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념과 신앙 (마 7:21-27)

첨부 1


신념과 신앙 (마 7:21-27)  

  
따스한 봄날 오후입니다. 우리 옆에 앉아있는 분들 5초정도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눈빛을 한 번 보면서 우리 고백할까요? 
“당신을 참 사랑합니다.” 

신앙과 신념은 다릅니다. 신앙은 출발이 하나님이고, 신념은 출발이 자기 자신입니다. 
신앙은 모든 행동의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지만 신념은 동기가 자기 자신의 목적입니다. 
신앙은 생명으로 인도하지만 신념은 결국에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신앙인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의 죄악 됨을 깨닫고 그 하나님 앞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몸서리치며 벌벌 떠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꿇는 무릎,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신앙인은 잘될수록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때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잠잠히 나아가면서 주의 뜻을 물으며 나아가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신념인은 자신의 확신으로 살아갑니다. 열심으로 일을 해결하려하고 안되면 되게 하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신앙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을 품는 따스한 목자의 심정이 있다면 신념인은 사람보다 사역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신앙인이 있는가하면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가슴속에 채우지 못하는 사람들, 때로는 기도를 하지만 십자가에 흘려주신 피와 내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 성경을 공부하고 훈련을 받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내 손과 발을 바꾸도록 말씀이 살아서 나에게 부딪혀오지 않고 문자로만 공부하는 사람들. 
한 마디로 교회를 다니지만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은 문제가 생기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다 놓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며 무릎을 꿇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서 이 순간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조심스런 마음으로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념인들은 문제가 생기면 인간적인 지혜를 찾으려고 방법을 간구합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인으로 사는 사람과 신념으로 살아가는 두 부류의 사람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먼저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우리 주님께서 <26절>에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 여러분들은 이 말을 들으면서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이 듭니까? 
말씀은 들었는데 행함이 없다. 그러니까 신앙은 있지만 믿음은 있지만 행함이 없다라고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믿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실천이 있어야지. 행함이 있어야지.’ 그러나 이렇게 말씀을 해석하고 나면 다음의 말씀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집을 모래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여러분, 이 사람들-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행함이 있나요, 없나요? 
행함이 있어요. 모래위에 집을 짓는 거예요. 
열심과 행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래위에 짓는 게 문제라는 거죠. 열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좀 더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본문의 앞뒤 상황을 좀 더 깊이 살펴보아야 됩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이 사람들을 오늘 <21절>에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여 주여 주님을 간곡히 부르는, 나름대로 열심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 

실천이 있는 사람, 행함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열심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열심,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신중하게 들어야 됩니다. 우리 편에서 아무리 열심을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진실함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 더 보여주고 계십니다. <22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그 날에>라는 말이 성경에 나오면 신약이든 구약이든 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또는 심판하실 때 그 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심판의 날에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주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선지자 노릇했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지요?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설교하고 주와 같이 말씀을 설교하는 가르치는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던 가시적으로도 역사가 일어났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기도 하고 말씀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드러나는, 병 고침의 은사가 일어나고 귀신들이 도망을 가고 권능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고... 
저는 이런 능력있는 목사가 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설교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지만 어디가면 설교학교수라고 잘 이야기 안 합니다. 설교를 할 때마다 이 귀한 생명의 진리의 말씀을 이렇게 너무나 부족하게 전하는 자신의 모습에 고통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병자들의 병을 고치고 권능을 일으키고 우리 교인들께서 때로는 육신의 질병을 두고 기도해달라고 다가올 때 그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면서 ‘좀 주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냥 역사를 좀 일으켰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게 잘 되지가 않아요. 

방학이 되면 들어가는 선교지에서 이제 보고나면 평생 앞으로 못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뭔가 확 나타나셔서 그냥 하나님 한 번 만날 수 있도록 좀 가시적인 능력이라도 좀 보여주셨으면... 
제가 이토록 부러워하는 이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오늘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주님께서는 이 게으른 자들아 행함이 없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열심을 내어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불법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하나님이 뜻하지 않는 그 일들이 불법의 일이란 겁니다. 교회 생활을 아무리 화려하게 할지라도, 때로는 다른 사람이 나를 옳게 여겨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불법과 같은 일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들의 문제가 행함이 없는 것이 진정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행함이 그들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읽었던 <26절>말씀을 다시 한 번 해석해보아야 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우리말에는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어요. 해석을 하면 이런 느낌이 듭니다. 이 말씀은 들었는데 행함이 없다. 그러나 원문 성경을 살펴보면 우리말에 빠져있는 것이 들어가 있는 것이 있어요. 
‘나의 이 말씀들을 듣고 그 말씀들을 행하지 않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니’ 이렇게 나옵니다. 

