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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난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 (시 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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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 (시 80:1-19)


3월 11일 일본에 일어난 9.0의 대지진으로 세계가 일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규모 방사선 유출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재난”이라고 합니다. 이런 재난을 보면서 지구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야 달력에 근거하여 종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는 2012년 12월21일 지구가 종말한다고 주장합니다. 과학자들은 "2013년 가공할 태양 폭발"이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피해 복구에도 약 1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합니다. 활동 극대기는 2013년 5월쯤 정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태양 폭풍이 극도로 강해지면 지구에 엄청난 전자기 펄스가 쏟아져 전력망을 붕괴시키고 무정부 상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2029년에는 '아포피스' 소행성이 지구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만약 직경 300m의 아포피스가 지구와 충돌하면 대재앙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를 어떻게 모면한다 치더라도 언젠가 치료제가 없는 전염병이 창궐할 수도, 핵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에 착안하여 미국에 종말에서 당신을 지켜줄 럭셔리 지하벙커가 생겼다고 합니다. 지구 종말에 대비한 집이라고 합니다. '테라 비보스 (Terra Vivos)'라는 벙커라고 합니다. 지진 10도 파괴되지 않고 50메가톤급 핵폭탄이 폭발해도 견딜 수 있고 시속 725㎞의 강풍이 불어도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지면 온도가 10일 동안 676℃로 유지돼도 안전하며 홍수가 일어나도 3주일을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최대 135명의 사람들이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식량과 의류가 비축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태양이 언젠가는 식어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전에도 크고 작은 재난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재난의 유형은 첫째는 자연 재난이 있습니다. 태풍, 호우, 토네이도, 지진, 해일, 설해, 화산 폭발 등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입니다. 그 원인이 자연 법칙에 의해 일어납니다. 중력의 법칙과 공간과 물체의 상호관계(相互關係)에 관한 법칙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 없이 적용되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인위 재난이 있습니다. 문명발달과 공업화에 따른 인공물에 의한 돌발적 사태를 맞는 재난입니다. 핵 방사능 사고, 위험물, 가스폭발 사고, 건물 붕괴, 화재 등과 같은 재난입니다. 이런 재난은 무지나 부주의에 의해 발생할 때가 많습니다. 

셋째는 사회 재난입니다. 현대 사회 구조 여건 등에 의해 사회 구성원간의 갈등으로 인간의 의도에 의해 일어나는 재난입니다. 미국 LA 폭동, 오클라호마 연방 청사 폭발사건, 일본 동경 사린가스 살포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등입니다. 상호관계(相互關係)에 기인된 재난입니다. 정치, 종교, 국가와 국제적 관계의 갈등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재난입니다. 

이런 다양한 재난을 만나면 신앙인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시편 80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기를 원합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재난 앞에 어떤 자세를 가졌습니까? 나라가 망하는 재난입니다. 앗수르가 쳐들어와 BC 722년에 망하였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죽은 가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 하나 낳아 놓고 전쟁터에 나갔다 죽은 남편을 둔 새댁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갔다 한쪽 팔을 잃은 가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평생동안 살았던 집이 불타버린 집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농토를 빼앗기고 전쟁 포로로 잡혀갔을 것입니다. 누이기 겁탈당하고 아내가 겁탈당한 가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의 상황을 어떻게 묘사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슬픔의 나날들을 보내었다는 말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었습니다. 앗수르 뿐만 아니라 수리아, 모압, 암몬, 에돔 등이 서로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비웃음을 당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었다고 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불타고 베임당하고 멸망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재난으로 생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어 버렸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리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평화가 살아졌습니다. 마음대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가족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런 재난 앞에 시편 기자는 어떻게 합니까?

재난 앞에서 기도합니다. 어떤 기도를 합니까? 3절, 7절, 19절 후렴구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을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 우리는 재난 앞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주의 능력으로 구원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1-3). 

