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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흔들리는 것은 어찌 그런가? (시 11:1 - 시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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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것은 어찌 그런가? (시 11:1-12:4) 

  
시11: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2.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 12:.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생명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일본에서 쓰나미로 돌아가신 분은 대분 ‘익사’였는데 생존자의 증언을 보면 집에 물건을 가지러 간 분들은 애석하게도 물에 휩쓸려 갔다는 증언이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것들이 가득 채워져 있어도 자신이 죽은 후에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귀한 생명을 지탱하여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권력입니까? 아니면 장수하는 것입니까? 값나가는 골동품입니까? 직장입니까? 그섯보다 귀한 것은 생명이고 영혼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25-26절 말씀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터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구원함을 받고 영원한 나라에 들러 가도록 살아가는 지혜로운 믿음의 인생이 되시기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땅을 밟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땅에서 나는 식물을 먹고 살아갑니다. 바다에서 강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을 잡아먹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을 먹고 살아갑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 견고한 터가 필요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본에 발생한 지진은 세계를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밀려오는 해일로 인해 일본 열도는 초상집 같은 분위기로 변했습니다. 수도 도쿄에도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화려하고 그렇게 기초가 든든한 건물도 터가 흔들리니까 건물 전체가 흔들거렸습니다. 무너졌습니다. 터가 무너지니 건물이 무너지고 건물이 무너지니 그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도 죽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터가 흔들리고 무너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는 지난 금요일에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의 모습을 보면서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진과 상관없이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말씀을 준비하고 있다가 지진과 쓰나미 뉴스를 들으면서 이 말씀을 더 깊게 묵상하게 되었고, 더욱 많은 것을 생각나게 했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진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쓰나미가 발생하니 어떤 현상이 발생했습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터가 황폐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땅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지진과 해일보다도 더 무서운 재앙은 없을까요? 이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땅이 흔들리며 무너져도 아수라장이 되지만 인간들이 살고 있는 근본적인 삶의 터가 무너지면 이 세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이 일어나서 우리의 삶의 터전인 땅을 흔들며 무너뜨리는 것은 일종의 종말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이런 재앙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터가 무너지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터는 ‘우리가 말하는 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터’란 우리의 삶과 사회를 형성하는 기초 원리를 말합니다. 즉 인간사회와 인간관계를 떠받치는 삶의 토대인 ‘진리, 정의, 공의, 법, 신앙, 신의, 신념, 윤리 도덕, 양심’ 등의 절대적 가치를 가리킵니다.

그 시대와 사회를 이끌어가는 도덕과 법질서 또는 이념이 무너지면 더 이상 의인이 설자리가 없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터가 무너질 때 그것을 떠받치거나 무너지지 못하도록 지탱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터가 무너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보지만 터가 흔들리며 무너지고 있는 모습이 확연히 보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터가 무너진 상항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있습니까? ‘악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득세를 하고 이들이 마음이 바른 의인들을 넘어뜨리고 죽이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터가 무너진 사회는 폭력을 좋아하고 거짓을 말하고 아첨하는 입술과 변덕스러운 두 마음을 갖고 이웃을 해치기 때문에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의로운 자들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82편2절에 보면 터가 흔들리며 무너지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그렇게 말씀하면서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악인들이 무엇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합니까? 3-4절에 보면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와 시편 82편에서의 ‘터가 흔들리고 무너진다’고 한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말하는 물리적인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자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사회,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어떤 터가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경고한 터를 닦는 지혜가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터가 되는?  


1. 인간관계의 신뢰가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인간관계가 잘되려면 서로 신뢰가 되어야 합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사랑이 첨가하면 금상첨화가 됩니다. 물론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운동선수가 운동장에서 뛰어야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후보 선수로 경기장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횟수가 많으면 절대로 훌륭한 선수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라운드에 나가서 자꾸 뛰어야 훌륭한 선수로서의 기술을 발휘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이름이 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감독에게 인정받는 기술과 감독이 원하는 대로 게임을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신뢰가 되고 신뢰가 되면 주전으로 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독의 눈 밖에 나면 훌륭한 기술을 갖고 있어도 주전으로 뛰기 어렵습니다. 

