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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삼하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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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삼하 9:1-8)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에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은혜가 사무쳐 죽어서도 잊지 않고 갚는다는 뜻)이라는 고사성구가 제격인 것 같습니다. 춘추시대 진(晋)나라의 장수 위과가 진(秦)나라 두회를 사로잡아 멸망시킬 때입니다. 위과 장군의 선친이 죽을 때 자신의 애첩을 순장시켜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이때 위과는 부친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아버지의 애첩을 재가시켜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꿈에 애첩의 아비가 나타나 말하기를 장군이 내 딸을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전쟁터에 풀을 묶어 두어 두회와 군사들을 쓰러지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설화적 배경을 두고 결초보은(結草報恩)은 죽어서도 은혜에 보답한다는 말로 오늘날 널리 속용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된 다윗은 대외적으로는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대내적으로는 행정조직을 정비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다윗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의 우정과 언약을 기억하고 사울의 유족을 찾아 은혜를 베푸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생전에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부친을 도와 다윗을 죽이는데 동참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부친의 소행을 사전에 친구 다윗에게 알려주었습니다(삼상 20:12).

사무엘상 20장 13절에 『 그러나 만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하거늘 내가 이 일을 네게 알게 하여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요나단은 부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되겠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부친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은 자신이 아니고 다윗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삼상 20:14-17).

다윗은 통치기반이 어느 정도 잡혔을 무렵에 이 일을 생각하고 은혜를 베풀고자 요나단의 유일한 혈손 므비보셋을 찾게 됩니다. 다윗은 친구 요나단의 혈손 므비보셋과 그의 아들 미가에게 평생토록 왕자의 예우로 은총을 베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은혜를 입은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절하면서 한 고백이 왕께서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한 것입니다. 

Ⅰ. 불구자 므비보셋이 받은 은총에 대한 고백 입니다. 

본문 9장 3절에 『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사무엘하 4장 4절에 『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고 했습니다. 본문 9장 13절에도 『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고 했습니다. 
사울은 길보아산에서 블레셋과의 전투에 패전하므로 운명적인 종말을 맞게 됩니다(삼상 31:1-13). 사울 왕가가 몰락하자 이스라엘에는 두 정권이 생겼습니다. 말하자면 한 나라 안의 두 정권(One State Two Government)이라기보다는 정당(Political Party)이란 표현이 합당합니다. 

그 하나는 유다 사람들이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운 일이 있습니다(삼하 2:1-7). 다른 하나는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사울의 다른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았습니다(삼하 2:8-11).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에게로 기울고 아브넬은 자기가 세운 왕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다윗에게로 돌아갔으나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성문으로 조용히 데리고 들어가서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삼하 3:27). 그 후에 이스보셋은 또 다른 자기의 군장 바아나와 레갑에 의하여 침상에서 배를 찔려 죽었습니다(삼하 4:5-8). 결국 사울 왕가는 그 화려한 왕관을 계승할 자를 찾지 못한 채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울 왕가의 종말을 예견하는 난리통에 요나단의 다섯 살 된 아들 므비보셋을 유모가 안고 도망치다가 떨어뜨려서 두 발이 절게 되었습니다(삼하 4:4). 그래서 므비보셋은 어릴 때부터 불구자였습니다.

1) 그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습니다. 
본문 9장 4절에 『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마길은 직업적인 것은 아니지만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즐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손이 왕궁에서 먹고 살아야지 사람들에게 얻어먹고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왕의 기업을 받은 왕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벧전 2:9).
많은 말을 생략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작게 보이고 세상이 크게 보이는 성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에 붙어사는 성도는 비참한 인생입니다. 므비보셋의 비참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2) 그는 왕궁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았습니다.
본문 9장 4절에 『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생각하고 사울 왕가에 은혜를 베풀어주고 싶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로드발에 살고 있었습니다. 『 로드발 』( )은 '목초가 없는'이란 뜻으로 일종의 황무지 같은 척박한 지역이었음을 그 이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왕손임에도 불구하고 왕궁과는 상관없이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떨어졌기 때문에 불구자가 된 것입니다. 왜 떨어졌습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기의 조부 사울 때문입니다. 그의 조부 사울이 패전하여 난리통에 도망가다가 떨어져서 어릴 때부터 불구가 된 것입니다. 마치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죄가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에게 미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롬 5:12). 므비보셋은 불구가 된 몸으로 왕궁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선천적 불구자입니다. 인간이 영적으로 왜 불구자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영적 불구자가 된 것입니다. 불구자를 좀 거칠게 표현하면 병신입니다. 