영어성경에도 원문을 따라서 우리말에 없는 것이 번역이 되어 있어요. 제가 좀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everyone who hears these words of mine’ 나의 이 말씀들을 듣고 ‘and does not put them into practice’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ut them into practice’ 그 말씀들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의 이 말씀들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이 말씀들을 듣고 이 말씀들을 행하지 않는 자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죠. 행함이 있어요. 어떻게 행한다는 말입니까? 이 말씀들을 듣고 이 말씀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행하는 겁니다. A의 말씀을 듣고 B를 행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시 때에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살았던 종교지도자들, 율법사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그들에게 책망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밤낮으로 말씀을 연구하고 화려하게 살아갔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말씀, 그 삶을 살지 못했던 사람들. 

그들의 열매는 화려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의 열매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으로부터 이런 책망을 받을 만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어쩌면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주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저와 같은 목회자가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 교회가운데서도 열심을 내지만 때로는 말씀대로가 아니라 내 신념대로 살아가는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누구라도 주님 앞에 이런 어리석음을 범할 가능성은 다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하나가 있어요. 이렇게 신념으로 살아가도 때로는 열매가 있다는 겁니다. 화려한 열매가 나올 수가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신념의 열매가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신념으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신앙으로 살아가십니까? 

내가 생각하는 대로 열심을 내면서 나아가면서 주님이 도와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깊이 물어보고 그것이 맞다면 그때 내 자신을 던지고 계십니까?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것을 확신하며 달려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의 원리대로 자기 자신을 교정하고 쳐서 복종시키면서 나아가고 계십니까? 

신념의 사람들은 요셉을 모델로 삼기를 좋아합니다. 
꿈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달려갔던 요셉. 
비전이 있었기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총리의 꿈을 이루었던 요셉을 그들은 강조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확신에 조심해야 됩니다. 이렇게 요셉을 해석하게 되면 성경을 잘못 이해할 뿐만 아니라 왜곡하게 됩니다. 

여러분 요셉이 한 일이 무엇이죠?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해와 달이 자신에게 와서 절하는 놀라운 꿈을 꾸었지요? 
심지어 어머니 아버지도 그것을 잘못 해석을 합니다. 해와 달이 부모라서 부모가 아들에게 절을 할 수 있는 것은 총리가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사람들은 쉽게 그 꿈을 총리가 되는 것이라고 빨리 단정을 지어버립니다. 
사실 당시 때 문헌에 보면 어떤 경우도 해와 달이 부모를 가리키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해와 달이 누구죠? 
태양신을 섬기고 달신을 섬기는 저 애굽의 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애굽의 신이 요셉이 섬기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요셉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두고 미리 예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어요. 그 꿈을 가지고 요셉이 끝까지 달려가서 꿈을 이루었을까요? 
그것을 두고 비전이 아니라 그것은 야망이나 신념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꿈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죠? 다 잊혀지게 되고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저도 가끔은 이 목사로서 때로는 아주 기이한 꿈을 꾸고 나면 ‘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꿈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제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공한 것이 영시입니다. 가끔 이리저리 부탁을 받으면 시를 보내주기도 하고 출판을 보내기도 합니다. 
제가 참 아리따운 아내의 마음을 얻은 것도 다 이 시 덕분입니다. 몇 자 적어서 뻥을 쳤더니 아내가 그냥 다른 것을 보지를 않아요. 시 한수에 눈이 가려서 제가 키가 얼마나 작은지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결혼하고 나서야 비로소 “오, 이래요?”가끔은 기가 막힌 시구가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런 시구는 꼭 꿈에 잘 나타나죠. 꿈을 꾸고는 일어나서 빨리 그 시를 다시 재현시킵니다. 기억이 안나요. 잊어버리는 거죠. 

다음에는 꿈을 꾸면 반드시 일어나서 시를 적어놓고 다시 잡니다. 잠을 깨고 나면 그것도 꿈이더군요. 그 꿈이라는 것이 지나고 나면 다 잊혀집니다. 
그러면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게 했을까요? 
요셉이 한 일이 있습니다. 꿈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달려간 그런 신념의 야망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신앙인이에요. 

보디발의 노예로 잡혀갔을 때 경건하게 살려고 하다가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해되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사나 죽으나 당신의 것이오니 미천한 저를 통해서도 당신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게 신앙입니다. 이는 숙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통해서도 역사를 일으키시리라는 적극적인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신앙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신념인은 결코 이렇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만큼 했는데 당연히 일이 이렇게 이루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요셉을 어떻게 하십니까?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요셉을 불러내어서 하루아침에 총리가 되게 하십니다.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신념인 들은 결코 이런 일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 제가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을 주시고 한만큼을 달라는 게 신념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릅니다. 
내가 생명을 바치는 헌신을 던졌다고 할지라도 주님 제가 마땅히 주님 앞에 해야 될 일입니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저 같은 미천한 자에게 위대한 하나님을 위해서 순간이라도 헌신할 수 있었다면 주님 그것이 저에게는 특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신념으로 달려가십니까, 신앙으로 달려가고 계십니까? 
내 생각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확신하면서 달려가십니까, 아니면 신앙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계십니까?신념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은 하지만 절대로 하나님을 진실하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지만 지금 내 기도를 들으시는, 나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결코 믿지를 않습니다.
 
