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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종하시는 하나님 (시 1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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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종하시는 하나님 (시 116:1-2)


1.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자세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어떤 자세로 들으십니까? 일반적으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자세는 크게 4가지라고 합니다. “첫째,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는 경우로 전혀 듣지 않는다. 둘째, ‘응, 그렇지, 맞아’ 등 맞장구를 치면서 듣는 체만 한다. 셋째, 대화 중 자신이 듣고 싶은 부분만 듣는다. 넷째, 상대가 하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하여 듣는다.” 이 가운데서 우리가 지향해야할 자세는 네 번째일 것입니다.

『서른과 마흔 사이』라는 책을 지은 ‘오구라 히로시’는 듣는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최고의 선물은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傾聽者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를 들 수 있다. 사생아라는 핸디캡과 성폭행으로 불우한 청소년 시절을 보낸 그녀는 현재 세계 105개국에서 방영되는 토크쇼의 여왕이자 잡지, 케이블 TV, 인터넷을 거느린 하포(Harpo, Oprah) 주식회사 회장이 되었다. 

무엇이 오늘의 그녀를 만들었을까? 그 대답은 바로 눈과 마음을 기울여 진심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그녀의 자세에 있다.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면, 1시간 동안 그녀 자신이 말하는 시간은 10분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50분 동안 그녀는 게스트가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온몸으로 공감을 표현한다. 개인적으로 감추고 싶은 이야기일지라도 그녀 앞에서는 못 털어놓을 이유가 없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지켜주며 위로하는 그녀의 탁월한 소통 능력 때문이다. 그녀의 진심은 사람을 움직인다. 오프라가 추천하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보육원이나 양로원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면 바로 다음날 수십억의 기부금이 몰려든다. 사람을 진심으로 내 편으로 만들고 싶다면 오프라처럼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 원수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와 반대로 계속 당신의 이야기만 하라.” 오구라 히로시의 말은 오프라 윈프리처럼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이 바르게 듣는 자세를 초등학교 1학년부터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저도 이번에 안 것인데요,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바르게 듣는 자세”라는 것이 있더라고요!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바른 자세로 듣기 (1)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듣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보며 들으면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옵니다. (2) 무슨 말을 하는지 내용을 생각하며 듣습니다. 

(3)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고 듣습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4) 딴 생각을 하지 않고 듣습니다.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아도 딴 생각을 하면 무슨 말을 하는지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2. 바른 자세로 들었을 때의 좋은 점 (1) 들은 내용을 빠뜨리지 않고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2) 들은 내용을 쉽게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공부를 잘 하게 됩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것에 관한 교육을 받는데도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런 우리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자세는 아주 놀랍습니다. 즉 우리는 이렇게 듣는 자세가 불량하거나 문제가 많은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는 자세는 다르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이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한 번 보실까요?

2.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자세

시편 116편은 “할렐루야!”로 끝나는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인은 아주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구했고,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을 경험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이 시편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이 시편의 著者가 누군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본시의 내용이 고난을 많이 겪은 다윗의 정황과 비슷한 점이 많아,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다윗의 시라고 봅니다. 만약 다윗이 이 시편을 지었다면,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자신을 반역하여 亂을 일으켰고, 그로 인하여 벗은 발로 황급히 도피한 일과 자신이 왕궁을 비운 사이 압살롬이 天人共怒할 짓을 저지르는 등 인생의 엄청난 위기에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으신 사건을 경험한 후 이 시를 지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본 시편은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첫째는 1절부터 11절로서 극심한 고통 중에 있던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후 그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12절부터 19절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그에 대한 보답으로서 서원을 이행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116편 가운데는 성도의 음성, 성도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자세가 나타나있습니다. 본 시편에 나타나는 성도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1) 들으시는 하나님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절,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 그가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어려운 가운데 부르짖는 자신의 음성과 간구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너무나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오직 하나님께 정말 다급하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이 말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태도가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이것이 왜 특별할까요? 여기에 나오는 “듣다”는 말은 원어로 “샤마”라고 합니다. 이 “샤마”는 성경 전체 뿐 아니라, 신명기에 자주 나오는 단어입니다. 특히 신명기 6장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하는데, 이것은 성경원어로 “샤마 이스라엘”입니다. 그때 쓰여진 “샤마”는 신명기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말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듣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해하다’입니다.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이자, 『마음을 사로잡는 경청의 힘(도서출판 이아소)』의 저자인 ‘래리 바커’와 ‘키티 왓슨’이 20년 이상 인간의 듣기 습관을 연구한 결과, 사람들은 남의 말을 들을 때 ‘행동 지향’, ‘내용 지향’, ‘시간 지향’, ‘사람 지향’ 등 4가지 성향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행동 지향적인 聽者의 경우’는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다른 사람이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춰 간결하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주의가 산만한 話者를 참지 못하고,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결론을 내리거나 무례한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용 지향적인 聽者’는 대개 專門家나 확실한 情報通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을 좋아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정보도 즐겨 들으며, 모든 내용을 신중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지나치게 세부적인 것에 집착하고,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에게서 들은 정보는 잘 믿지 않습니다. ‘시간 지향적인 聽者’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남이나 대화에서 시간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정해 놓습니다만,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을 참지 못하고 대화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지는 편입니다. ‘사람 지향적인 듣기 성향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고 배려할 줄 알며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지 않으나, 말하는 사람의 감정에 너무 쉽게 휘말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약점을 잘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샤마”라는 말에 있는 ‘듣다’는 의미는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그 말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이해하는 것입니다.  “샤마”의 두 번째 의미는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다’는 뜻입니다. “傾聽”이란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가지고 그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 말과 행동이 뜻하는 것과 가치에 주의를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가 말하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소리에 담겨있는 뜻과 의도와 마음과 감정에까지 귀를 기울이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즉 “샤마”는 말하는 이의 마음, 그의 생각, 그의 內面, 그의 영혼의 소리까지 듣는 것입니다.  “샤마”의 세 번째 의미는 ‘순종하다’입니다. 사실 신명기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이 순종의 “샤마”입니다. 순종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聽從”이라는 한자어의 의미 역시 ‘잘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명기를 비롯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福을,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詛呪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까지가 듣는 것이라는 말이죠. 

