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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신경(3)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막 8: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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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3)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막 8:27-38)
  

사도신경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세 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문단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두 번째 문단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 말 사도신경을 봐도 대충 알 수 있습니다만, 영문 사도신경을 보면 그 분량을 측정하기 쉽습니다. 전문이 108개 단어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68개 단어(약 2/3)가 예수님에 대한 고백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 신앙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만, 그 중심은 역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교(敎)라고 부르지 않고 기독교(그리스도敎, 예수敎)라고 부르는 겁니다. 사도신경의 구구절절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예수님에 대한 고백인 두 번째 문단이 제일 중요합니다. 

두 번째 문단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까지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의 칭호와 그 생애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칭호 부분, 즉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부분을 살펴봅니다. 이 부분은 사도신경 중에서 핵심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 신앙 고백과 매우 흡사합니다. 특기할 것은 1세기 이후 초대교회 시대에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던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이 내용대로 신앙고백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물고기 마크 아시죠. 헬라어로 물고기라는 단어가 ‘익투스’(ἰχθύς / 대문자로는 ΙΧΘΥΣ)입니다. 발굴된 초대교회 시대의 유적을 보면 물고기 형상이 많이 그려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었다는 겁니다.   

물고기 형상이 신앙고백이 된 유래가 있습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시대로 기독교인들이 모진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체포되고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은밀하게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놀랍게 확산되었고 기독교인의 숫자는 갈수록 늘었습니다. 

지하묘지인 카타콤에 모여 예배하고 거주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서로 접촉하고 모이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물고기 상징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였는데, 그 헬라어 문장은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Θεοῦ Υἱὸς Σωτήρ.”입니다. 

이 문장을 구성하는 3개 단어의 각 첫 글자를 조합하면 ‘익투스’(ΙΧΘΥΣ)가 됩니다. 그러니까 ‘익투스’가 물고기라는 단어지만,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고백인 셈입니다. 이런 연유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물고기 모양을 은밀히 그려가면서 서로 확인하고 통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고 교회를 이루었던 겁니다.   

그 당시 물고기 상징은 생사의 갈림길이 되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느냐 아니냐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을 좌우합니다. 
  

[1] 그리스도인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신앙고백자)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즉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고백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확인하십니다. 오래 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그들이 정말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제대로 고백하는지 확인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먼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에 대한 여론을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등으로 대답합니다. 예수님을 훌륭하게 본 것은 가상하지만 예수님에게 대해 정확하게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는 여론조사로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다수결로 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그 자체로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진리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여론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여론의 동향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합니다.   

예수님은 여론을 물으신 후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때 다행히 베드로가 나서서 고백합니다. 29절.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 고백은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좀 더 구체적입니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 고백의 내용은 사도신경의 예수님 칭호 부분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의 칭호를 하나씩 살펴보시죠. 

① 그 외아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 즉 독생자(獨生子 His Only Son)라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가 되시기도 하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는 아주 독특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죠. 죄인이 아니지만 세례를 받으신 것은 대속의 주님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세례 받으실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마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직접 증거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비록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 자신임을 천명합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세계 4대 성인 중에 예수님을 끼워 넣습니다. 공자, 석가모니, 마호메트, 예수! 예수님을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엄격하게 말하면 틀린 말입니다. 앞의 세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그 사실을 믿습니다.   

② 예수 :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이 탄생할 즈음에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에게 천사가 전해 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 그대로 대속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 이름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그 이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겁니다.  

③ 그리스도 :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직책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같은 말이죠.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 것을 다시 보면, 특별히 바로 그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29절. “ ...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You are the Christ) 하매” 우리 말 성경에는 구분이 안 되어 있는데, 원문이나 영어 성경을 보면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바로 ‘그 메시아’, 그리고 ‘유일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세 가지 직책에 취임할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 세 가지는 선지자, 제사장, 왕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이 세 가지 직책을 수행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예수님의 3중직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당신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주시고, 우리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로써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더 나아가 섬겨주셨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심문 받으실 때 왕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눅23: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는 세상 나라의 왕이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의미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인생만사를 통치하시고 다스려 주십니다. 
  

④ 우리 주 :

우리 말 사도신경에는 우리 주가 제일 먼저 나오는데, 영문으로 보면 제일 나중에 나옵니다.(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주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를 주(主)로 높여주셨습니다. 