신념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행복과 평안이 없습니다. 그들의 모습에는 마치 바리새인들의 모습처럼 나름대로 열심을 내고 뛰어다니지만 그러나 차가운 율법 속에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진정한 평강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이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해를 시작하면서 열한가지의 결단을 적어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결단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즐거워하라 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제가 전하는 설교와 가르치는 신학이 소명이 아니라 그냥 직업이 얼마든지 될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신학교 선생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전하고 신학과 관계되고 성경과 관계되는 논문을 쓰고 책을 쓰고 남들이 보면 모든 게 다 종교적이고 거룩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제 자신이 진실한 신앙인이다라는 것을 보장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행위는 중요하지만 행위가 우리의 본질에 내면의 본질을 절대로 보장해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해마다 미국에서 최근에 나오는 책들, 구약, 신약, 설교학에 관계되는 책들을 최소한 300권 이상씩 사옵니다. 저희 집에는 신학에 관계되는 책이 만권이 넘습니다. 그 모든 책을 다 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제가 성경을 바르게 알고 주님을 바르게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가르치고 목회자들을 훈련시키고 책을 쓰고 있지만 정말 제가 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가, 언젠가 이 땅을 떠나서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 제가 생각했던 그 주님. 그 모습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혹시라도 제가 생각했던 주님이 아니라 주님이 나타났을 때 못 알아보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굉장히 두려워집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 주님 제발 저를 불쌍히만 여겨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신념 인처럼 살아오신 분들이 계시지 않으십니까? 
이런 자신을 무너뜨려야 됩니다. 
신념의 종교에는 오래갈수록 심각하고 열심을 낼수록 문제일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건이라는 것은 경건할수록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이제는 나 자신이라는, 내 생각이라는 신념이 아니라 말씀대로, 말씀에 근거해서 달려 나가시는-신앙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이 사람들의 문제는 결국에 집을 짓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반석위에 짓지 않고 모래위에 집을 짓는 거예요. 신앙생활 가운데 모래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지지 않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이 다 모래위에 짓는 집이 될 것입니다. 표가 잘 나지 않아요. 집입니다. 평소 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달라지는 겁니다. 풍랑이 일고 때로는 핍박이 찾아오고 환란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 앞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신앙의 집이 아닌 신념의 집은 무너지고 맙니다. 
피사의 탑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바르게 서있지 못하고 비스듬하게 넘어져서 곧 쓰러질 것 같은 탑 기억하시죠? 

1174년에 파사도라는 이탈리아의 건축가가 세운 탑입니다. 200년에 걸쳐 계속 보수공사를 거쳐서 세워진 탑. 그렇게 찬란하게 세워진 탑이지만 왜 그렇게 비스듬하게 넘어가고 있을까요? 지반이 약해서입니다. 지반이 모래예요. 모래 한 쪽이 무너진 겁니다. 
1990년대 붕괴위험이 있어서 10년 동안 사람들은 300억을 투자해서 이 피사의 탑을 다시금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전문가들이 동일하게 하는 말이 있어요.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언젠가 무너질 탑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근본이 모래이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어느 정도 종교적인 헌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 내가 서있는 곳이 신념이라는 모래라면 우리는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념이 아닌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우리 예수님께서 오늘 신앙인의 모습을 <24절>에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이 말씀도 원문에 보면 우리말에 빠져있는 게 나옵니다. 이 말씀들을 듣고 이 말씀들을 행하는 자는, 말씀을 듣고 말씀을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신앙인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나름대로 열심을 내는 신앙인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반석위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신앙을 세우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반석대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위에 집을 짓는 사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야 될 이 시점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신앙이 신념이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위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지는 여러분들의 삶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구호나 슬로건 위에 세워지는 교회가 아니라 진리의 피 묻은 그리스도의 말씀위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위에 세워지는 우리교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한국교회 초창기의 설교를 최근에 연구하다가 한 가지 참 감사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초창기에 오신 많은 선교사님들 가운데 마포삼열이라는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사무엘 모펫이라는 이름을 한국말로 마포삼열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분은 1918년에 한국에 들어와서 46년간을 섬기다가 1936년에 한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국 초창기의 선교의 아버지라고,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분입니다. 이분은 800개가 넘는 학교를 세운, 그리고 제가 몸담고 있는 총신대학교를 세운 분이시기도 합니다. 