오늘 날 인간관계가 너무 힘듭니다. 함께 잘 사는 것 같으나 깊이 들어가 보면 관계가 다 깨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관계, 형제관계는 더욱 그렇습니다. 회사에 들어가 보면 서로가 경쟁 상대이기 때문에 마음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잘 없습니다. 사원은 경영자를 신뢰하지 못하고 경영자는 사원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노사분규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서로가 도우며 살아야 하는데 자기만 도움을 받고 남은 돕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주의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사회에 믿을만한 곳이 있습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정말로 구역가족을 사랑하십니까? 정말로 성도 간에 서로를 사랑하십니까? 정말로 여러분의 목사를 사랑하십니까? 정말로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을 사랑하십니까?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많이 나누어지고 왜 이렇게도 소용돌이를 칩니까? 사랑의 공동체로 똘똘 뭉쳐서 아름다운 힘을 발휘하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신뢰가 무너져 아름다운 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거짓이 많고 사기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을 못 믿습니다. 누구를 믿어요. 

사랑하는 아내도 남편도 제대로 못 믿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은 더욱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긴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말이 유행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들어보셨는지요. 

“아들은 사춘기가 되면 남남이 되고, 군대에 가면 손님되고, 장가가면 사돈이 된다” 
“아들을 낳으면 1촌, 대학가면 4촌, 군대 다녀오면 8촌, 장가가면 사돈의 8촌, 애를 낳으면 동포, 이민가면 해외동포”가 된다고 합니다.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딸은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 ”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나면, 아들은 큰 도둑, 며느리는 좀 도둑, 딸은 예쁜 도둑”

그런데 더욱 웃기는 것은 착각하는 어머니들 많다는 사실입니다. 

“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는 여자,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며느리 남편을 아직도 내 아들로 착하는 여자”

이런 내용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들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안 믿으면 누굴 믿어야 합니까?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말들이 나올만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흔들리지 않으려면 터가 되는? 


2. 감정의 자리인 마음이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상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처를 주고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에 평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감정의 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인간은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갈수록 식어집니다. 마지막 종말의 때가 되면 자기를 사랑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고 원수를 맺은 그대로 지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야 할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아도 될 돈이나 물건이나 짐승을 사랑합니다.

결국 인간의 마음에 사랑이 식어간다는 것입니다. 감정의 터가 무너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온갖 범죄가 많습니다. 이미 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 마음의 터가 무너져서 심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5-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생각이 악하면 이것은 터가 무너진 마음입니다. 터가 무너진 마음, 마음의 터가 무너지면 좋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항상 악한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6장7절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이 항상 악함을 보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실제적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의 터, 감정의 터가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말씀의 구절이 1천 구절이 넘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무너질 때 보면 먼저 인간의 마음이 무너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완악하다’는 표현과 ‘강팍하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고 강팍하면 결국 그 마음이 무너져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고 그로 인해 세상은 망하게 됩니다. 잠언16장32절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마음에 좋은 감정을 가져야 합니다. 디모데전서1장19절 말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착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감정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마치 지진으로 인해 온갖 건물이 흔들리듯이 나의 마음이 악한 생각, 나쁜 생각으로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아무리 삶의 자리가 어려워도 내 마음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평안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되면 삶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병도 찾아옵니다. 잠언17장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사람들이 사납습니다. 이사야46장12절 말씀,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떠났다고 지적했습니다.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사회를 보면 더욱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터가 되는? 


3. 정의와 정직이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시편89:14절 “공의와 정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시편97편2절 말씀,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공의와 정의가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그래서 이사야30장18절 하반절에 보면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역대상29장17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정직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터는 정의와 정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되는 정의와 정직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의가 득세를 하고 거짓이 참말로 둔갑하는 세상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위정자들은 공의로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재판관들은 공의로 재판해야 합니다. 모든 공직 사회가 정직해야 합니다. 공직사회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정직해야 합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보다 정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목사도 정직했으면 좋겠고, 성도들도 정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때 왜 망했습니까?

공통점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내용이 뭡니까? 하나님이 형상이 있어서 그 형상을 버리거나 파괴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롭고 정직한 삶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정의를 얼마나 원하고 계시는지 아세요. 예레미야5장1절 말씀을 보시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공의를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귀했는지 한 사람만이라도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정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가장 선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잠언8:6절에 보면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정직한 말이 가장 선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12편2-4절을 보세요.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거짓을 일삼는 사람들은 4절에 보면 이렇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여러분, 이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하는 말을 누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끊어버린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 무너지고 있는 터인 정의와 정직의 터를 회복하는데 쓰임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터가 되는? 


