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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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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 15:21-28) 
  

발자국 소리만 나도 화들짝 놀라는 작은 새가 있습니다.
이름도 요상하게 ‘개똥지빠귀’라고 합니다.
이 새는 작고 겁이 많은 새이지만 자기 어린 새끼가 위험에 처하면 침입자가 가까이 올지라도 그 둥지를 떠나지 않고 새끼를 품고 있는 답니다. 
눈을 부릅뜨고, 새끼를 지키다가 잡아먹힌 답니다. 

모성애!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사랑은 뭐니 뭐니 해도 어머니의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자상한 돌봄으로 육신적인 평안을 누리고, 어머니의 기도로 영혼의 안식을 얻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딸의 질병 때문에 안타깝게 부르짖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이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1)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2)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3) “주여 옳소이다마는” 이라는 작은 제목을 붙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22절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여인은 소리 지릅니다. 
분명히 그 여인의 딸이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지 않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딸의 불행을 자기 자신의 불행으로 동일시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여인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어떤 사람이 불행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안됐다고 동정을 합니다. ‘어떻게 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느냐’고 동정은 하지만 그 불행은 그 사람의 불행일 뿐 나의 불행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면 금방 잊고 맙니다. 
그러나 그 불행을 자기 불행으로 여기고,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당한 것처럼 속상해하고, 내가 아픈 것처럼 입맛이 없고, 내 자식이 그렇게 된 것처럼 당황스럽고, 내 사업이 어려워진 것처럼 걱정합니다. 
바로 이 가나안 여인은 이런 유형의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교회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교회분위기가 좋다, 교회분위기가 따뜻하다는 칭찬을 많이 듣습니다. 
여러 교우들의 애씀이 큽니다. 
교회분위가 따뜻해지려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내 어려움으로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교회는 따뜻해질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족의식이라고 합니다. 

① 가족의식이란, 기쁨도 함께 슬픔도 함께하는 의식입니다. 

자식이 성적이 좋으면 부모는 마치 내 성적이 좋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자식이 몸이 아파 밥을 못 먹으면 부모는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나는 먹어야 살겠다.’고 맛있는 반찬을 만들지 않습니다. 
같이 굶는 것이 편합니다. 
함께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가족이기 대문입니다.

② 가족의식이란, 영광도 함께 수치도 함께하는 의식입니다. 

우리 가족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함께 영광스러워합니다. 
자식이 무슨 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책망을 받으면 아버지는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잘못 가르쳤습니다.’ 라고 빕니다. 
수치를 함께 받습니다. 
영광을 함께 받겠다고 하고, 수치를 당하면 슬그머니 물러서는 것은 가족이 아닙니다. 

교회에 이런 끈끈한 가족 의식이 없으면 새 가족들이 달라붙지 않습니다. 
왔다가 그냥 갑니다. 
저는 우리교회를 이런 사랑의 공동체로 계속 키우고 싶습니다. 
이것은 목회자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되지 않습니다. 
여러 교우 한분 한분이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길 때 이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이 가나안 연인은 딸의 불행을 자기의 불행으로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 외침이 간절했고, 그 기도가 필사적이었습니다. 
22절에서 보면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나를 살려달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어느 정도로 필사적인 외침이었느냐 하면 제자들이 너무 시끄러우니 어떻게 좀 돌려보내라고 예수님께 건의할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시절이었지요. 
시골교회에서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어른들을 따라 한 교우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집에는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된 어린 딸이 아랫목에 누워있었습니다. 
찬송을 부른 다음 시골 여전도사님이- 김유옥전도사님-그 아이를 얼싸안고 얼마나 울면서 몸부림을 치면서 기도하든지…. 

저는 '당신 딸이면 저렇게 간절하게 기도할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합니다. 
새벽 무렵 그 아이는 의식을 회복하고 살아났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기의 불행으로 알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응답해주신 기적이었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에서 속히 이루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두 세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기도제목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너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너희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여기고, 너의 시련을 나의 시련으로 여기고 기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때 하늘의 응답이 속히 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기도함으로 많은 응답의 체험을 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둘째,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그런데 23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호소에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렇게 사랑이 많다고 소문난 예수님이 그 부르짖는 여인에게 대답은 고사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하도 시끄럽고 귀찮아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귀찮게 소리 지릅니다.’라고 짜증 섞인 말씀을 드렸지만 주님은 ‘나는 이방인을 위해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찬바람이 일잖아요?

