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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 (막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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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 (막 2:13-17)


여러분, 기적은 믿음으로 행할 때 일어납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이미 많이들은 이야기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익숙한 것입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단순한 진리를 깊이 묵상하고 진리에 따라 행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크리스천의 삶, 오직 주님께 영광을

예수님께서는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그에게는 교파와 교리를 비롯해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도 없었습니다. 또한 이념도 없었습니다.

극단적인 사고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극단적 보수주의와 극단적 진보주의를 따지고 보면 이데올로기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이데올로기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따라 행동합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외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셨습니다. 그분의 삶에서 우리가 깊이 깨닫고 배워야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치유하면서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과시한 적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삶을 사람의 눈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로부터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관심은 제도나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제도나 형식 때문에 다툽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 외로운 사람, 구원이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세리 레위의 만남

“예수께서는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아오자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만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께서 레위에게 말씀하시자 레위는 일어나 예수를 따랐습니다.”(13~14절)

사실 예수님께서는 방랑자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목적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목적과 의미 그리고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세리 레위는 배를 타기위해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세리는 자신의 영혼을 파는 사람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마치 민족의 반역자, 돈을 위해서라며 무슨 일이든지 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보는 순간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 또는 무시당하는 세리 레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날 사람 레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왜 예수님은 세리 레위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를 보는 순간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까. 두 번째 질문은 세리 레위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자마다 생각할 여유도 없이 즉시 따라갔을까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예수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보는 순간 그의 현재 모습을 보지 않고 미래를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볼 때에도 현재보다는 미래의 모습을 보십니다.


미래의 모습을 보는 눈

그런데 여러분, 미래는 아무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미래에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의 모습만을 보고 자신을 판단합니다. 현재 보이는 모습만을 보고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화내거나 분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현재를 보시지 않고 미래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세리이고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가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위대한 제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의 미래를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모습만을 보고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 될 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세리 레위를 추천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의 눈과 마음속에 세리 레위가 현재 느끼고 있는 절망과 허무 그리고 자신과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레위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던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레위를 예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당시 세리 레위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많은 돈을 벌고 권력에 아부하면서 살겠다는 결정을 하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도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못마땅해 합니다. 싫어하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돈과 명예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고 불만족스럽지만 그 환경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 변화된 인생

예수님께서는 레위의 인생이 끝에 와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레위는 더 이상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절망하고 극단적인 경우 자살을 선택할까요. 그것은 더 이상 갈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레위의 마음속에는 현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은 충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실천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세리 레위의 모습이었습니다.

레위는 왜 예수님의 초청에 즉각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늘의 영적 권위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십니다. 죄가 없다는 의미는 죄를 한 번도 지어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 없는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까. 죄인의 얼굴과 마음은 수없이 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께서는 분명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접근할 수 없는 신비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저 사람과 사귀고 싶다거나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묘한 매력을 가진 사람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나를 안아줄 주고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것 같은 사람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들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세리 레위처럼 의심이 않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랐겠습니까. 세리들은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세리 레위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따라가면 인생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은 혼자 절망하고 고독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심정입니다. ‘그래, 저분이 나를 불러주신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라가겠다’는 순종이었습니다.

레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가끔 교회에서 전도집회를 할 때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또는 ‘자리에서 일어나세요’라고 요청하면 쑥스러워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생각이 많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여성분의 아들이 근육이 말라가는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그 여인은 아들의 치료를 위해서 기도원과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난 사람들을 모조리 쫓아다녀 봤지만 아들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인이 아들의 병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나갈 마음이 없었는데 누군가에게 밀려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갔습니다. 누가 자신을 밀었는지 확인하고자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이 성령님이 자신을 이끈 것을 깨닫고 눈물을 쏟으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아들이 치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인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 큰 원안에 벌레가 가득 차 있었는데 그 벌레들이 모두 죽는 환상이었습니다. 이상한 환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겠습니까.


주체할 수 없는 기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면 누가 그 부름을 거절하겠습니까. 또한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헌신이 어려운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대학과 직장이 대단합니까.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모두 쓸데없는 계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위의 마음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그동안 스스로 온갖 노력을 다해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던 절망과 고통, 외로움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레위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잔치에는 평소에 알고 지낸 세리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죄인, 범죄자, 거지, 신사, 지성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잔치에 참석한 그 많은 사람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젖어 있는 레위의 얼굴이었습니다. 잔치를 베푼 주인의 표정이 기쁘지 않으면 잔치는 망합니다. 그런데 레위가 베푼 잔치는 마치 천국과 같았습니다. 마치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교회를 아름답고 이상적인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모든 교회가 레위가 베푼 잔치처럼 아름다운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기쁨과 감동이 넘치는 천국을 경험하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레위가 베푼 잔치에는 율법에 정통한 종교인들도 와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적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기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론에 갇혀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피고 자신보다 뛰어나면 그들을 시기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지식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섬기러 오신 예수님

사람은 똑같은 장면을 보고도 한사람은 기뻐하고 한사람은 화가 날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레위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인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너희 선생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느냐?’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15~17절)

레위의 집에서 벌인 천국잔치에는 두 그룹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천국잔치에 참여해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잔치를 보고 비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잔치를 보고 비판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째서 너희 선생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밥을 먹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복음의 핵심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장 어려운 문제나 질문이 복음을 깨닫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왜 오셨을까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날 때 성령으로 태어나셔서 사역을 시작할 때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는 고난도 있었지만 부활하실 때에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승천하시고 다시 오신다는 말씀 속에서 영원한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재림까지의 삶에서 그분은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섬기러 오셨습니다. 처음부터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김이었기 때문에 갈등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사실은 사역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과 섬김의 클라이맥스인 십자가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또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구원한 대표적 인물이 삭개오입니다. 나무 위에서 있던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부르자 주저 없이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의 4분의 1을 가난한사람에게 나눠줬습니다. 그동안 남에게서 착취한 것을 모두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인생에 목이 마르고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수가성 여인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영혼이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영원한 생수를 마셨습니다. 또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그 여자가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사람들은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죄가 없으면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떠났습니다.

간음한 여인과 예수님 단 둘이 남자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안심시키고 돌려보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 여인이 집으로 돌아가서 얼마나 울었을까요.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 줄 수 있었을까’하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귀신들린 여인 등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해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시당하는 사람, 내 기억에 없는 사람, 우리가 상관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절규와 아픔을 안아주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제가 요즘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은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교회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주변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 억울하게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태도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주변에서 아우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 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인생의 의미와 풍요로움을 경험합니다. 저는 가난한 부자를 만나 본적이 있습니다. 수입은 많지 않은데 언제나 마음만은 넉넉하게 삽니다.

여러분, 만약 지금 암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데 의사가 필요 없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우리에게 예수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손을 붙잡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의 손을 잡으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풍요로운 삶을 경험할 것이고 죽을 때도 기쁨의 눈물 흘릴 것입니다. 여러분, 죄인에게는 반드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인을 찾아오신 예수님
섬기러 오신 예수님
우리에게 풍성한 삶의 의미와 목표를 가르쳐주신 예수님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모든 분에게 이 예수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용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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