마포삼열 선교사님이 조선교회에 고함이라는 설교를 남긴 게 있어요. <골로새서 2장 8절>을 가지고 한 설교였습니다. 
“나는 조선에 와서 복음전도하기 전에 황주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 결심은 내가 이 나라에 십자가의 도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죽든지 살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분이 한국교회 초창기에 선교사님이었다는 것에 너무나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지금까지 교회의 급성장을 이루었던 배경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위에 한국교회가 세워졌기에-진리의 말씀위에 세워졌기에 오늘까지 한국교회가 온 겁니다. 

초창기의 설교를 연구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 그대로 증거하지 않았던 경우도 꽤 많습니다. 성경전체에서 주제를 찾아서 전체시각으로 증거한 것도 많았어요. 제목설교라고 부릅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들이 이렇게 제목설교하면 A받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설교학을 공부한 사람들도 아니고 정통적인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모든 설교에 나타난 게 있어요. 어떤 설교를 하더라도 모든 성경의 대주제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이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게 만드시는 주님. 내 허물진 인생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그 예수의 복음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 선교지에서 지난 한 달 동안 말씀을 섬기면서 발견한 것이 있어요. 중국교회의 리더들을 섬기면 그들의 설교를 우리나라의 설교와 비교하면 조금 차이가 납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많은 책을 읽고 여러 참고서를 참고해서 굉장히 설교를 잘합니다. 아주 듣기에도 좋은 설교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주석책 하나 없습니다. 성경 하나가지고 묵상하는 겁니다. 화려하지 않습니다. 아주 심플합니다. 소박한 설교이지만 그들의 설교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보혈이 있어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앞에 반응하는 우리의 모습이 나와요. 그 십자가가 듣는 저에게는 눈물을 흘리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으로 신념이 아니라 신앙을 세우게 되겠습니까?예수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 생명의 복음, 그 십자가의 복음위에 세워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요, 그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이제 4월이 되어갑니다. 
교회 앞에 보니 목련꽃이 몽우리를 이제 곧 피울 것 같군요. 
우리 교회가 오랫동안 어둠의 터널을 지나서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리 어두운 곳을 지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지나는 것은 끝이 없는 동굴이 아니라 반드시 광명한 빛이 나오는 터널일 뿐입니다. 잠시잠깐 우리가 이렇게 떨어져있을지라도 무엇으로 우리가 이제 일어나서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올려 드리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 그 성령의 은혜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이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 위에 진리의 말씀위에 굳건하게 서서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교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교회는 오랫동안 인물을 키워서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위대한 슬로건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이정표역할을 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었고 사람을 키우는 바람을 불러일으켜 내었습니다. 
그러나 ‘인물을 키워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위대한 슬로건은 내 한사람이 주님 앞에 변화되지 못하고 나의 변화가 우리의 가정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우리 교회가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호에 그칠 뿐이고, 그 때 그 구호는 신념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엇으로 인물을 키워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로 다시금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이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먼저 변화를 받아야 되고 변화된 나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정이 새로워져야 되고 우리의 구역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교회가 진리의 말씀위에 새롭게 타오를 때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한국교회가운데 그리고 우리 교회 젊은이들 가운데 이 땅을 변화시키는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시킬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열심으로 진실한 신앙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성경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주님의 얼굴빛을 아는, 살아있는 신앙을 대신 해서도 안 됩니다. 심지어 우리의 겸손이 주님을 진실하게 따라가는 순종을 대신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 한 계단 계단 쌓아 올라가는 신앙, 하나님의 십자가 위에 세워지는 교회. 그것이 우리가 꿈꾸고 나아가야 될 교회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동토의 어둠을 뚫고 새롭게 일어나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무엇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다시금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반석위에 세워지려면 그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 바르게 알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훈련하고 하나님 말씀 깊이 연구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따스한 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과 더불어 달려 나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역사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꿇는 무릎이 강해져서 기도의 능력을 회복해서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교회가 성령의 통로 되기를 축원합니다. 

몸 된 교회를 사랑해서 밤이고 낮이고 이 교회를 찾아와서 기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기도로 말미암아 온 성도들의 상처가 싸매어지고 하나님 앞에서의 분열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게 될 때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이 시대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놀랍게 선포할 위대한 하나님의 교회로 세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위에 나의 신앙이 세워지는 인생,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진실한 신앙으로 세워지는 교회, 
나의 뜻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의 뜻을 이루는 인생, 
자신으로 말미암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서 비록 우리가 잠시 떨어져있는 모습이지만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금 멋지게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역전의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대가운데 기독교 역사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빛처럼 일어나서 조국교회 기독교의 역사의 새 장을 써내려 가시는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 우리 분당중앙교회 되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