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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레위(마태)에게 오신 예수님 (막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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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마태)에게 오신 예수님 (막 2:13-17)


예수님 당시에 가버나움에 <레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본래 레위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믿음의 족장인 야곱의 셋째 아들의 이름인데, 그 후손인 레위 지파들이 후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명예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레위,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름이었습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연합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내 레아가 셋째 아들을 낳고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여 연합할 것>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지은 것입니다. <연합한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외롭지 않게 모든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의 아버지 알패오도 아들을 낳았을 때 자신의 아들이 평생동안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연합하여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자기 현실과는 정반대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불행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좋은 이름이 그의 현실에 맞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그 가 그 이름의 뜻처럼 <아무리 연합하려고 해도 연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세리라는 직업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보통 수입의 약 28%를 세금으로 바쳤다고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 십일조, 첫 열매, 성전세 등을 드렸습니다. 또 정부에 내는 기본 세금으로 곡물 수확의 1/10, 과일 수확의 1/5, 그외 기타 수입의 1/00을 내야 했습니다. 그 외에 우리의 주민세에 해당하는 성인남녀의 인두세, 도로 통행료에 해당하는 국도 통행세, 오늘날의 부가세에 해당하는 물품세, 자동차세와 비슷한 우마차세 등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세금을 걷는 과정입니다. 세금은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유대를 점령하여 지배하던 로마 당국은 직접 세금을 걷지 않고, 현지인들 중에서 세금징수관을 세워 세금을 거두는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이 세금징수관들이 성경에 나오는 세리입니다. 

세리를 세우는 정책은 유대에서만 시행된 게 아니고, 로마 제국 전역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세리들 중에는 유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스 파시안>은 세리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유대 지역의 독립 운동을 진압하는 등 공을 세운 끝에 로마 권력 핵심부에 진출했고, 후에는네로 황제를이어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심지어 <소변세>를 제정해서 소변을 볼 때도 세금을 거둘 정도로 지독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할 때의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헤롯도 세리 출신입니다. 그는 <율리우스 시이저, Julius Caesar>가 폼페이 장군을 물리치고 로마의 실권을 장악하자 재빨리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유대의 총세리장에 임명되었고, 후에 분봉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세리의 사명은 세금을 효과적으로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것이었 습니다. 많이 거두어 남는 부분은 세리 개인의 수입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금을 내는 백성에 입장에서는 세리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요, 동족의 피를 빨아 로마에 바치는 앞잡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세리들을 죄인, 창녀, 이방인처럼 취급했습니다. 율법 해설서인 <미쉬나, Mishnah>에 의하면 세리들에게는 돈을 환전해서는 안 되며, 세리는 법정에서 증인이 될 자격도 없었습니다. 또 그들의 돈은 훔친 것과 같기 때문에 구제금으로 받아도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거지도 세리가 주는 돈은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리와 마주서길 꺼렸습니다. 세리는 늘 손가락질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유일한 위로는 돈이었습니다. 만약 그 돈마저 시들하게 된다면 그들은 인생이 공허해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게 레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사람들과 연합하여 살 수 있 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다가설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피했고, 뒤로 물러갔습니 다. 연합은 커녕 외톨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분이 그에게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저리가라>고 레위를 뿌리치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리 와서 나와 함께 있자. 나와 연합하자>는 초청이었습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읍시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날 그에게 일어난 일은 그의 평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날 그는 레위에서 <마태>가 되었습니다. 후에 그가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신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자기 이름을 <레위>라고 쓰지 않고, <마태>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후에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읽는 사람들은 <레위>가 예수님의 방문을 받은 후 <마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 니다. 

