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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라! (창 1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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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라! (창 17:1-14)

 
모든 바른 믿음에는 확증과 증거가 있어야 됩니다.  믿음은 증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의 생애를 향해서 베푸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 한 내 주변에 사람이 반드시 나타난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무엇보다도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욕심이 있어야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가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돕고 있으면 가는 길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주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십시오.  헌신하십시오.  내가 주인공인 것을 선언하고 하나님 앞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때를 만드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뛰어드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온전히 맡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복을 주고 복이 되게 하겠다.  내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네 후손을 이 땅에 가득하게 채우겠다.  동서남북 사방을 살펴보아라.  그 모든 지경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약속을 따라 가나안을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에는 자녀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불평과 같은 제안을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주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메섹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그러자 사라는 그 때 당시의 풍습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똑같은 조건을 갖춘다면 내 몸에서 난 아이나 내 여종 하갈에게서 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갈을 취해서 이 땅에 당신의 아이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룹시다."

그 말을 좋게 여겨서 아브라함은 하갈을 취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잉태하자 하갈은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자기 상전이었던 여주인 사래를 능멸합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래는 남편을 닥달합니다.  요즘 말로 바가지를 긁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의 동의하에 하갈을 잔인하게 학대를 하고 이것을 못 견딘 하갈은 끝내 도망을 갑니다.  광야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절규를 하던 하갈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사래의 권위 아래 복종하며 살 것을 명령받습니다.  그리고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슴에 안고 돌아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 집에 아이를 주십니다.  창세기 16장 16절입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86세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75세에 부름 받아서 86세에 이르기까지, 창세기 12장부터 16장까지 계속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11년 동안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17장 1절을 보니까 갑자기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로 껑충 뛰어넘습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86세에서 갑자기 99세로 뛰었습니다.  75세에서 86세까지 11년 동안은 참으로 많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에도 많은 진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86세에서 99세까지 13년 동안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은 채, 지금 자기 눈 앞에 있는 이 늦둥이 아들에게만 몰두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늦동이를 둔 부모들은 자식을 무척 좋아합니다.  어떤 분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 받아 가지고 와서 대학 강단에 섰는데, 서른 아홉 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의 여러 친구들이 수소문을 해서 배우자를 찾았는데 결국 두 살 아래의 대학 교수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부가 하나님께서 아이를 안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적으로 자녀 없이도 잘 사는 가정이 되자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한지 5년 만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남편이 45세이고 부인이 43세 때입니다.  둘 부부가 아이를 낳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자기만 아이를 낳아본 것처럼 폼을 잡습니다.  100일이 되어 100일 사진을 찍으려고 사진관에 갔습니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받는 동안에 머리가 다 빠진 이 분을 보면서 사진사가 이렇게 묻더랍니다.
"할아버지, 아이의 아빠, 엄마는 언제 오세요?"

그러니 83세가 된 아브라함이 늦게 본 아들을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이 아이 때문에 초반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 하갈은 자기 본 위치에 서서 여주인 사래의 권위 아래 충성스럽고 겸손하게 순종합니다.  만사가 태평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났다는 기록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전, 11년 동안에는 날마다 함께 하시고 축복하셨던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착한 일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두 눈과 모든 관심은 이 아이에게로만 쏟아져 있었습니다.  이 아이 때문에 그는 자신을 축복하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향해 그의 눈이 열려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기간은 아브라함이 사래로부터의 자녀를 갖는 것을 단념하고 이스마엘과 함께 살기를 원했을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마음을 창세기 17장 18절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긴 지체는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한데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영적으로 암흑기요, 절망 상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상황 앞에서 무엇인가 깨닫는 바가 없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도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아 누리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만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내 생애를 향해서 가지신 놀라운 계획과 축복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주신 것만을 보고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합니다.  내 앞에 펼쳐진 이 은혜와 축복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 버립니다.  이 상황, 이 좋은 상황이 천년만년 갈 것처럼 믿으면서 하나님의 관심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눈으로 볼 때에는 도무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생애,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아무런 사건도 아닌, 그저 성경에 기록한다면 잘 태어나서 잘 먹고 잘 자다 잘 죽었다고 그의 한 평생이 이 네 마디로 요약된 참으로 의미 없는 생애로 가고 말 겁니다.  