Ⅱ. 타율(他律)에 의해 은총을 받은 므비보셋의 고백입니다.

여기 '타율'이라는 말은 '다른 규율'이라는 말로 사전적 정의는 자기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명령에 의하지 않고 다른 힘의 강박이나 구속 등에 의하여 행동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본문 9장 1절에 『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1) 므비보셋이 받은 은총은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자에 대한 은총입니다.
본문 9장 1절에 『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가가 전쟁으로 인하여 멸문지화(滅門之禍, 송두리째 가문이 망하는 큰 재앙)를 당했습니다. 
이때 남은 자에게 베풀어지는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족속들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해 요셉을 남겨두었습니다(창 45:7).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 에스더를 남겨 두었습니다(에 4:14-17). 하나님은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암 5:15).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롬 11:5).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미 5:8).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롬 9:27). 남은 자는 이미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열왕기상 19장 18절에 『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고 했습니다. 
이사야 6장 13절에 『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고 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사울 가문에 남은 자입니다. 그는 은총의 대상입니다. 그는 축복의 대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의 임마누엘 현장의 축복의 대상입니다. 

2) 므비보셋이 받은 은총은 부친 요나단으로
말미암는 은총입니다. 
본문 9장 1절에 『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이때 므비보셋의 나이는 20세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미가라는 아들도 있었습니다(삼하 9:12). 
은총에 해당하는 '헤세드'( )는 이와는 달리 언약적(言約的)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대로 택한 백성에게 부어 주시는 것과 같은 풍성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후손 므비보셋을 찾아 은총을 베풀고자하는 데는 다른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요나단은 다윗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입니다(삼상 18:3, 4; 19:1-3; 20:4-42). 둘째, 다윗은 요나단 생전에 그의 가족을 보호해 주기로 언약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0:14, 15, 42). 
므비보셋은 부친 요나단으로 인해 은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9절에 『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타율주의 종교'라고 합니다.

Ⅲ. 더 나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므비보셋의 고백입니다. 

본문 9장 3절에 『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고 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후손에게 베풀고자 하는 은총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금껏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을 기억하고 그도 타인에게 그 같은 은총을 베풀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가문에 은총을 베풀고자 하시는 이가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한 다윗의 하나님 절대 주권 사상, 즉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했습니다. 
므비보셋의 조부 사울은 결코 하나님이 원해서 세워진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한 왕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 요나단이 왕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은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므비보셋이 왕이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요나단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통해서만이 왕자의 대우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제 1아담 안에 있으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지만 제 2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죄를 지을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더 나은 제사입니다(히 11:4). 그리스도는 더 큰 제물입니다(히 11:26).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 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는 더 나은 구원입니다(왕하 5:14).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 보아스의 밭으로 간 것은 그리스도는 더 좋은 선택이었습니다(룻 4:13-17). 룻이 보아스를 통해 낳은 아들 오벳은 그리스도는 더 좋은 아들입니다(룻 4:18-22). 
그리스도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히 11:16). 그리스도는 더 좋은 부활입니다(히 11:35).

1) 더 나은 인격적 대우입니다. 
본문 9장 6절에 『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를 높여 부르는 호칭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입니다(삼하 9:6). 
므비보셋이 언제 그러한 호칭을 왕의 어전에서 들어본 일이 있는가? 이름이 있지만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퇴색되어버린 그 이름을 왕의 어전에서 공적으로 불러주었습니다. 이름을 불러 준 것은 잃어버렸던 인생을 찾아 주는 이름입니다.
바로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이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잃어버린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에서, 꼼짝 못하던 자리에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더 나은 내 이름입니다. 『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사 43:1)고 했습니다.

