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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 (겔 28: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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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 (겔 28:12-19)


사회봉사나 사회사업을 하다보면 대체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람을 좋게 보려는 성향을 갖게 됩니다. 사람을 환경의 피해자로 보는 경향이 생깁니다. 교도소 봉사를 가는 분들은 재소자들에 대해서 긍휼한 마음을 갖고 이들이 원래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고 환경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가난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이처럼 그들을 두둔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또 소년원에 봉사 가는 분들을 보면 수감된 소년들이 다 자기 아들 같고 전부 다 예쁘고 이런 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소년원에 왔을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아마 가정환경이 열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손가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를 잘못 사귀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도 발생하지요. 범죄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더 불쌍히 여기는 그런 일도 있습니다. 교회도 일종의 사회단체입니다.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모임입니다. 사람을 위로하고 돕고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사람을 보는 관점도 최대한 좋게 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또 예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신다는 것을 말하려고 애를 씁니다. 

특별히 같은 교회를 다니는 동료 교인들에 대해서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그들의 허물을 최대한 덮어주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인간이 때로는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를 실감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사람의 참모습을 가장 먼저, 가장 적나라하게, 가장 꾸밈없이 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119구조대원들입니다. 사고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가서 피해자를 제일 먼저 수습하는 사람들이 119 구조대원들입니다. 특별히 인명사고가 났을 때, 사람이 사람을 헤쳤을 때 현장에 도착해서 현장 그대로를 목격합니다. 이건 TV뉴스가 보여주지 않는 장면입니다. 

또 병원에 응급실 스태프들이 그것을 목격합니다. 앰뷸런스에 실린 환자가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 응급실입니다. 누구에게 폭행을 당했다든가 칼에 찔렸다든가 목숨을 잃었다든가 이런 경우에 제일 먼저 그것을 보는 사람이 응급실에서 일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가해자가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에게 폭행을 당했다든가, 자식이 부모를 폭행했다든가, 칼로 찔렀다든가, 동거인에 의해서 피해를 입었다든가, 그것을 제일 먼저 보는 사람들이 응급실에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경찰, 또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제일 실감 있게 봅니다. 그들은 사람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을 왜곡한다는 것을 봅니다. 사람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급해지면 전부 다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교육, 환경, 소득수준에 좌우되지 않고 경찰관들이 유도질문을 하는 것이 몸에 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유흥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그들도 사람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봅니다. 술이 들어가면 신사도 없고 교양인도 없고 지식인도 없고 다 똑같아진다는 거예요. 사람을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공부 시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제일 무서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아십니까. 공포영화 ․ 귀신 나오는 영화는 무섭지 않습니다. 귀신들은 대체로 할 말이 있기 때문에 등장합니다. 한이 있다든가 억울하다든가 뭔가 산 자에게 호소하기 위해서 등장합니다. 죽은 자가 나타났다는 게 무서울 뿐이지 실제로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괴물 나오는 영화,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괴물이 없습니다. 괴물은 전부 다 사람들이 상상해 낸 것입니다. 용가리, 에어리언, 네스 호의 괴물, 히말라야 산맥의 설인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상상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 나오는 영화가 재미있을 수는 있지만 무섭지는 않습니다. 

그럼 어떤 영화가 정말로 무서우냐. 사람 나오는 영화가 제일 무섭습니다.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사람의 거짓, 사람의 잔인함, 악함, 이것을 접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이게 상상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있을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때 관객들이 놀라는 것입니다. 