하나님 눈 앞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존, 사랑하는 여러분, 동물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그런 삶으로 우리의 생애는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우리 삶에 진정한 역사는 없습니다.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눈 앞에 보이는 아이에게 마음이 뺏겨서 하나님이 자기 생애를 향해 부르신 약속을 잊어버렸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다른 것 다 안 주셔도 좋습니다.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여기 있는 이스마엘이면 족합니다.  또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점점 더 둔감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 구절을 원문으로 해석하면 "아브람에게 찾아오셨으매"입니다.  히브리 말은 위에서부터 내려오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에 22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고 합니다.  찾아서 내려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올라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다는 이 말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언제 찾아오셨습니까?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아브람의 이 나이는 그가 하란을 떠나온 지 25년째가 되던 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나이는 후손에 대한 소망이 완전히 단절된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언제 찾아오셨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던 소망이 완전히 단절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 때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절망적인 순간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비로소 역사하시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으십시오.  그 옛날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던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절망 중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다시 한 번 축복을 확인시켜 주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도 찾아오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나의 생애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은 성경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기록입니다.  성경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쓰인 단어 중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습니다.  그 모든 하나님에 관한 기록을 줄이고 줄여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이신 하나님은 인생을 향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셨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스마엘에만을 만족했지, 하나님께서 자기 생애에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에 대해서는 외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에만 만족했지 그를 향한 더 크고 놀라운 계획을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찾아오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아, 너는 왜 내가 준 조그만 축복에만 만족하고 있느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네 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 같으냐?  지금 그 아이로 네 마음이 만족하느냐?  나와 시선을 마주쳐라.  너는 네 아들 이스마엘만 보지 말아라.  네 눈을 들어 너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바라보아라.  네가 바라보는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리고 나를 보면서 내가 너를 부른 그 완전함으로 네 인생의 행보를 바꾸어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나를 향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 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하고, 네가 너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 보다 내가 너를 더 염려하고, 네가 네 인생을 향해서 계획을 가진 것 보다 나는 너를 향해 더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네 눈을 들어 나를 보아라.  그리고 내가 너를 이끌고자 하는 영광스러운 땅을 향해 함께 가자꾸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계시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아직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축복된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내 눈앞에 있는 그 무엇으로 만족해하십니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과 같은 것들 앞에 여러분의 인생을 걸고 있지는 않습니까?  죽은 사람은 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 내어야 염을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은 밥 한 톨도 가지고 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들풀과 같은 유한한 것들에 인생을 걸고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더 큰 것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땅을 향해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과거에 주셨던 번성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이 약속은 너와 나 사이에 약속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너는 내 약속의 상대가 아니라고, 너는 그 약속을 감당할 능력이 없기에 내가 내 존재를 걸고 그것을 이루리라고 약속했다고 말씀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엄마 아빠는 그 아이가 도무지 그 의미를 모를 때부터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리라고, 이렇게 교육시키리라고, 자녀가 살아가는데 이런 뒷받침을 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면서 맹세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런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본문 5절을 같이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람이라는 말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 모든 나라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했다.  존귀한 것으로 만족할 것이냐?  이름을 바꾸어라.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다.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엣'에서 두 주인공이 사랑을 속삭이는 가운데 로미오가 장미꽃을 선사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아마 이 장미꽃은 장미라는 이름이 없었어도 이 아름다움과 향기는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에게는 무엇이든지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도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시면 부름이 됩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명령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천지를 불렀더니 천지가 그 앞에 옵니다.  아담을 불렀더니 아담이 옵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아브라함이라,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  내가 너에게 약속했지 않느냐?  네 후손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편만할 것이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에게 주리라.  너는 지금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네 생애가 바꾸어져야 된다.  네 이름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다.  내가 불렀다.  내가 부른 대로 된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에게서 아랍 족속이 태어났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예입니다.  