4.  교회가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전서 3장15절 말씀에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선언합니다.

즉, 성경말씀에 보면 ‘집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곧 ‘진리와 기둥과 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터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도들의 삶의 터는 교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해서 복을 받고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즉, 교회가 무너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삶의 터가 무너진다는 것은 결국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주위에서 교회가 무너지는 소리들이 상당히 크게 들려옵니다. 우리에게만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사랑이 없어지고 용서가 없고, 교회 안에 진리를 추구하는 믿음이 없어지고 세상의 욕망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것이 자꾸만 커가는 것은 교회의 터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주님의 사랑은 점점 소멸됩니다. 교회 안에는 직분쟁취, 직분 간에 이질감을 통한 미움과 다툼, 교계 안에서는 교권다툼 등 세속적인 것들이 부각됨으로 인해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이 점점 소멸되어 가는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1절에 보면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사는 자가 끊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교회가 무너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정말로 우리교회가 주님의 사랑받는 교회,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서 무너져 가는 교회의 터를 세우는데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터가 되는? 


5. 가정이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하우스’보다는 ‘홈’이 좋아야 합니다. ‘부부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자녀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가 사랑해야 하며 섬겨야 합니다. 부부는 하나입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서로 존경하고 존경받아야 합니다.

가정은 꽃밭과 같아서 매일같이 물주고 가꾸어야 합니다.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돋아나 행복을 앗아갑니다. 가정이 행복하면 그 사람은 교회도 살리고 회사도 살리고 나라도 살립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나 가정을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정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명한 판단을 하며 사는 지혜로운 분들입니다. 그러나 사회 현실을 보면 정말 종말의 징조현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서 두렵습니다.

마가복음13장12절 말씀,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에 폭력이 잦고 배우자의 부정과 성격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인내심 부족 등으로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하면 첫 번째가 ‘이혼율증가’입니다. 이혼이 미국을 제치고 1위가 되었습니다. 한해 840쌍이 결혼하고 398쌍이 이혼하는 것으로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바가 있습니다.

낙태건수가 매년 150만건에서 200만건으로 보고가 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산부인과 의사들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합니다. 기혼여성의 낙태 경험률이 59.3%라는 것은 놀랄 만한 일입니다.

그리고 18세 이상 전체 성인 여성의 38.8%가 낙태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건강에 문제가 생겨 낙태하는 경우는 2.7%에 불과하고, 낙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하지 않는 임신’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다가 전체 낙태 건수 중 30%는 미혼여성이 하며, 이들 중 50%는 2회 이상 낙태경험이 있고 이들 중 85%가 10대라는 사실입니다. 

한국 성과학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기혼자 20명 중 3명이 애인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 조사는 우리나라의 기혼 남성 78%가 배우자 이와의 여성과 성관계 경험이 있으며, 불과 18%의 남성이 혼인 순결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성도 거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기혼여성 73%가 혼전 성경험이 있다고 조사되었고 미혼여성의 20% 이상이 혼인 외 성관계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정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납니다. 어느 남편이 노래방에 갔더니 그곳에서 시중드는 자가 자기 아내더라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이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고, 정의와 정직이 무너지고 인간의 마음의 감정이 무너지고 신뢰가 무너지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십니까? 오늘 시편에 보면 의인이 탄식을 합니다. 
11편6절을 봅시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하 22장8절 말씀에도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터가 무너지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땅이 무너집니다. 지구가 황폐화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에 소돔과 고모라성이 왜 망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폼페이를 보면 고대 도시가 왜 화산에 의해 완전히 덮여버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지금 온 지구상에 지진, 홍수, 폭설과 혹한 등의 현상들이 일어나는지, 왜 우리에게 구제역이라는 엄청난 재난이 100일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지.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의 터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숨만 쉬며 바라보고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터가 흔들리는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이럴수록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11편 1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아무리 터가 무너져 내리는 세상이라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우리는 공의를 행하여야 합니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의인이 되어 주님께 피하여야 하며, 불의는 회개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위의 죄악을 회개하는 것만이 하나님님께 피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 피하면 주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께 회개하고 피하는 길만이 살 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터가 무너진 채로 계속 달려가면 결국 종말이 옵니다. 온갖 고통을 겪는 가운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터가 계속 흔들리고 무너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견고하고 든든해지기를 원하십니까?  

주여! 저의 반석이 되시어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소원하며 다 함께 이를 위해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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