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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난 앞에서 (마 2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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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앞에서 (마 24:3-14)


우리가 신문방송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의 이웃나라인 일본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역사속에 어찌보면 가장강한 9.0이라는 강진을 만나서 해일과 쓰나미로 큰 아픔과 손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수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어제까지의 사망자가 만팔천여명이라고 합니다. 실종자까지 합치면 수만명의 사망자가 집계되리라고 생각해봅니다. 10미터의 가공할만한 쓰나미앞에서 집도 배도 비행기도 차도 한갓 휴지조각처럼 구부러졌습니다. 성냥각처럼 휩쓸려 내려갔습니다. 한번 신문에서 본 사진을 기억해보면 지붕위에 자동차 한 대가 올라가 있었습니다. 쓰나미에 자동차가 쓸려가다가 지붕위에서 멈춘겁니다. 그러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우린 능히 집작이 됩니다. 

어느 체육관에서는 천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도 합니다. 해변가의 한 동네는 그 도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했고 한 중소도시는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는 그런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더더욱 가장큰 위험은 원전의 폭발이였습니다. 방사능이 누출되어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는 일본인들을 보게됩니다. 이미 일본 사람들은 히로시마 원폭의 피해를 익히 경험했기 때문에 원자폭탄하면 그들은 두려워 떨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풍족한 세계, 세계 경제대국 2위의 일본이 이런 고난앞에서 생필품을 구하지 못해서 줄을서고 발을 동동구르고 또 전기와 식수가 끊어져서 추위에 떨다가 죽어가는 노인들과 환자들이 속출한다고 합니다. 약은 많지만 병원으로 약을 수송할 수가 없어서 수많은 환자들이 약이 없어 죽어간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많은 이주민들은 집을 쓰나미에 쓸려보내고 방사능누출로 인해서 정든 고향을 떠나서 대피소 생활을 하든가 타지로 떠난 숫자가 약 30만명에 이른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안전한 곳에 가고 싶어도 교통편을 구할 수가 없고, 차가 있어도 휘발유를 살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일도 할 수 없다는데 더욱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재난앞에서라고 정했습니다. 오늘 성경 8절에 보면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는 것은 이제 재난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재난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이 재난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가 무엇일까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재난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종말장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서두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아름다운 위용을 자랑하는 금빛찬란한 헤롯성전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때가되면 이 성전이 허물어질 것이고 돌위에 돌하나도 남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과 2절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아주 무서운 이야기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계의 성전을 기억합니다. 첫 번째 성전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솔로몬 성전입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 다 허물어 졌습니다. 두 번째 성전은 스룹바벨성전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스룹바벨 총독을 중심으로 다시 세운 성전이 스룹바벨성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성전이 헤롯대황이 지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은 헤롯성전입니다. 

이 헤롯성전은 지붕을 금칠을 해놔서 태양이 비칠때는 아주 밝게 빛났다고 합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은 그 헤롯성전을 바라볼 때마다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성전은 얼마나 견고하고 튼튼한지 그들은 이 성전이 허물어지는 것을 역사의 종말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 성전 하나의 돌의 크기가 길이가 12미터 넓이가 3.6미터, 높이가 6미터 였다고 합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이런 어마어마한 돌을 깍아서 세운 성전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돌위에 돌하나도 남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예언은 이루어졌습니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이루어졌습니다. 

역사속에 보면 A.D70년 로마의 디도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성전을 초토화시켜버렸습니다. 그 말대로 돌위에 돌하나도 남지않도록 완전히 파멸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말씀을 성전에 대한 예언을 하신 후에 감람산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거기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3절입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의 질문은 세가지입니다. 감람산에서 조용히 여쭤봤습니다. 첫째는 어느때에 이런일이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언제 허물이지겠습니까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주의 임하심이 언제 임하시겠습니까. 주의 임하심은 주의 재림 파루시아라고합니다. 예수님이 너희를 떠났다가 다시 온다고 하셨으니까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시겠습니까라는 재림의 때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세상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끝날 그때는 어떤 징조를 통해서 끝날 그때를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세가지를 징조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거짓선지자의 출현입니다. 거짓선지자가 와서 내 이름을 사칭하며 그들이 너희를 미혹할 것이다. 4절 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예수님 이후에 수많은 거짓 선지자가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자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였습니다. 그들은 다 죽었습니다. 