<레위가 마태로 바뀐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존재가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레위로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고자 노력했으나, 연합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가오신 후, 열등감은 사라졌고, 자신이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이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들이 나와 연합하려고 하지 않아도, 나를 따돌리고 소외시켜도 상관없습니다. 난 더 이상 비참하지 않습니다. 난 누구보다 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나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난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자의식의 긍정적 변화가 예수님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도 일어나길 기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마태를 찾아오신 사건이 왜 그토록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최고의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존재감>은 그 사람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합니다. 엊그제 SBS TV에서 참 특이한 내용이 방송되었습니다. 올해 51세인 한 여성이 자기보다 서른 여덟 살이나 연상인 할아버지와 부부로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생전 갈아입지도 않은 것처럼 때가 잔뜩 낀 한복을 입고 있었고, 집에는 할아버지가 사용한 물건을 하나도 버리지 않아 온통 폐기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대학의 불문과를 졸업한 인텔리 여성이었고, 지금도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이 여성이 먼저 십 년이나 할아버지를 따라다닌 후에야 부부로 혼인신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여성은 지금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이 여성에 대한 견해는 어떨까요? 여인은 행복하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미친 여자처럼 취급했습니다. 인터뷰를 위해 언니에게 연락했으나 전화를 끊었습니다. 어머니를 찾아가 만났지만, 딸이 보기도 싫다고 했습니다. 그 여성이 함께 사는사람이 워낙 특이하다보니 사람들이 그 여성까지 사람으로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여성도 자신이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만약 그 여성이 잘 생기고 돈 잘 버는 멋진 남편과 잘 살고 있다면 가족들의 반응이 어떨까요? 아마 어머니는 그 딸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고, 가족들도 모두 그 여성을 자랑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찾아가서 만나고, 우리를 찾아와서 만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고,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비난받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우리가 선량하고 고고해도 우리는 그들과 같은 사람으로 취급될 것입니다. 

평소에 레위를 찾아오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동료 세리들이었습니다. 동료들끼리 앉아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했을 것입니다. 거기 아무리 많은사람이 모여도, 열명이,아니 백명이 찾아와도 세상 사람들은 <세리들끼리의 천한 만남>이라고 흉보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 레위를 찾아온 분은 세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죄인이기는 커녕 가장 거룩한 분이었습니다.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세리들을 손가락질하고 비아냥대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분은 상대를 존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 로마황제, 로마제국, 세리를 비방하는 유대인들, 유대왕국, 온 세상의자칭 경건한 모든 사람들이 다그분의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 모든 재물, 모든 지식을 다 합친 것보다 억만배도 더 위대한 것을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능력자입니다. 그분은 생명과 복의 근원이요, 우리 모두의 존재의 목적이 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분이 가버나움의 세관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순간, 레위가 눈을 들어 그 빛나는 분을 바라보는 순간, <나를 따르라>는 그분의 말씀이 레위의 고막을 때리는 순간, 그는 이미 과거의 레위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감격스럽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이 위대하신 주님, 우리 예수님, 사랑의 하나님의 방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이 지진 소식으로, 내전 소식으로, 기름 값 인상 소식으로, 복잡한 전쟁 소식으로, 우리를 마음 아프게 만드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더라도, 그 모든 고통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매 순간, 매 순간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매일 매일은 위대한 분의 방문을 받는 순간인 것 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의 표현대로 매일 새벽이 기쁨으로 출렁댑니다. 날마다 새로운 축복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 인생의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오실 줄 믿습니다. 우리도 가장 위대한 분의 방문을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둘째로, 그분이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레위가 예수님을 찾아가야 마땅합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다 자신들의 발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13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큰 무리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먼저 나온 것입니다. 