여러분, 제가 왜 이 “듣다”는 말을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는지 아십니까? 신명기를 중심으로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자세가 바로 이 “듣다”는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의 내용을 잘 파악하여 이해해야 하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까지 듣는 것, 그리고 들은 바 말씀을 순종하는 것, 이것이 성도인 여러분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듣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복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놀라운 이유는 創造主이시고 萬王의 王이신 하나님께서 被造物인 인생에게 ‘이렇게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被造物인 인생에게 ‘내가 이렇게 들으마’라고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라는 말씀은 저와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말을 잘 들으시고 그 말의 내용을 잘 파악하여 이해하시며, 말하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內面과 영혼의 소리까지 들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으로부터 들은 말을 그대로 순종, 즉 실행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올바른 듣기를 우리 자신은 잘 이행하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소리를 들으실 때 그와 같이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2)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놀라운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2절,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에 나오는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라는 말에 담겨 있는 의미 역시 아주 놀랍습니다. 여기서 “기울이다”는 말은 ‘내뻗다’, ‘늘이다’, ‘구부리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손이나 지팡이를 물위로나 하늘을 향하여 내뻗었을 때 이 말을 썼습니다. 이사야서에는 교만한 여인이 “늘인 목”, 즉 목에 힘을 주고 꼿꼿하게 세워서 걷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말은 사람이 상대방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자세로서, 몸을 상대 쪽으로 기울이거나, 혹은 귀를 쫑긋하여 듣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데, 그 모습이 마치 토끼 귀처럼 그렇게 쫑긋하게 세우고 기울여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림에서 보시는 대로 토끼의 귀는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아주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귀가 길고 몸에 비하여 매우 큰 형태임에도 쫑긋 서있는 것이 그 특징이죠. 토끼는 몸집이 그렇게 크지 않으며 강력한 발톱이나 날카롭고 큰 이빨이 없습니다. 즉 토끼는 적을 공격할만한게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토끼는 적이 나타나면 도망부터 가야합니다. 그런데 적이 다가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귀 때문입니다. 

토끼의 귀는 적이 다가오는 소리를 잘 듣기 위하여 발달되어 있습니다. 접시 안테나처럼 생긴 귀가 소리를 모아줍니다. 그래서 토끼는 어떤 소리가 들릴 때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의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라는 표현은 이 토끼 귀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들으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토끼처럼 당신의 귀를 쫑긋 세우고, 그것을 여러분에게로 기울여서 들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놀랍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시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이지요.

3) 성도를 후대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시인이 처했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3절,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다.” ‘사망의 줄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묶어놓은 것처럼 죽음의 고통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며, ‘스올의 고통이 이르렀다’는 말은 사망이라는 사냥꾼에게 쫓겨 이제 더 이상 사망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처해 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시인이 정말 절박한 죽음의 위기에 놓였었다는 말입니다. 

죽음이 그를 붙들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는 말이지요. 어쩌면 시인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4).” 이 기도는 정말 혼신을 다해 부르짖은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부르짖는 기도보다 더 간절한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절박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5~9).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5,6).”라고 노래합니다. 시인은 고난 속에서의 기도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의로우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7).” 시인이 자기 영혼을 향해 평안하라고 외친 이유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놀랍도록 후하게 대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간구했던 것보다,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풍성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무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후히 대접해 주셨다”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도 그렇게 厚待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후하게 대접하신다는 것은 시편 103편 8절부터 14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대로 처리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그대로 갚지 아니하셨기에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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