오늘 가까이 멀리할 것도 없이 우리 시대에도 자신을 그리스도로 지칭하는 이들이 생각외로 많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으로 지칭합니다. 옛날에 전도관, 그 이후에 천부교로 고쳤습니다만 박태선씨가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죽었습니다. 통일교의 문선명씨가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쯤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도 나이 늙었으니 얼마안되서 그도 죽을 것입니다. 요즘 통일교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그 아들들이 그 재산 때문에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수요일마다 이단특강을 하고 있는데 신천지에 대해서도 두주전에 살펴보았습니다. 이만희씨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도 점점 늙어갑니다. 그도 곧 죽을날이 가까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해서 이 주위에 미혹하는 집단이 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이라는 교주도 죽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하필이면 식당에서 점심먹다가 체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늘도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자기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으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이 징조가 바로 이 시대에 종말의 징조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곳곳에 난리와 기근과 지진의 소식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6절과 7절입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은,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난리와 난리, 난리라는 것은 전쟁의 소식입니다. 지금 이땅에 전쟁의 소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리비아에서는 카다피정부군과 반군들이 치열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부터는 유엔의 다국적군대들이 공격을 개시했다고 합니다. 이 땅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습니다. 

기근의 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풍요롭게 살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분유 한 통이 없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가까운 북한에도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굶어죽어가는 이들이 수십만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그것만도 아닙니다. 지진의 소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소식은 우리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본이 지진으로 고통당한다면 그 지진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역사속에서 이런 강도 7에서 9의 강진이 50년마다 주기적으로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지진이 일년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이티지진 얼마전의 일이였습니다. 아이티지진으로 10만명, 20만명이 죽었습니다. 중국 쓰촨성의 대지진으로 10만명이상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불과 몇 년전의 일이였습니다. 이번 일본의 지진으로 적어도 수만명이상이 죽을 것으로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시대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종말의 징조를 말씀하셨고, 우린 역사속에서 지금이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우리가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후부터 지금까지가 종말의 시대입니다. 2천년동안 그 종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제 역사의 끝이 올까, 우리는 그것을 정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세 번째로 9절과 10절을 보면 핍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핍박속에 복음을 증거하며 예수를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핍박은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가지 징조를 통해서 우리가 종말의 때에 이르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의 종말이고 또 하나는 역사의 종말입니다. 개인의 종말은 내가 살다가 숨이 끊어지는 날이 개인의 종말입니다. 역사의 종말은 역사속에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런 징조가 나타나고 대혼란이 임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새로운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이 바로 역사의 종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역사의 종말을 준비하면서 개인의 종말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한 60대의 여류작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크리스챤이였는데 어느날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가 진찰을 하고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는 이 여인에게 중병을 선고했습니다. 당신의 병은 너무 중해서 6개월 이상을 넘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6개월 시한부 인생이라고 선고했습니다. 여류작가는 조금도 의심없이 백프로 그 말을 신뢰했습니다. 6개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가 고민했습니다. 이왕이면 마지막 인생을 멋있게 마무리해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얼마있는 재산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와 원한관계에 있는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화해 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물질을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어찌보면 그 6개월은 길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를 아주 보람있고 감동적으로 살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났는데 그는 죽기는 커녕 몸이 점점 더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이 돼서 병원에 가서 다시 진단을 받았더니 그 병원의 전의 판단이 오진이였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차트가 바뀌었든지 어찌됐든 오진이였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아주 친한 친구가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죽는 줄 알고 그렇게 베풀며 살았는데 후회스럽지 않느냐고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물질이 아깝지 않느냐고. 그때 여류작가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전혀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6개월의 삶은 내 삶에 보람있고 의미있는 시간이였습니다. 아니 내가 평생 살아온 60년의 시간보다 이 6개월이 내게는 더 감동적이고 더 보람있는 시간이였습니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것입니다. 