늘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수만 명이 모일 때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을 보면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날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알고 서로 소문을 냈을 것입니다. 앞뒷집으로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모두 일손을 놓고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이라고 바쁜 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모두 예수님을 뵙기 위해 시간을 냈습니다. 그들은 정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예수님께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세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찾아오지 못하는 그를 괘씸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레위가 예수님께 먼저 찾아가지 못했으나,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 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 은혜가 임한 것을 아십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예수님께 나왔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은혜를 받으려면 주님께 나가야 한다>는 구도에 익숙합니다. 주님께 나가지 않으면 은혜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엎드려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으면 안 될 게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은혜를 받았고, 은혜의 맛을 본 사람이라면 먼저 예수님께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도 모를 때, 아직 은혜도 모를 때, 아직 예수님을 뵌 적도 없을 때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구원 이야기> 자체가 그분이 우리에게 오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떠나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 탄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을 찾아오신 사건이 구원 이야기의 출발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간 게 아닙니다.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은혜를 주신 후, 그 은혜를 맛본 사람들이 그분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먼저 오심>, 이것은 예수님의 특기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우리가 주님을 찾아간 것처럼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발로 교회에 와서 등록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을 주셨고, 발걸음을 인도해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가 어떤 문제 앞에서 고민하면서 그분께로 나가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 마음에 오셔서 <왜 내게 나오지 않느냐? 왜 내게 부르짖지 않느냐? 날 찾아오너라> 이렇게 먼저 속삭이시는 분이십니다. 먼저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축복합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그 한 사람을 적다고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날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예수님께 열광했습니다. 여러분, 인기 가수가 무대에 올랐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관중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열광할 것입니다. 가수는 신바람이 날 것입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손을 흔들고, 감사를 표시할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내 팬>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저 같은 사람이 수 만 명이 모인 곳에서 설교를 하고, 청중들이 박수 갈채를 보낸다면 우쭐해질 것입니다. 예배가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목사님, 손 한번 만져 봅시다. 사인 좀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좋아서 정신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같은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분은 열광하는 무리들의 얼굴들만 보신 게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레위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온 사람들의 얼굴만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지않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보의 통계는 <지난 주일에 출석한 사람의 수>를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보를 만드신다면 <지난 주일에 오지 못한 사람의 수>를 기록할 것입니다. 주님은 <난 온 사람보다 여러 사정으로 오지 못한 내 백성이 더 걱정스럽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겠지요. <예수님, 아 그 사람은 이런 자리에 올 자격이 없지요. 그는 세리입니다. 그런 더러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포기하세요. 그리고 이리 오셔서 음식 좀 드세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요청을 뒤로 하고 바닷가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레위의 사무실을 찾으셨습니다. <레위, 내가 왔다. 난 네가 오지 못한 이유를 알고 있다. 지금은 업무 시간이겠지. 그러니 자리를 비울 수 없었겠지. 그리고 업무 시간이 아니라 하더라도 너는 올 수 없었을 거야. 그 많은 사람들이 네게 눈총을 주고, 널 쫓아내려 할 텐데, 어떻게 올 수 있겠니? 여기 혼자 앉아 울고 있었느냐? 울지 마라.> 예수님은 그의 마음과 형편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이해>란 말은 정말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어느모로 보나 모자람이 없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눈썹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보기가 흉했습니다.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렸지만 늘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여자는 남편에게 눈썹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알까봐 늘 화장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렇게 삼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길거리로 내몰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연탄 배달이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여자는 뒤에서 밀며 연탄을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리어카의 연탄재가 날라와 여자의 얼굴은 온통 검뎅이가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고 답답했지만 닦아낼 수 없었습니 다. 얼굴을 닦다가 눈썹 화장까지 닦게 될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리어카를 멈추더니 아내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꺼내어 얼굴의 땀과 검뎅이를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정성껏 아내의 얼굴을 닦았습니다. 이마도, 두 볼도 닦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눈썹만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편은 눈물까지 다 닦아준 후 눈썹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아내는 손끝에서 남편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해는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의 이해를 받으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오늘은 나와 함께 네 집으로 가겠다. 네 친구들을 불러라. 난 그들이 함께 음식을 먹자고 했지만, 너와 함께 먹으려고 뿌리치고 왔다. 난 너와 연합하길 원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의 집에 가시는 것,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부끄러워 해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죄인과도 연합하여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 세상이 사형을 선고한 흉악범에게도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이 끝난 후 강도는 예수님과 낙원의 식탁에 함께 앉았을 것입니다. 마태의 집에서 열린 식탁은 후에 낙원의 식탁을 미리 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여길 때도 주님은 <이리 와, 내 품에서 쉬라.>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을 때도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아도 그분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수 백, 수천의 사람들만 소중히 여기지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의 대형 집회에서도 열정을 다 하셨고,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위한 일대 일 만남에도 열정을 다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레위 같은 세리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전체에게 다가오십니다. 그와 동시에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들으면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의 문을 열고 다가오십니다. 그분은 평생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 다. 그 예수님과 함께, 평생을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온 마음과 사랑을 다해 그분께로 마주 나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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