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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가기 (렘 31: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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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새롭게 알아가기 (렘 31:31-34)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얼마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지하 700m 갱도에 매몰되었던 칠레광부 33인을 구출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몰사고가 일어난 지 69일 만에 구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69일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발견되기 전 17일 동안의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존해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입니다. “우리가 구조팀에 발견되기까지의 17일간은 정말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서서히 굶어 죽을 때만을 기다리던 최악의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서 혼연일치의 표상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서로의 의견이 불일치했고 몸싸움과 주먹다툼이 난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죽일 수도 있었던 극한의 상황까지 이를 뻔했음을 고백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동시에 악마도 함께 있었다.” 

그러던 그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이 희망과 기대로 바뀐 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몰된 지 17일 만에 지상에서 내려온 탐침봉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가족과 국민들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들을 탐침봉에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우리는 33명 모두가 살아있습니다.” 그 이후로 지하에서 견뎌낸 52일은 그전의 하루와는 비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기다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는 사람은 주위환경에 상관없이 새롭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왜 때때로 우리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떱니까? 나를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은 아닙니까?

예수님은 희망의 소식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나 자신의 신앙의 여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마치 지하의 감옥 속에서 악마와 싸우는 일의 반복과 같았습니다. 열정과 무기력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야망과 허무가 서로 싸웠습니다. 영혼의 거룩함과 정욕이 마구 뒤엉켜 있었습니다. 이기심과 이타심이 공존했습니다. 내 안에는 천국도 있었고 지옥도 있었습니다. 천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악마적이었고, 악마라고 하기에는 천사 같은 면이 끊임없이 내면에서 갈등과 두려움을 야기 시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내 속에서 갈등과 다툼은 반복되었지만 결코 예전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가야할 방향이 명백해졌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소중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주시는 진리와 생명으로 말미암아 내안에 있던 두려움과 외로움이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속에서도 빛이 내 마음을 비추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내면의 깊은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위기 속에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한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전체가 살 길을 찾지 못해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것이 우리의 타락과 부패 때문이요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때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예레미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보면서 하나님도 함께 고통 받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슬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보면서 하나님도 함께 슬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처받을 때 하나님도 함께 상처받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결코 상처를 받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아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참 잔인한 분이라고 여기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아픔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700m 지하에 갇혔던 칠레의 광부들이 지상에서 누군가 자기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희망이 생겼던 것처럼, 현실을 보면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며 아파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민족을 향해 희망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예레미야 8:21)

사랑은 관여합니다. 사랑은 남의 아픔에 참여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상처 났을 때 그것을 함께 붙들어 맵니다. 하나님께서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능력의 표시요 강함의 표시입니다.
어머니는 자녀가 감기몸살만 앓아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자녀를 간호합니다. 자녀의 아픔이 어머니의 아픔으로 전달되고 자녀의 울부짖음이 어머니의 울부짖음으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머니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무것도 몰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 가득하고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자녀가 상처 난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대신 상처가 있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자녀를 돌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나 때문에 함께 아파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때문에 아파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진정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시고 그것들을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8:3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내 된 이스라엘이 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우상을 남편처럼 섬기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바람난 아내와도 같은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다시 나와 함께 살자고 부탁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은총을 확인하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절망과 슬픔 속에서 탄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을 알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새로운 길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예레미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소식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새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리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미래에 대해서 기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나의 법을 그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8:33)

옛 언약은 돌 위에 문자로 새겼습니다. 멋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살았습니다. 칠레의 광부들이 매몰되었을 때 그들에게 남았던 식량은 이틀 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규율을 세웠습니다. 철저하게 나누어서 먹는 질서를 지키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시행했습니다. 아마도 그 과정 속에서 엄청난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일을 억지로 마지못해서 했습니다. 그들은 언제까지 그 일을 했어야 했을까요? 지상으로부터 소식이 올 때까지 절망 속에서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그들이 이틀 치였다면 우리들은 십년, 이십년, 아니 칠십년, 팔십년, 다만 그것의 연장은 아닐까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90:10)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일흔 되신 분들, 여든 되신 어르신들이 인생을 되돌아보면 신속히 지나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신속히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 풍성한 삶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지하갱도 700m에 갇혔던 그들이 그토록 지상으로 나오기를 열망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도 이런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의 역사를 가슴에 간직하면서 하늘의 세계를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부딪히는 어려움들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부딪치는 미움과 분노를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사업에는 실패해도 인생은 실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수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영원한 세계인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절망의 신음이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세계의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드는 것은 결코 슬픈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이 날마다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세계가 없다면 어둠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보이는 것,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앙탈을 부립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기적인 욕심의 장으로 멈춰 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약속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만이 새것의 원천이십니다. 우리가 여기에 잇대어 있지 않으면 우리의 만족은 하루도 못갑니다. 자동차를 사면 며칠이나 만족하십니까? 좋은 집에 들어가면 며칠이나 만족하십니까? 좋은 상품을 사면 며칠이나 만족하십니까? 영혼의 만족과 기쁨만이 나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새 것의 원천인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며 그를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이 있고 새 언약이신 신약,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복음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열려진 복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예레미야 8:3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적인 축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지식적으로 많이 깨달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안다는 말은 함께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안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내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 헌신하십시오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런 신앙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목사님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에 정말 헌신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핑계를 대면서 더 이상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을 향해서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자네 한번 생각해보게나. 자네는 지금까지 그 어떤 것에 헌신을 해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 아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헌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헌신해본 적이 있습니까? 내 몸 전체를 바쳐도 괜찮을 헌신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두렵습니다. 그래서 헌신하기가 꺼려집니다. 그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못하게 합니다.

20대에 경험한 믿음으로 40대, 50대, 60대까지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20대에 만난 하나님을 붙잡고 평생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초라해집니까?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답답해집니까? 믿음이란 오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내 영혼에 기쁨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잡고 나아가는 사랑의 역사가 내 속에서 일어납니다. 

언제까지 내 어머니의 신앙으로, 내 아버지의 신앙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언제까지 내 아내의 신앙으로, 내 남편의 신앙으로 살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내 속에 있는 것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주님과 함께 경험할 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아룀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복된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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