장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래 사는 것 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있고 가치있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이런 종말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종말이 찾아올까. 어떤 사람들은 역사의 종말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단들은 역사의 종말의 날짜를 그들이 예언해서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마태복음 24장 36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아들도 모르고 천사들도 모르고 누구만 아십니까.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자신도 그 마지막때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의 날을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고백합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어떤 이단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짜를 발표해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대표적으로 90년대 다미선교회를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단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그날과 그때는 모른다고 했지 그날은 몇일이라고, 때는 몇시, 그러니 몇날과 몇시는 모르지만 그년과 그달은 알수있지 않느냐 그래서 그 해와 달을 예언하는 이단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7절부터 39절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어찌보면 종말의 시대는 노아의 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열심히 120년동안 지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냥 먹고 마시고 술취하고 인생의 쾌락을 쫓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홍수가 나서 그들이 죽음의 순간에 들어가기 까지 그들은 종말을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오심도 이와같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 때 예수님은 바람같이 때론 성경에 의하면 도적같이 임할 것을 말씀합니다. 도적이 내가 몇월 몇일 몇시에 당신의 집을 찾아가겠다고 예고하고 오는 도적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렇게도 말합니다. 내가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42절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4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어느때에 임할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32절에 보면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무화과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줄을 아나니그랬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상황을 통해서 그 때를 짐작할수만 있지 정확한 시와 그 년을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이런 징조를 통해서 종말의 때가 우리에게 당도했음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종말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45절 46절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이렇게 충성된 종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오면 주인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하고 게으른 종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48절부터 51절입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바로 종이 기다리는 주인은 예수님을 가르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충성된 종들이 되어야 한다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단들에게 고귀한 종말론을 빼앗겼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재림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상한 눈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을 자꾸 공포로 몰고 가느냐고, 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느냐고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종말론의 성경의 사상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반복해서 예수님이 다시오신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 주님앞에 충성된 종, 부지런한 종으로 서야하지 않겠습니까. 게으른 종을 더더욱 악한 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떤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재난앞에서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주의 백성들 되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재난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12절입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불법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노미라합니다. 혼란과 무질서 윤리적인 타락을 의미합니다. 오늘 이시대의 모습이 어찌보면 아노미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법이 성해서 사랑이 식어졌다.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식어졌다라는 것은 싸늘해졌다. 차가워졌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예배의 횟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10년전에는 예배에 적어도 3번은 참석하던 분들이 지금은 2번이나 1번참석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이유는 있습니다. 왔다갔다하면 차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또 그렇게 매일 교회만 오면 언제 연속극은 보느냐고, 이러면서 일주일에 한번이면 족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싸늘한 사랑으로 식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예배의 횟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주일 낮예배까지 오지않으려고 하니 그건 좀 찜찜합니다. 20년 다닌 신앙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래서 주일 오전 예배는 겨우겨우 참석하지만 오후예배는 굿바이, 수요예배도 굿바이, 심야기도회도 굿바이, 우리는 세 번 네 번 나오던 집회를 다 줄여버리고 오직 오전예배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형제와 가족에 대한 사랑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매정한 가족들도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자식을 던져버리기도 하고 부부간에 쉽게 갈라서 버리기도 합니다. 형제간에 작은 물질 때문에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 줄어가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이 종말의 시대에 회복해야 될 줄 믿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만은 이 사랑을 더욱 뜨겁게 가열시켜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사회도 지진을 당한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을 향해서 우리가 도움의 손길을 펼쳐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탤런트들도, 언론사에서, 많은 단체에서 이제 교회에서도 구호의 손길이 펼쳐져야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구호, 구제헌금에 함께 참석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일본은 지금까지 불편한 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과거사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 36년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전쟁에 우리 백성들을 총알 받이로 내 세웠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수없이 희생당했습니다. 그리고 광산에 징용으로 끌려가서 광속에 파뭍히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의 여인들은 정신대로 끌려가서 그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올해가 경술국치 101년되는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뼈 아픈 과거도 가지고 있습니다. 1928년 관동대지진이 나서 10만명이상이 되는 일본인들이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이 지진을 이용해서 사람들 집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타서 일본인들을 죽이려한다고 소문을 내서 그 당시 6천명의 우리 한인들이 무참히 살해된 일도 있습니다. 일본은 아직 사과 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깝고도 먼 이웃인 일본을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가깝기는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입니다. 그러나 가장 마음으로 먼나라가 일본입니다. 축구를 해도 영국한테는 져도 덜 분이나는데 일본한테만 지면 견딜수가 없는 것입니다. 꼭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런 기회에 우리가 일본에게 사랑을 베풀수 있는 그런 기회로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믿습니다. 