2) 더 나은 평안입니다. 
본문 9장 7절에 『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크고 또 큰 은혜입니까? 지금 므비보셋은 어쩔 수 없는 역사의 심판대 앞에 나온 처지가 아닙니까? 그 사실은 므비보셋 자신이 한 말 가운데 『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삼하 9:8) 하는 사실로도 충분합니다. 
므비보셋은 이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러한 므비보셋에게 평안을 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더 나은 은총입니다. 

3) 더 나은 기업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 9장 7절에 『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라고 했습니다. 본문 9장 12절에 [므비보셋에게 젊은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무릇 시바의 집에 거하는 자들은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고 했습니다. 
다윗은 기업이 그 본 주인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잊지 아니했습니다. 사울왕의 땅을 도로 찾아 준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땅과 하늘의 기업을 얻는 축복입니다. 

4) 더 나은 식탁을 받는 축복입니다. 
본문 9장 7절에 또 말하기를 『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 찌니라 』고 했습니다. 11절에도 『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고 했습니다. 
왕의 상에서 같이 먹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먹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는 음료요, 영생하는 떡입니다. 바로 주의 성찬에 참예하는 축복입니다. 

5) 더 나은 예루살렘 성으로의 환궁입니다. 
본문 9장 13절에 『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고 했습니다. 
지금은 사울왕이 다스리던 예루살렘성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왕이 치리하는 도성입니다. 예루살렘은 왕도(王都)입니다. 평화의 도성입니다. 안전과 기쁨의 상징입니다. 

이는 므비보셋이 받은 그 영예를 말합니다. 그는 왕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왕의 아들이 받은 기업을 받았습니다. 왕의 아들이 누릴 영예를 누렸습니다. 그는 항상 예루살렘에 거했습니다. 그것은 조부 사울도, 아비 요나단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다윗 왕만이 자기에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께로부터 받은 은총은 이 세상에 있는 혈육이나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힘으로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Ⅳ. 왕의 은총에 보은하는 므비보셋의 고백입 니다. 

1)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본문 9장 6절에 『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라고 했습니다. 
본문 9장 8절에 『 저가 절하여 가로되… 』라고 했습니다. 
이는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는 감은의 표현입니다.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2) 겸손한 것입니다. 
본문 9장 8절에 『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므비보셋은 이 이상 더 자기 자신의 형편을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수사를 다 동원한 것입니다. 

3) 의리를 지켰습니다. 
다윗이 나중에 자기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도망할 때 므비보셋의 종인 시바가 므비보셋을 배신하고 함께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므비보셋을 참소하여 다윗에게 이르기를 므비보셋이 이제야 자기 아비의 나라를 도로 찾겠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이 떠난 이후부터 다윗이 돌아올 때까지 그 발을 맵시내지 아니하고, 수염을 깎지 아니하고, 옷을 빨지 아니하고 기다리다가 환도하는 다윗 왕을 맞이하였습니다(삼하 16:1-4; 19:24-30). 
다행히 다윗은 이 므비보셋의 의리 있는 충성을 알아주었습니다. 그는 실로 의리의 후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므비보셋이 받은 은총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받은 은총입니다. 죽은 개는 개의 시체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개도 더러운 것인데 더욱이 자신을 가리켜 개의 시체 같다고 했으니 그가 자신을 비하하는 겸손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므비보셋과 아들은 다윗왕의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너는 왕손이라고 그를 선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죽은 개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택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라고 했습니다(벧전 2:9). 이 은혜에 감격해서 예배합니다. 이 사랑에 감격해서 주 앞에 나를 드립니다. 날 구원하신 은총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운동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골 1:24).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보은의 생활에서 오는 유형무형의 고난과 수고가 자기 십자가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결코 죽은 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의 백성들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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