그렇지만 이 여인은 사람을 헤치고 무섭게 돌진하여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자녀의 떡을 어떻게 개들에게 던지겠느냐?" 
이 여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개’라는 욕은 유태인에게나 한국 사람에게나 똑같이 험악한 욕입니다.
이 정도 모멸감을 받았으면 보통사람 같으면 화를 내며 그 미친 딸을 잡아끌고 집으로 돌아갔겠지요?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같이 죽자. 이런 소리까지 들으면서 구차하게 살아야 되겠느냐? 예수 사랑 좋아하시네. 못 고치면 못 고친다고 하지 왜 사람을 무시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왜 그랬을까요? 
왜 주님은 때론 모른 체하십니까? 
왜 주님은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까요? 
그녀가 드린 기도가 잘못되었습니까?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은 기도가 어디 있습니까?
그녀의 경우가 급하고 중요하지 않았습니까?

자식의 질병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녀의 간절함이 모자랐습니까?
성경에서 어느 여자가 그녀보다 간절하게 기도했습니까?
그러면 무엇 때문에 침묵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침묵하심으로 그녀의 믿음이 어떠한 지를 시험하셨습니다.
요 6장에서 그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기 전 예수님은 빌립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지?” 
요 6: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 자신이 복안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지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빌립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질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대답을 늦추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얼마나 충성하는지, 시험하고자 시련의 터널을 지나게 하십니다.

할아버지가 외출했다가 돌아오시면서 사탕 한 봉지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손자에게 봉지채로 안겼습니다.
그리고 손자에게 ‘할아버지도 하나’ 하고 입을 벌리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사탕을 먹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손자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핏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손자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쩌다가 손자 녀석이 사탕 한 알을 넣어주면 할아버지는 손자의 볼에 뽀뽀를 하면서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내 새끼”라고. 

창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살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바치라고 하시려면 차라리 주시지 마시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독자를 그것도 100살에 얻은 독자를 바치라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 독자를 바치라고 한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여러분, 아시지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창 22:12절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기쁨이고, 탄복입니다.

교우 여러분! 간절히 기도했건만 시간이 지나가도 주님은 한마디 대답하시지 않고, 변화의 느낌은 없고, 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다고 느껴질 때 이 가나안 여인을 기억하십시오! 
주님 앞에 나온 사람치고 빈손으로 허탈하게 돌아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셋째 “주여 옳소이다마는”

이제 우리의 시선을 27절에 집중해봅시다.
“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우리에게 이 가나안 여인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점은 바로 이 ‘마는’이라는 조사 때문입니다. 
이 ‘마는’이라는 조사는 합리성과 타당성과 논리성을 뒤집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생활습관을 볼 때도 자녀가 먹을 빵을 개에게 던져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역사적으로도 그렇겠지요! 

언제 유대인이 이방인들과 상종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네요! 
이 가나안 여인은 자기의 운명을 부인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거절 받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주님께서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결코 그런 분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어느 부흥사는 ‘신앙은 억지다. 새벽기도란 곤히 잠자는 하나님을 귀찮게 하여 억지를 피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자기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억지를 피운 것입니다. 
이것이 이 여인의 무서운 점입니다!
그녀는 분명히 믿었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왜 실망합니까? 왜 낙심합니까? 왜 좌절합니까? 왜 자꾸 흔들립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실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꾸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기분이 울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가만히 앉아 저의 마음 상태를 분석합니다. 

‘내가 지금 실망하고 있는데, ① 바깥 상황이 내가 실망할 정도로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인가? ② 아니면 내 속의 믿음이 조그마한 일에도 당황할 만큼 약해졌기 때문인가?’ 
곰곰이 따져보면 바깥 상황은 그렇게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어려운 때도 잘 견뎌 나왔거든요!
여러분! 유행가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이 노랫말처럼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떴어요.
그런데 가슴이 움츠려드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막9:14-29에는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하는 얘기가 (22절)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입니다. 
그 아버지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이 집의 문제는 육체가 병든 아들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병든 아버지가 문제로구나!’ 
이 집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육체가 병든 아들을 고치는 것보다 정신이 병든 아버지를 고쳐야 하겠구나! 라고 판단하시고, 주님은 병든 아이를 제쳐놓고 아버지께 도전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아버지가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이었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믿는다면 치료는 확실한 것이며. 그 아버지가 믿지 못한다면 치료는 될 수 없습니다. 
그 아버지가 가슴을 치며 호소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 아들을 고쳐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께서 분명히 빈손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경멸에도 불구하고 억지를 피워 승리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결국 이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 말씀을 듣고 얼마나 기뻤을까요? 
나은 딸을 붙들고 껑충껑충 뛰었겠지요? 
그 여인의 주위에는 그와 비슷한 문제를 가진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여인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나는 왜 저런 믿음이 없을까?’

나가는 말

2011년 봄철 다니엘 세이레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벽기도란 곤히 잠자는 하나님을 귀찮게 하여 억지를 피우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주님께서 자기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리라 믿고 억지를 피운 것입니다. 
그 억지로 결국 승리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다니엘 새벽기도회에 억지 한 번 부려보지 않으시렵니까?
그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껑충껑충 뛰는 기쁨을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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