빌2:9~11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라는 말은 주인 혹은 군주라는 뜻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주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순교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황제만이 유일한 주라며 황제숭배를 강요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하셨고,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인으로서 그의 삶을 주관해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여러분, 영화 「벤허」를 잘 아시죠. 개봉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불후의 명화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상 11개 부분을 석권한 전무후무한 명화입니다. 그 원작자는 류 월리스 장군입니다. 그는 본래 안티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고 기독교는 사기라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아예 자신이 직접 성경과 고대문헌을 연구해서 기독교의 사기성을 폭로해서 사람들이 기독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탔습니다. 그러나 안티 크리스천 책을 쓰다가 양심의 갈등을 이겨낼 수 없었고, 마침내 펜을 꺾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그 후 그는 소설「벤허」를 쓰게 됩니다. 이 소설과 영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됐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인생을 바꿉니다. 인류 역사도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B.C.와 A.D.로 나누어지지만, 개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신앙고백을 한 이전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저도 그렇고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2] 신앙고백의 진정성 : 삶의 고백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더 있습니다. 신앙고백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삶의 고백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신앙고백을 훌륭하게 했죠. 예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베드로와 제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처음으로 십자가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32절.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rebuke him)” 

우리 말 성경에는 ‘항변’했다고 점잖게 번역했지만, 직역을 하면 예수님을 꾸짖었다는 말입니다. 33절의 ‘꾸짖다’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he rebuked Peter)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며 꾸짖으셨겠습니까? 인간적인 욕심으로 베드로가 반응했다는 겁니다.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지만, 그의 삶은 전혀 변화되지 않은 그대로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베드로도 제자들도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나중에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을 체험한 후에야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책망하신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신앙고백을 한 것이 진실한 것이라면 그에 합당한 모습이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입술의 고백도 중요하지만 삶의 고백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면 그 신앙고백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누누이 신앙과 행위의 관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믿음 구원이 맞지만, 그 믿음이 진실하다면 합당한 행위가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곧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① 자기부인 :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이란 육체의 본성 즉 죄성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과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뜻 사이에 영적 싸움이 벌어집니다. 갈5:16~17,24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사는 한 육신의 욕망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믿을 때에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성령을 의지함으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직도 육체의 욕망 즉 죄의 본성에 끌려 다니면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완전할 수는 없지만, 우리 인격의 중심이 예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면 육신의 욕망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사사 시대가 왜 암흑 시대였겠습니까? 바로 이겁니다. 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구약 이스라엘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주님이라 불렀지만, 마음 속에서나 삶 가운데 자기가 왕 노릇하고 주인 행세를 했던 것입니다. 이른바 주종 전도(主從顚倒) 현상이죠. 결국 그들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속 사회에 파묻혀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구 소련 출신 작가인 솔제니친이 미국에 도착한 후 기자들이 미국을 둘러본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인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까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를 섬기는 나라이더군요.” 교회가 많고 그리스도인들이 많지만 정말 예수님을 섬기는 모습이 희박하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가운데 승리가 있을까요? 축복이 있을까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 욕망을 이기고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승리가 있고 축복이 있는 겁니다. 비근한 예로, 어떤 사람 살을 빼고 싶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식사 시간에 보니까 얼마나 많이 먹는지! 기도하면서도 식욕을 못 이겨서 그런다면, 과연 그런 기도가 합당한 것일까요? 이건 한 마디로 난센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자기 부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② 자기 십자가 :  

자기 부인을 한 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대속을 믿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 자신의 몫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1:24에서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불렀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고난과 손해를 감수한다면, 바로 이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여러분, 장기려 박사를 아시죠.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셨습니다. 그는 6.25 당시 평양의대 교수를 지내고 있었는데, 자유를 찾아 차남과 함께 월남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부인과 다른 자녀들과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북한의 부인 때문에 독신으로 살면서 극빈자와 장애인, 행려자 등 연약한 이웃을 위해 인술을 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해방 전의 에피소드입니다. 그가 경성의전(서울대 의대 전신)에서 레지던트를 하던 시절 춘원 이광수가 입원해서 주치의로 수고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헌신적인지 큰 감동을 받았는데, 어느 날 춘원이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천사지?” 그 말을 듣고 장기려가 펄쩍 뛰자 춘원이 이윽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래? 천사가 아니면 바보구만.” 그러자 장기려는 이렇게 말을 받았습니다. “바보라고 하시면, 제가 성공한 거죠!” 그렇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경쟁하고 똑똑한 척 하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어수룩한 바보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욕도 먹고 손해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번 사도신경을 외우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 ”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마음속의 진실한 고백이라면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고백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함으로 매일의 삶 가운데 주님의 주님 되시는 증거들이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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