영화 보디가드에서 주인공 휘트니 휴스턴에게 그동안 협박편지를 보내고 죽이겠다고 위협했던 사람이 알고 보니까 누구였습니까. 언니였어요. 그 언니가 몰래 자기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있었어요. 그걸 아는 순간에 사람들은 놀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가까이 지내고 웃고 도와주는 척 하던 언니가 몰래 협박편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우리는 사람의 거짓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영화 프라이멀 피어에서 그동안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었던 청년이 실제로 범인이고 그동안에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관객들이 놀라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등장인물들을 속였고 관객을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이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 영화가 결정적인 순간에 적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속마음을 그동안에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극적인 반전과 두려움을 자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테스 지키기를 보면 대통령의 영부인을 납치한 사람이 그의 운전기사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든가 이런 식으로. 그런데 이것이 픽션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세상이 그렇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아동 성폭력, 아동 유괴사건이 발생했을 때 통계를 내보면 사건이 피해자의 집으로부터 1, 2 ㎞ 반경 애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과 가해자가 아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는 사람에 의해서 성폭행을 당하고 아는 사람에 의해서 유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일부러 두려움을 안겨 드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악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왜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셔야 했는지를 우리가 실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저 인간을 계몽시키고 인간이 조금 교양을 배우고 계몽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저 어떤 교훈이나 상징적인 스토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에게 대신 쏟아 부은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세상에 쏟아 부었다가는 온 세상이 지옥에 가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진노를 예수님에게 대신 쏟아 부었습니다. 그것이 골고다 십자가 사건이에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어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어제가 개구리 소년 사건발생 11년이 되는 날이었는데 소년 다섯 명이 개구리를 잡으러 가겠다고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돼서 11년 후에 두개골이 발견됐지요. 누가 그랬는지,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아무도 몰라요.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미해결 사건이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악한 일을 저지르고 숨어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런 일을 접할 때 우리는 당연히 분노를 느낍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할까.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문제에 개입을 하시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악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 아니냐. 사람이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하나님에게 피해가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고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악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개입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실 수 있도록 은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드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방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괜찮아, 괜찮아, 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죄가 괜찮지 않습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은혜는 거저지만 값싼 것은 아닙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값싼 것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 말씀은 사탄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오늘 본문 어디를 봐도 사탄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습니다. 두로왕에게 지은 애가라고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12절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을 사탄에게 하는 말이라고 사탄에게 둘러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건 우리가 들어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에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지칭하고 계시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대단한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이 구절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이 말은 원래는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원래는 완벽했어요.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불의가 드러났어요. 그 말은 노출됐다는 얘기입니다. 불의가 발견됐다는 얘기입니다. 이건 충격이에요. 경악이에요. 두려운 것입니다.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완벽해 보였는데 그런데 그 사람 속에 불의함이 드러났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19절에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사람이 놀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럴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 그건 잘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안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어요. 완벽해 보였어요. 그런데 불의가 노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아직 TV가 아직 없을 때 아버님과 영화를 보러 가면 늘 아버님께 여쭤봤습니다. ‘아빠,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부터 먼저 알아야 마음을 놓든지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영화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분명하게 보이지요. 나쁜 사람은 목소리도 그렇고 생긴 것도 무섭게 생겼고 얼굴에 수염이 있고 검정색 옷을 입었고 이런 식으로 나쁜 사람은 뭔가 나빠 보이지요. 하지만 이 세상은 영화와 같지 않습니다. 정말 나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요. 정말 나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잘 몰라요. 누가 나쁜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누가 정말로 나쁜 사람입니까.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다른 데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나쁜 사람들이 숨겨져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도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안 그럴 것 같은 사람 중에 정말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알곡과 쭉정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의 참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에요. 의인은 의인대로 악인은 악인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전까지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모를 때가 많아요. 누가 알곡인지 누가 쭉정이인지, 누가 정말로 믿음의 사람인지 누가 거짓인지 우리는 외모로 알 수 없어요. 

‘사람은 외모를 취하나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어요. 또 ‘성령은 깊은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깨어서 경성해야 됩니다. 그 말은 정신을 차려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불의함이 드러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7절에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밉게 생겨서 교만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아름답기 때문에 교만했다고 했고 16절에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죄를 범하였도다’ 풍성함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17절에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다시 말하면 우리의 아름다움이든 우리의 풍성함이든 우리의 명예가 우리를 타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예든 아름다움이든 풍성함은 좋은 것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좋은 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맺지 않아요. 반대로 나쁜 것이 항상 나쁜 결과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에요. 나쁜 환경 속에서도 선한 결과를 맺는 사람이 있습니다. 환란 속에서 선한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어요. 반대로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살았지만 나쁘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쁜 사람. 우리는 그런 나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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