우리는 재난을 당할 때 대부분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합니까?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어디에"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시편기자고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이십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려 구덩이에 들어가는 죽음의 재난을 당했을 때도 구원해 주었습니다. 요셉이 이국땅에 노예로 팔려가는 재난을 당했어도 보호해 주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재난을 당했을 때도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국무총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우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빛을 비추어 생명을 살리시고, 어둠을 거두어 내고, 갈 길을 보여주고 따뜻함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나라가 망하는 재난을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재난을 당할 때 그 때 이유를 물으며 원망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시80:2)”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대표적인 북쪽 이스라엘의 지파들입니다. 지금 전쟁의 패배로 재난을 당한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어 구원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태풍과 쓰나미, 지진과 같은 자연 재난 즉 천재 앞에서, 방사능 사고와 같은 인재 앞에서, 전쟁과 같은 사회재난 앞에서 재난에서 생명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힘으로 말입니까? 주의 능력으로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다시 일으켜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밝은 얼굴 빛을 보면 우리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재난에는 인과응보적인 재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상섭리에 의해 일어나는 재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통상섭리와 비상섭리가 있습니다. 우주의 법칙을 만드시고 운행하게 하는 것을 통상섭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왜 지진이 나는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5대양 6대주가 17개이 움직이는 판 위에 더 있어 이판의 움직임에 따라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 폭발이 일어나며 산과 산맥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지구 체온 유지되고 석유가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인류 문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판(板) 때문에 지구 대기운동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판구조운동이 지구의 체온을 항상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화산활동이 만든 다량의 이산화탄소. 화산활동은 지구 깊숙이 있던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으로 뿜어 올려 지구의 복사열이 우주로 나가는 것을 막아 지구를 따뜻하게 하는 온실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데워진 바다에서는 기화가 활발히 일어나고 이는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내린다고 합니다. 사람이 신진대사를 통해 36도 안팎의 체온을 유지하듯 판구조운동도 지구의 신진대사를 돕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의 '혈액'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도 판구조운동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다에 살고 있는 플랑크톤과 유기물이 죽어 땅속 깊이 들어가 석유로 숙성된다고 합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이는 판구조운동이 인류 문명을 쥐락펴락한다는 것입니다. 태풍 때문에 많은 재난을 당하지만 태풍이 없으면 바닷물이 죽는다고 합니다. 태풍으로 바닷물에 산소가 원활이 공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난이 일어나는 원인을 잘 모르지만 재난 앞에 인간의 연약성을 깨닫고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와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연단으로서의 재난이 다가오면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훈련을 받아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하게 인과 응보적 재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욥은 심각한 재난을 당하였습니다. 

성경은 욥에 대하여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 1:1)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은 그 엄청난 재난 가운데서도 신앙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정죄하는 친구들의 허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 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내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난이란 용광로를 통과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주권적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판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힘은 동물이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지진과 같은 자연 재난을 하나님의 경고이자 은혜의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난을 통해 여러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시대적인 경고를 합니다. 재난을 통하여 인간의 연약함과 교만을 깨우쳐 줍니다. 

C. S 루이스 교수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답니다. "선생님, 이 세상에는 왜 그렇게 고통과 재난이 많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왜 인간에게 고통을 많이 준단 말입니까?" 그러자 루이스 교수는 "형제여, 그러잖아도 교만한 세상과 인간들에게 고통과 재난마저 없다면 얼마나 더 교만하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재난 속에서 인류에게 보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도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연에 대하여 지배자, 파괴자가 아니라 청지기로 서야 합니다. 사회와 국가의 불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 종말 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노아 홍수, 소돔성의 재난 등 수많은 재난을 통해 경고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7-10)고 말씀하십니다.


2. 우리는 재난 앞에서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며 우리의 눈물을 씻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4-7).

비극적 재난을 당하면 신앙인들은 대부분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합니까?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어디에"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아! 죄로 인해”라는 깨달음이 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내 사업이, 내 나라가, 내 교회가 죄로 인해 이런 재앙이 왔다고 깨달음이 올 때가 있습니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때로는 재난이 인간의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간의 실수로 주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제동 활동 양식으로 주어질 경우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해산과 노동의 고통이 인류에게 끼어들어 왔습니다. 다윗은 유부녀와 간음하여 아들을 잃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지진으로 인한 멸망은 범죄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죄에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지만 이런 신학적인 죄 말고도 법적인 죄, 사회적인 죄, 심리적인 죄 등 다양한 죄가 재난을 불러 옵니다. 

성경은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3:12)"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난이 다가올 때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회개하고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고 하나님께 눈물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그 때 북쪽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세 가지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왕상13장 25-33절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첫째가 두 마리의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그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세워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둘째는 보통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유다에 제사장이 있고 이스라엘에는 없으니까 임의대로 세운 것입니다. 

셋째는 절기의 날짜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말하면 하나님보다 이익이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보다 편리가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보다 쾌락이 우선순위입니다.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원전 사고도 설계한 사람이 잘못 설계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이유가 도쿄전력이 손해배상을 염두에 두고 미국의 지원을 거절해서 더 커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쿄전력이 고가의 자산이 손상될 것을 우려해 해수 투입을 늦게 하는 바람에 문제를 더 키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 무엇입니까? 큰 이익보다는 작은 이익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의 늪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초대왕 여로보암부터 19대 왕 호세아 왕까지 210년 동안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뜻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혁명을 일으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백성들은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농사를 잘 지으려면 비가 필요한데 바알과 아세라 신이 비를 내려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이 성적 관계를 가지면 살아나 비를 내려준다고 믿어 산당에 미동들을 두고 성적 관계를 유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망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비참함을 토로합니다. 눈물의 양식을 먹고 많은 눈물을 마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고 아픔의 눈물, 고통의 눈물일 것입니다. 이웃들의 다툼 거리가 되고 비방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재난이 다가 오면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길이 진정 사는 길인 것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우리 눈물을 다 거두어 주십니다. 하나님께 희망이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 어느 목사님이 일본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지진이 일어났고 말했다고 여론의 몰매를 맞았습니다. 도쿄도 지사가 "이번 쓰나미를 이용해 탐욕을 한번 씻어낼 필요가 있다. 천벌이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았습니다. 이재민을 행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런 재난이 다가 올 때 우리 신앙인들은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더 높은 이자 수익과 환차 수익을 얻기 위대 돌아다니는 탐욕스런 돈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경제쓰나미를 당하고 있습니까? 이제 이데올로기에 의한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지금은 경제 패러다임의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경제를 기본 골격으로 짜여지고 있습니다. 

