도는 언제나 자신의 관심을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살펴서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를 깨닫고, 그 관심에 우리의 관심을 일치시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작시자 크로스비는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줍소서!” 라고 찬송하였고, 복음송 작시자 설경욱님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이 찬송이 우리 모두의 소원이 되고 기도 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면서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고 질책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관심은 우리의 믿음을 말해 줍니다. 제자들이 떡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 없음을 말해 주는 것처럼,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어떠하냐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와는 상관없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만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란 실로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의 문제로 인하여 근심하고 의논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떡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원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배불리 먹이실 수 있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떡 때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성도는 불필요한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그래서 구하기만 하면 모든 필요를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고,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늘 염려와 근심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고 풍성히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떡에만 집착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1.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외식과 형식주의를 말합니다. 마 6:1-5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 23:23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농산물이나 과일의 십일조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농산물에 관한 십일조 규정으로, 해마다 거둔 농산물이나 과일 가운데 십분의 일을 떼어 두었다가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규정을 야채에까지 확대시켜서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지켜가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의 보다 중심적인 가르침, 곧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의 문제, 이웃에 대해 베풀어야 하는 자비의 문제, 인간관계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하루살이와 약대에 풍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이 포도주를 마실 때 종교적 이유로 하루살이 때문에 포도주가 더럽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천으로 하루살이를 걸러내곤 하면서도, 그것보다 종교적으로 더 불결한 짐승인 낙타는 삼킨다고 풍자적으로 신날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규정은 엄격하게 지켜가면서, 보다 더 중요한 문제인 정의, 자비, 신의는 소홀히 하는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맹인 된 인도자들이라고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외식을 회칠한 무덤으로 풍자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유월절이 가까우면 순례자들이 죽은 사람의 시체나 뼈에 무의식적으로 접촉되는 일을 피하게 하기 위해, 무덤에 회를 칠해서 눈에 잘 뜨이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구약의 정결 법에 따른 것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에 접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몸을 더럽힌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회칠한 무덤이 겉보기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냄새나는 썩은 시신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거룩하게 옳게 보이려고 했지만, 실제 그들의 속은 위선과 불법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2.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누룩이란 세속주의를 말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의 귀족이나 대제사장 무리들로서, 그들은 정치 지도자와의 협조를 통해 부와 권세의 자리를 획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부자들이었으며 대중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고 따로 떨어져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영 또는 천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실주의자들이며,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이 땅에서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두개인들처럼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과 세상의 명예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명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는 세속주의가 만연합니다. 부정과 부패가 온 나라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의 소금인 성도가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 세상의 부패를 막겠으며, 세상의 빛인 성도가 빛을 잃으면 누가 세상의 빛이 되겠습니까?

3. 특별히 이 시대는 신천지 이만희교의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신천지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략’이라는 말을 그럴듯하게 해석해서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들의 주장을 전파하는 것을 모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략’이라는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계획’ 또는 ‘조언’이라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는 뜻을 전혀 포함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모략’란 하나님의 무궁무진하고 광대하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한 계획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를 전혀 모르는 무지한 저들은 진리의 하나님, 거짓을 모르시는 하나님을 졸지에 거짓말하는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천지야말로 엉터리로 성경을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단죄를 받아 마땅한 집단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무엇보다도 증오하시고, 이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십계명에서도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천지는 어떠합니까? 오히려 이웃과 가족에게 거짓 증거 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합니다. 어느 수요일 밤 예배 후에 신천지 교인이 나가면서 자기는 이웃 친척집에 온 사람인데, 조그만 선물을 가져왔다고 하면서 주고 갔습니다. 교역자들과 함께 펼쳐보니 그것은 신천지와 이만희를 변호하는 C D였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거짓을 미워하신다는 구절은 무수히 많습니다. 신천지에서는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어떻게 감히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거짓을 주장할 수가 있습니까? 계 21:8에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가장 큰 가장 특징이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마귀를 가리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교인들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신천지의 이만희는 과연 거짓의 아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요일 2:22절에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재림 예수라 하고, 보혜사 곧 성령 하나님이라고 참칭하는 이만희는 적그리스도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누룩인 외식과 형식주의를 멀리하고, 신앙과 인격의 생명력이 진실무망한데 있기를 바라고, 사두개인들의 세속주의를 멀리하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참된 경건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라며, 이 시대 큰 거짓의 집단인 신천지 이만희교의 누룩에 미혹되는 성도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