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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는 기호가 아니다 (고전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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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기호가 아니다 (고전 1:18-25)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 죽음에 이르는 존재

벌써 4월의 첫 주가 되었습니다. 이틀 후면 淸明입니다. 방사능에 대한 불안이 우리에게 있지만 대기는 부드럽고 또 청명합니다. 하지만 사순절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들은 마냥 봄 신명에 지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다가 저는 젊어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추모하는 글 모음집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아들을 잃고 쓴 20세기 최대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설교가 마음에 지펴왔습니다. 

그의 아들 로베르트 마티아스 바르트Robert Mattias Barth는 1941년 6월 22일,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던 중 추락사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습니다. 처참하게 부서진 아들의 유해를 매장하고 돌아와 바르트는 매우 담담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르트는 아들이 라틴어로 적어놓고 묵상하곤 했던 고린도전서 13:12절을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Videmus nunc per speculum in aenigmate, tunc autem facie ad faciem). 

이 구절 자체가 그의 마음 아픔을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바르트는 아픈 마음을 추스르며 회중들에게 삶은 ‘이곳’과 ‘저곳’ 사이, ‘지금’과 ‘그때’가 교차하는 접경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둘은 결국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과 ‘그때’, 이 둘 사이에는 조금의 거리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마티아스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나 그 아이의 생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습니다. 마티아스는 변함이 없는 동시에 완전히 다르게 변화되었습니다.”(마이클 부쉬 엮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새물결플러스, 32쪽)

바르트는 지금 당장은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해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계시기에 마티아스는 죽음을 통과하여 결국 하나님의 종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감동적인 설교였습니다. 

그 설교를 보는 데 몇 가지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지나친 경쟁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카이스트 학생들이 떠올랐고,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 세상을 버린 이들이 떠올랐고, 일본의 원전 사고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일궈온 생명의 터전을 잃어버린 농부의 자살도 떠올랐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도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견디다 못해 결국 튕겨져 나간 사람들입니다. 누구를 직접적으로 죽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 십자가의 길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립니다. 가급적이면 죽음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연재해나 전쟁 혹은 테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비교적 덤덤합니다. 그것은 우리 문화가 죽음을 추상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대중의 눈길을 받았던 사람이 아닌 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죽음은 통계 숫자로 환원될 뿐입니다. 개별적인 삶의 이야기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들의 기쁨, 슬픔, 꿈은 한 순간에 포말처럼 스러져버리고 가까이 지냈던 이들의 가슴에 상실감만 남겨 놓습니다. 김열규 선생님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닥쳐온 죽음을 ‘미완의 죽음’이라 했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은 ‘한限’이나 ‘원寃’을 낳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참 이상한 종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온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는 이들이 로마의 처형 도구였던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를 찬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그분의 삶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만연한 죄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당신의 몸을 기꺼이 희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갈3:13a)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5:21)

십자가는 힘과 폭력을 통해 이기는 길이 아니라, 고난을 스스로 짊어짐을 통해 이기는 길을 가르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기 싫은 일을 마지못해 떠맡을 때 십자가를 진다고 말합니다. 내기 싫은 음식 값을 체면 때문에 내고, 하기 싫은 일을 윗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억지로 하고는 십자가를 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게 십자가는 아닙니다. 

옛 사람들은 타락한 사람을 가리켜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homo incurvatus in se’이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그들 곁에 다가서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낮아짐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바로 ‘나’를 살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삽니까? 사람들은 대개 십자가를 구원을 가리키는 기호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드라큘라나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 십자가를 사용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어떤 이들은 자동차 룸미러에 작은 나무 십자가를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지켜달라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 십자가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교통 법규를 잘 지키고 과속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부적符籍(talisman)이 아닙니다. 교단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교회의 중앙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 공간 배치 자체가 교회의 존재 이유가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전면에 걸린 십자가는 더 이상 우리에게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괴테(Goethe)는 십자가의 비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장미꽃으로 촘촘히 둘러싸인 십자가가 서 있다.
누가 십자가를 장미꽃으로 장식하였는가?
그 험한 십자가를 사방으로 부드럽게 둘러싸기 위하여
화환은 부풀어지고 있다.

장미꽃으로 둘러싸인 십자가,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험한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 하나님의 능력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단언합니다. 남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려는 사람만 사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거기에 평화가 있을 리 없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움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겁니다. 자의식으로 충만한 사람, 뭐든 자기 좋을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분리의 담장을 쌓아올리는 사람입니다. 소통의 다리를 끊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내려놓은 사람, 남 좋을 대로 살면서도 스스로 비참해지지 않는 사람들은 담을 허무는 이들입니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어떤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이 이 지경입니다. 전쟁의 소문은 늘어가고, 사람살이의 풍경은 나날이 팍팍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살기 어렵고, 생태계의 파괴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하는 바울의 물음이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 사람도 지혜를 찾는 그리스 사람도 세상을 새롭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십자가를 꼭 붙드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 전하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고전2:2)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야말로 우리의 살 길임을 알기에 바울은 그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켰던 사람들, 그래서 잊고 살았던 사람됨의 의미를 다시금 묻게 했던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그런 이들이 있긴 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돈 많은 사람도, 높은 사람도, 유명한 사람도 아닐 겁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거나,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돌보아 주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거나, 자기를 낮춰 세상을 섬겼던 사람일 것입니다. 고 이태석 신부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왜 눈물을 흘렸을까요? 그를 통해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약함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우리로 하여금 살아갈 이유를 깨닫게 해주는 이들은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능동적으로 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바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룩한 바보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거룩한 바보들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그들은 굳은살과 같은 마음을 도려내기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칼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우리를 휘몰아치고 있는 욕망의 광풍을 잠재우는 하늘의 노랫소리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25)

말씀 묵상이 이 자리에 이르렀을 때 저를 찾아온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더 이상 생각을 진척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마음으로 용납하지 못하고, 심지어 아주 불편하게 여기기까지 하면서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는 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먼저 제 마음을 넓혀달라고, 그리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말입니다. 마음으로 이 노래를 여러 번 불렀습니다. 

1.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2.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 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여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후렴>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 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이제 정말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풍요롭게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십자가는 부적도 아니고 구원을 가리키는 기호도 아닙니다. 우리가 택해야 할 생활방식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 우리 내면에도 십자가의 사랑이 자리 잡아,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힘을 부여하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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