21세기는 극단적 물질주의 시대가 되리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자유로운 무역'과 '무차별적 시장개방' 으로 세계 질서는 경제 논리에 의하여 결정되고 지배되고 있습니다. 무서운 경제 전쟁에서 자본이 결국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소돔 고모라의 백성의 몰락 속에서 하나님은 의인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을미사변이 있을 당시 전국 교회는 채 30여개에 지나지 않았고 교인 수는 1천명 미만이었으나 교회는 민족의 위기 앞에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독립과 민족 정신을 이끌어 갔고 3.1 운동을 통하여 국권 회복에 앞장을 섰습니다. 당시 조선 총독부가 남긴 비밀 문건 속에는 "이 민족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있다면 그것은 조선의 교회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기독교는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재난, 쓰나미는 경제적인 것보다도 도덕적인 쓰나미이며 신앙적인 재난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이 재물 우상을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교회가 더 이상 재물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을 슬프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제일 주의의 신앙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구조 조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도의 변혁이 문제가 아닙니다. 의식의 대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을 최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삶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정신이 구현되어야 합니다. 

경제정의가 없는 경제 정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경제력의 집중으로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었고, 실업자는 대량으로 발생하였습니다. 물가는 불안하여 양곡 도매가격이 영국에서는 500%, 프랑스에서는 700%, 스페인에서는 그 이상 상승하였습니다. 식량 폭동이 일어나고 고리대금업자, 상인의 창고와 집은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회는 돈만 있으면 선교 및 구제는 물론 지옥에 있는 영혼까지도 천국으로 올릴 수 있다는 배금 사상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교회는 유럽 토지의 1/3 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금전놀이, 성직매매, 각종 세금으로 서민을 착취하였고 사제들은 큰 규모의 교회를 맡으려고 이전투구를 하였습니다.
결국 종교개혁을 통하여 시대는 새로워졌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종교 개혁을 통하여 시대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처럼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가는 길이 우리의 살길이고, 가정이 살길이고, 교회의 살길이고, 민족이 살길입니다. 


3. 우리는 재난 앞에서 어떤 경우도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소성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8-19).

재난은 단순히 잘못 때문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상섭리 가운데 옵니다. 그럴 때 그냥 아무 이유없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결과가 아니라 미래의 원인 때문에 오는 재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오는 재난입니다. 이런 재난을 우리는 속량적 재난이라고 말합니다. 죄로 인한 재난도, 섭리에 의한 재난도 아닌 속량적 재난입니다. 재난을 통해 특별한 목적 즉 하나님의 구원사적 은총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재난에 대하여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결국 하나님께서 메시야적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합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그러므로 해서 제사 제도가 무너집니다. 유럽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통해 회당이 생깁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이 높아집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류를 구속하시고 진정 하나님의 언약을 이 땅에서 성취하십니다.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을 이 땅에 모래알처럼 많게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노리니 우리를 소성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 의지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재난이 온다고 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사자굴이 있고 풀무불이 다가 온다고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처럼 끝까지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풀무불 앞에서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쉽게 죽지 않습니다. 재난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왜 그런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까? 과거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가져다가 가나안 7족들을 쫓아 내시고 가나안 땅에 심었다는 것입니다. 시작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시작이 가정의 시작이 교회의 시작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 이하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앞서 가꾸셨다는 것입니다. 앞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결과 뿌리가 깊이 박혔습니다. 땅에 가득찼습니다. 산에 무성하게 되었습니다. 백향목처럼 자라났습니다. 바다와 강까지 뻗혔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기업이 잘 성장하였습니다. 가정이 행복했습니다. 교회가 번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니까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어느날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담이 헐렸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죄악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튼튼한 보호의 울타리로 잘 지켜 주었기에 행복하였는데,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 행복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죄악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먹구름으로 막고 시들어 죽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이나 나라를 막론하고 죄악의 독소가 판치는 그 곳에는 참 성장과 번성이란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기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이제까지 수고한 열매를 다른 사람들이 다 수확을 해 가버렸습니다. 멧돼지들이 상해하고 들짐승들이 따 먹어 버렸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불타고 베임당하고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외면하지 마시고 포도나무를 돌보아 주십시오.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니 주님을 위하여 힘있게 해다라고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오른 손을 얹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주님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니 소생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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