그리고 아랍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무슬렘 12억이 아브라함을 자신의 선조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후손들이 유대인으로 온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브라함의 후예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후사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 땅의 15억도 넘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60억 인구 가운데 반수 이상이 자신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부르시매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아브라함보다 더 큰 이름은 없습니다.  그는 성을 짓지도 않았습니다.  큰 땅을 정복하지도 않았습니다.  큰 땅을 정복하기는커녕 자기가 죽어서 묻힐 한 평 밖에 안 되는 막벨라 굴을 무덤으로 소유한 것이 그의 전부였습니다.  그의 눈 앞에는 아들 하나와 약속된 손자 둘 외에는 후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찾아오시고 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이 지금은 온 세계에 차고 넘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대로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천년 후였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요한이고,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이 친구는 변덕이 많은 친구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친구는 수완이 좋아서 동료들 사이에서도 우두머리 노릇을 했습니다.  20대 후반 되는 어느 날, 자기 동생에게 이끌려 나사렛 사람 목수의 아들 예수를 만납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후에도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고기를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아서 허탈하게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 목수의 아들 예수가 자기에게로 오더니 명령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눅 5:4)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자기도 형용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힘에 이끌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자기 상식과 정반대였습니다.  낮에는 고기가 잡히지도 않을 뿐더러 더욱이 깊은 곳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그가 그 분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는데 끌어올리니까 잡은 것이 얼마나 많던지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배 뿐 아니라 이웃 배에까지 가득 채워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뛰어내립니다.  그리고 예수께 나아와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그렇지만 주님은 이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시몬아 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쫓으라."  그는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를 쫓았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부터 시몬이 아니라 베드로다.  변화무쌍하고 흔들리는 물결 속에 살았던 인생이 아니라 이제는 반석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 시골 무식쟁이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반석이라고 주자마자 15억 인구의 신앙의 초석으로 그의 생애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앙의 위대한 선조들 가운데는 겉보기에는 참으로 초라한 분들이 계십니다.  이기풍 목사님, 그 분은 조폭 두목이었습니다.  그는 종종 선교사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빰을 맞고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선교사님의 얼굴에서 평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렇게 매를 맞고도 흔들림이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해서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에 처음 선교사를 파송할 때 초대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인생이 순교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이 계십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만나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가 설교를 하러 나타나면 키가 너무 작아서 설교단에 가려서 잘 안 보인다고 합니다.  과거에 생전에 손양원 목사님께서 시무하셨던 여수 애양원에 갔을 때 목사님의 사진을 보니까 실제 키가 무척 작았습니다.  과거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미수다에서 어떤 한 여대생이 남자의 키가 180cm 이하는 루저(loser)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키가 작으면 실패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역사상 위대한 인물은 다 키가 작았다는 사실입니다.  나폴레옹, 등소평, 박정희 대통령, 손양원 목사님도 키가 작았습니다.  그러니 키가 작다는 것 때문에 콤플렉스를 가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놀라는 것은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그 목소리에 놀란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에 놀랍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에피소드 가운데 제일 재미있는 것은 그 분이 강사로 초대 받아갈 때 기차에 내리면 너무 초라해서 마중 나온 사람들 중 아무도 그 분이 손양원 목사님인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중 나와서는 눈을 부릅뜨고 봐도 설마 저 분이 그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인가 할 정도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르셔서 주님의 뜻 안에서 그의 생애가 펼쳐지니까 그의 삶이 사랑의 원자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생애를 의미 없이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살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삶 속에 끌어내셔서 아브람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부르듯이,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으로 부르듯이 내 인생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멋진 인생으로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나이가 많다고 변명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나이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습니다.  조그마한 성취를 했다고 적은 아들로 만족하십니까?  하나님은 그 적은 아들로 만족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리다고요?  나는 능력이 없다고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내가 너에게 약속했고 그 약속을 내가 너의 생애를 통해서 이루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너무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너무 초라하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한계에 갇혀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초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네 한계를 벗어나서 내가 네게 지시한 인생을 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전능하신 하나님, 그 분의 부름 앞에 내 생애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이 부르시면 그대로 됩니다.  그 분이 계획했으면 그 분이 책임지시고 이루어 주십니다.  그 분은 전능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한계 속에 갇혀 사는 내게 우레 소리처럼 들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애로 나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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