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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믿으리요? (롬 10: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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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믿으리요? (롬 10:13-15)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어릴 적에 불렀던 노래 가운에 이런 동요가 있었습니다. ♪산 높고 물 맑은 우리 마을에 움돋고 꽃피는 봄이 왔어요. 한 겨울 땅속에 잠자던 개구리 바스스 잠 깨어 뛰어갑니다. 앞 내와 뒤뜰에 얼음 풀리고 남산에 쌓인 눈 녹아내리니 넓은들 잔디는 속잎이 나고 실버들 가지가 파랗습니다.♪ 지난겨울은 참으로 혹독한 계절이었습니다. 제 생애 중에 가장 많은 폭설로 기억이 되는 많은 눈이 내렸고, 한 달 이상씩 계속되는 추위도 대단했으며, 어느 해보다 긴 겨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드디어 꽃피고 새우는 따뜻한 봄이 왔습니다. 공자의 삼계도(三計圖)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생의 계획은 어릴 때에 있고,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있으며,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 어려서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고, 봄에 밭 갈지 않으면, 가을에 바랄 것이 없으며, 새벽에 일어나지 않으면, 그 날에 할 일이 없다.” “춘약불경(春若不耕)이면 추무소망(秋無所望)이요” 그렇습니다. 봄에 만약 밭을 경작하지 않으면, 가을에 바랄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봄이 돌아오면 농부들은 열심히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됩니다. 모든 인생은 농부와 같습니다. 갈 6: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신령한 농부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봄에 복음의 씨를 많이 뿌려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해피 데이를 앞두고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은 이 한 주간 동안 모두가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믿으리요?”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며, 또한 함께 도전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나라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서, 인류의 공통된 문제는 바로 죄에 대한 문제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크고 작은 수많은 종교가 출현했던 이유도,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한 목적에서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 결과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모든 불행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의 해결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남녀 노유 빈부귀천, 지식의 유무를 가리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여기 구원이라 함은 1)죄로부터 구원을 의미합니다. 죄는 크게 원죄와 자범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힘입어 원죄가 청산되며 또한 자범죄도 깨끗함을 얻게 됩니다. 2)율법의 저주에서 구원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인생들이 얼마나 죄인인지 또 구원에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공의의 거울입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선을 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는 행하지 못하는 자에게 사망과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순종으로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3)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의미합니다. 사탄의 궤계가 난무하고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은,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다만 성도에게는 상급을 위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을 얻게 하셨기에, 우리 같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과정도 없이 이방인이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자가 주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얻게 되는 과정을 본문 14-15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전파할 자를 보내셨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할 자를 먼저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셨으며,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70인의 전도인을 선택하여 파송하셨으며,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을 얻게 되는 과정 중 첫 번째는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이 없이는, 결코 어느 누구도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2. 모든 그리스도인은 전파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여기 전파하는 자란, 하나님의 대변자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70인의 전도대를 파송하시면서 그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전파하는 자의 권세를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반면에 그러한 권세를 지닌 대변자로서의 전파하는 자는, 한 가지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파하다.’ 라는 단어의 원어 의미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전파하다의 원어는 ‘알리다.’ 라는 뜻으로,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중개하여 알리는 사자의 행위를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사자는 알리라고 부탁 받은 것 이외에는, 덧붙여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되며, 변화시키거나 고쳐서도 안 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3. 들어야만 믿음이 생깁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믿음은 복음을 듣는데서 시작됩니다. 들어야만 믿음이 생깁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이 들음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이방인들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겸손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이 진리이며 생명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서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달랐습니다. 제일 먼저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졌으나,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들음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믿음은 듣는데서 출발합니다. 들어야만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자주 들어야만 합니다. 

주일 낮에도 밤에도 나와서 들어야 하고, 수요 밤 예배 때도, 구역 예배 때도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17절에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기도가 막히는 것과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열린 마음으로 받아 많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 반응만 일어납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도 뚜껑이 꼭 닫힌 빈 병은, 수십 년을 지나도 그 병속에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 문을 닫고 말씀을 듣게 되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열린 마음,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게 될 때라야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아름다운 발이란 비너스상 같은 여인의 발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축구 황제 펠레처럼 공을 몰고 운동장을 누비는 발을 가리켜 아름다운 발이라 하겠습니까? 결코 그러한 발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입니다. 왜 전도자의 발걸음이 그토록 아름답습니까?

1)기쁜 소식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들려오는 뉴스라는 것 중에 과연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 있습니까? 모든 인간에게 불변하는 최대의 소원과 욕망이 있다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일 것입니다. 진시황이 원하던 불로초, 한 무제가 원하던 불사약, 스탈린이 세포를 젊게 하려고 만들었던 원기소, 이 모든 것들이 다 영생 불사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천 년 전 예수를 찾아 온 부자 청년의 질문도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는가?” 그런데 복음은 생명을 구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올림픽의 꽃은 마라톤인데, 이 마라톤의 기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 전쟁에서 그리스가 이 이겼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어떤 청년이 25마일을 달려 궁전에 와서 전했습니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달음질하여 승전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승리의 소식을 들은 왕과 국민들은, 만세 소리를 외치며 기뻐서 춤을 추었습니다. 이 청년의 기쁜 소식처럼, 현대인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잠 25:5에도 “먼 땅에서 오는 좋은 소식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야말로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2)주님의 지상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주님의 가장 중대하고 긴급한 명령입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따라 바울과 바나바는 유럽을 향하여, 도마는 인도를 향하여, 마가는 애굽을 향하여 전 세계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윌리암 케리는 인도로, 저드슨은 미얀마로, 모리슨과 테일러는 중국으로, 리빙스턴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로,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람바네의 수풀로,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토마스 목사, 언더우드 목사, 아펜셀라 목사가 한국에 복음을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3)면류관을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그의 면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최봉석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그가 하루는 술 취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최 목사님은 그의 옷자락을 잡고 ‘예수 믿고 천당!’ 하고 말했습니다. 술 취한 청년은 ‘이 옷자락 못 놔!’ 하면서 악을 썼습니다. 그러나 최 목사님은 놓지 않고 ‘예수 천당!’ 하니까 술 취한 청년이 최 목사님의 멱살을 잡고 씨름판에서 적수를 둘러엎듯이 내던졌습니다. 그래도 놓지 않고 ‘예수 천당!’ 하니까 청년은 발길로 최 목사님을 걷어찼습니다. 