성경에도 뭐라고 하십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죽했으면 일본대사관앞에서 쉬지않고 눈이오나 비가오나 피켓을 들고 시위하던 정신대할머니들이 이번에는 일본아 힘내라고 일본을 돕자고 그분들이 나서서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마음으로는 밉지만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 우리가 그들을 감싸안는것이 그들에게 그들을 용서하는 길이요, 그들고 형제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나라 일본이 어려움당할 때 우리도 손을 펴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재난앞에서 더 열심히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마지막에 할 일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인 것입니다. 종말의 시대에 우리는 복음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복음이 증거될 때 그 때 끝이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떤분은 반대로 빨리 복음을 증거하면 안되겠네요. 그래야 끝이 천천히 오지 않을까요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섭리가운데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일본이 저렇게 어려움당할 때 일본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실 일본은 5백만의 귀신을 섬기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어찌보면 말할 수 없는 참상을 통해서 일본의 닫힌 마음이 열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의 문명이 저들이 내세우는 세계 2위 경제대국의 허상이 얼마나 저들에게 고통이 되는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저들이 자랑하는 원전, 원자력 발전이 재앙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보면 압살롬이 긴머리를 자랑했는데 머리털이 나무에 걸려 그는 죽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경제적인 발전, 오히려 그것이 그들에게 재앙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십니까. 일본은 저 재난을 통해서 더 겸손해 질 것이고 마음이 열릴 것이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일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한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일본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도 거기에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가 보통 그러지 않습니까. 한국에 살던 사람 3대가 절대로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자손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 웬만하면  90프로 이상이 다 예수를 믿습니다. 왜 그럽니까. 새로운 세상에 가서 불안하고 두렵죠, 의지할 것이 없죠, 그럴때 그들은 주님을 영접하기 쉽습니다.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세운 문명이 하루아침에 허물어지는 그 허망한 모습을 보면서 한 동네 한 도시가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세운 우상과 문명이 하나님의 능력앞에 대자연의 위력앞에 얼마나 부족하고 초라한 것인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일본을 사랑하는 한표현이고 한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지진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신문기사를 보니까 이번에 그 지진을 통해서 이 지구에는 태평양판과 아시아판과 여러판이 짜져 있다고 합니다. 지구를 형성하는데 이런 지진을 통해서 그 판들이 조금씩 흔들린다고 합니다. 흔들리는데 흔들림을 통해서 신문에 보니까 일본의 지도가 1.2미터 우측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또 어떤신문에는 5센티미터가 움직여졌다고도 합니다. 어느게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서있는 이 지구 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지도상에서 대한민국 땅덩어리가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영원히 견고한 것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그것은 움직일 수 있고, 요동칠 수 있고,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난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재난 앞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고 고난당하는 이웃에게 우리의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서 더욱 기도하며 이 시대에 주의 복음을 힘있게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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