지나가던 면서기가 그 광경을 보고서 부모 같은 분에게 이 무슨 짓이냐 하며 청년을 때렸더니 술 취한 청년이 도망 가버렸습니다. 그러자 최 목사님이 일어나면서 면서기에게 “여보 당신 때문에 면류관 하나 잃어버렸소. 당신이 대신 예수 믿어 주어야 하겠소!”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이 주님 앞에 섰을 때 과연 면류관을 몇 개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애플 컴퓨터의 공동 창시자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그의 회사의 초기에 성장이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을 때, 효율적인 마케팅 전략을 짜기 위해 고민하던 어느 날, 당시 펩시콜라 CEO였던 존 스컬리(John Scully)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자기 회사로 영입하기 위해 찾아 갑니다. 존 스컬리는 38세에 펩시 콜라의 사장이 된 사람으로, 펩시 세대를 공략하는 광고 전략으로 코카콜라를 부동의 제1위 자리에서 추락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존 스컬리는 충분한 명예와 재산을 누리고 있었기에, 이제 새삼스럽게 자리를 옮길 이유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존 스컬리에게 집요하게 설득하고 막대한 보수를 제안해도 움직이지 않자, 이제 44세 된 그에게 스티브 잡스는 마지 승부수로 이런 도전적인 말을 던집니다. “당신은 설탕물이나 팔면서 여생을 허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신을 던지시겠습니까?” 이 말이 그를 움직이게 해서 존 스컬리는 마침내 스티브 잡스의 동업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동일한 도전장을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여생을 지금까지 살아오신 그렇고 그런 방식으로 적당히 살다가, 시시하게 살다가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주님의 명령과 모범을 좇아,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전도에 헌신하시겠습니까? 

좋은 것을 혼자만 알고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돈 버는 비결은 혼자만 알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혼자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불치의 병인 암에 걸렸습니다.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이웃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느 곳에 가면 암 전문 의사가 있는데, 그 의사를 찾아가면 십중팔구는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달려갔습니다. 그 의사로부터 치료를 잘 받은 암환자는 6개월 만에 암 병에서 치유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암에 걸린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자기를 치료해준 그 의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암환자들이 그 의사에게 찾아가 치료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죄악의 암 병으로부터 우리를 치료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값없이 거저 받았다면, 더 더욱 그 분을 알리고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분이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모두 전도자다. 전도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 단지 전도하는 전도자와 전도하지 않는 전도자가 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다수의 신자들은 전도하지 않는 전도자로 지내고 있으면서, 교회의 부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될 말입니까? 어떻게 일 년에 한 사람도 전도하지 않고, 교회의 부흥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복음이 정말 기쁜 소식이라면, 그리고 여러분이 교회의 부흥을 정말로 갈망한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음 주일 해피 데이를 앞두고 반드시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맨 발의 천사 최춘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최춘선 할아버지는 30년이 넘게 전철에서 전도를 한 분입니다. 최춘선 할아버지는 자신만의 독특한 전도지를 동네 전봇대에 붙여놓고, 엉성하게 종이에 쓴 영생복락, 예수천당, 만인구원을 온 몸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큰 목소리로 “미스터 코리아 안중근, 미스 코리아 유관순”이라며 “Why Two Korea?” 라고 소리쳤습니다. 유관순과 안중근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왜 두 개의 코리아로 분단된 조국이 있겠느냐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최춘선 할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신을 신겠다며, 영하 10도의 추운 겨울에도 신발을 신지 않고 30년을 맨발로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기도 했던 이 할아버지는, 1960년대에 승용차가 다섯 대나 될 만큼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내 돈 아니고 하나님의 돈”이라며, 수십만 평의 땅을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정부 보조 없이 수백 명의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독립유공자이기도 하기에, 도장만 찍으면 연금이 나오고, 오남매가 대학까지 무료로 다닐 수 있는데도,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과 북의 분단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고, 보상을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는 마침내 수원행 전철에서 전도를 하고는, 의자에 앉아 조용하고 평화롭게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전도하다가 죽겠다는 평생의 소망과 사명을 그대로 이룬 것입니다. 자녀들은 최춘선 할아버지를 대전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셨는데 ‘애국지사 최춘선의 묘’ 라는 비석에는 이런 비문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일제 치하 암흑기에는 나라의 광복을 위해, 광복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과 평화를 꽃피우기 위해 애쓰신 맨발의 전도자 아버님의 그 뜻과 믿음을 저희 자손들이 이어받겠습니다.” 최바울 목사는 왜 아버지가 그런 길을 가셨는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그러셨지요. 내가 미친 게 아니라 너희들이, 사람들이 미친 거다. 예수를 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느냐?” 여러분! “예수를 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느냐? 이 말이 이 시간 우리의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어서 깊이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심판과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떻게 복음을 듣고 주님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분명히 들음에서 나오는데,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한 주간 동안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해서, 몇 사람의 생명이라도 꼭 살려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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