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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거룩한 습관을 들여야 한다. (눅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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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거룩한 습관을 들여야 한다. (눅 4:16) 
 
 
오늘은 거룩함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구별된 창조주라는 말이고, 악과 구별된 절대 선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유한한 것들과 구별된 영원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거룩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살전 4:3에 보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거룩함을 명령하셨습니다. 레 11:45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거룩하게 보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 재림하시면 우리 모두는 주님의 보좌 앞에 서야 하는데 그 때 거룩하여 흠 없는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살전 5:23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세상과 구별되게 생각하십시오. 세상과 바라보는 것, 추구하는 것이 구별되어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 구별되어야 하고, 말하는 것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또한 행동도 구별되어야 하고, 상황에 대한 반응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함을 상실한 한국교회 
   
2008년 5월 5일 김명혁 목사님의 [책망과 거룩함이 사라진 한국교회]라는 제목의 설교문을 읽어보니 목사님께서 한국교회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 3가지를 지적하셨다. 그 3가지 중에 세 번째는 “한국교회는 지금 아부성 발언과 몸짓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목회자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죄와 허물을 지적하는 책망보다는 모든 것을 눈감아주는 아부성 발언과 몸짓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이미 오래 전에 로버트 슐러가 했다. 죄를 지적하면 안 된다고 이미 로버트 슐러가 조언을 했었다. 결국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 조언에 따라 죄에 대한 설교는 가능하면 하지 않게 되었다. 위로와 축복만 강조하게 되었다. 어느 유명한 목회자는 이런 말까지 했다. “교회의 신자들이 줄어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중진들이 주일을 범하고 주일에 다른 곳에 가서 딴 짓을 해도 모른 척하여야 합니다.”
   
결국 한국교회는 신자들이 회개와 헌신의 기본 신앙을 지니지 못해도 출석만 잘 하고 헌금만 잘 하면 신앙이 있는 것처럼 추켜 세워주게 되었다. 결국 목회자는 속이고 신자는 스스로 속아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은혜로운’ 목회라고 피차 착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 아무개가 분명히 신앙이 없는데 어느 교회에서는 신앙이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교회는 종교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사교의 장소로 바뀌어지게 된 것이었다. 피차 격려하고 추켜세우는 아부성 발언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교회는 누구나 가면 기분 좋은 곳으로 바뀌게 되었다. 서글프고 불행한 일이다.]
   
김명혁 목사님은 목사들이 교회성장에 혈안이 되어서 죄에 대한 지적과 책망을 하지 않고 성도들을 속이고 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속아서 회개하지 않고 결국은 교회의 거룩함이 상실되었다는 현실을 날카로운 지적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핍박 받는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부끄러운 교회가 된 것입니다.
   
간디는 “만일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적 삶을 충만하게 산다면 인도에는 힌두교도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살았다면 인도는 복음화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도가 복음화 되지 못한 것입니다. 
 
두 종류의 거룩함 
두 종류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첫째는 존재적인 거룩함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사람은 거룩한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고전 1:2에 보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에 소속되면 그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존재적인 거룩함은 행위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행위가 좀 부족해도 주님 안에 있으므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존재적인 거룩함은 나의 노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도를 받아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값없이 구원 받고, 값없이 영생을 얻고,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값없이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수영을 못해도 배를 타고 있으면 물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말씀대로 살지 못해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세상과 구별된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행실의 거룩함입니다. 벧전 1:14-15에 보면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 같이 모든 행실에 거룩해야 합니다.
   
행실의 거룩함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행실의 거룩함은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요즘 제 아내가 화초를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사이에 집에 화분이 10개가 넘게 생겼고, 제 사무실에도 10개의 화분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집에 화분이 들어오면 며칠이 못돼서 화초가 죽었는데 요즘은 오래갑니다. 비결이 뭘까요? 전보다 훨씬 더 관심을 갖고 돌아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물도 주지 않고 햇빛도 쪼여주지 않으니 금방 말라죽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며칠에 한 번씩 꼭 물을 챙겨주고, 창가에 내놓아서 햇빛도 보게 하고, 아주 사랑스럽게 어루만져주니 오래 가는 것입니다.
   
화초를 잘 가꾸려면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노력이 필요합니다. 존재적인 거룩함을 얻은 우리가 행실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히 12:14에 보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려면 자신의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행실의 거룩함은 거룩한 습관에서 온다. 
   
우리에게 습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습관은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좋은 습관은 우리를 성공과 축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반대로 나쁜 습관은 우리를 실패하게 만들고 패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녀 교육의 핵심은 좋은 습관입니다. 자녀에게 좋은 습관을 갖게 만들어주면 자녀는 좋은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미국 조지아 주립대학의 토머스 스탠리 교수가 [부의 세습]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미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백만장자들의 성장 과정과 기업의 성장 내용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발표에 따르면 미국 재벌의 80%가 중산층이나 노동자 출신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기업을 물려받거나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 재벌이 된 사람은 고작 20%에 불과했습니다. 스탠리 교수는 이런 결과에 대해서, 자수성가하여 큰 재벌이 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부모로부터 물질적인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좋은 습관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행실의 거룩함도 거룩한 습관에서 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평소의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예배생활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몸에 익숙해진 습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거룩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한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행실의 거룩함이 습관에서 오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거룩한 습관의 훈련입니다. 거룩한 행실이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거룩한 습관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초신자는 세속적인 습관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그 세속적인 습관을 거룩한 습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습관을 바꾸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인 습관을 거룩한 습관으로 변화시키는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몇 년을 다녀도 변화가 없고, 직분을 받아도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습관은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래된 습관일수록 바꾸기가 더 어렵습니다.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는 쉽게 뽑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은 지 1년 정도 지난 나무는 뿌리 때문에 쉽게 뽑을 수 없습니다. 심운지 이미 오래된 나무는 힘만으로는 뽑아낼 수 없습니다. 습관이라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선이든 악이든 습관을 들인 후, 그것이 오래되어 습관이 되어버리면 그 만큼 바꾸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중에 하나가 습관을 바꾸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습관은 바꿔야 합니다. 바꾸지 않으면 거룩한 삶이 불가능합니다. 
오늘은 저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거룩한 행실을 유지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 습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날마다 말씀의 양식을 먹는 습관 
   
사람은 육을 가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은 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의 양식이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육은 양식을 하루만 먹지 않고 굶어도 힘이 빠지고 사는 재미를 잃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영은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영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 4:4에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는 시간 그리고 설교를 듣는 시간 또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에 여러분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 17:17에 보면 주님께서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투명한 유리컵에 오렌지 주스를 부으면 컵의 색깔이 노란색으로 바뀌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엡 5:26,27을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는 교실 바닥은 마루였습니다. 한번은 대청소 때 제가 마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 몇 십 년 만에 제가 처음 교실 마루 밑에 들어 간 것 같았습니다. 마루 밑에 들어가 보니 거기가 보물 창고였습니다. 별별 것 들이 다 들어 있더군요. 수십 자루의 연필과 수십 개의 지우개를 주었습니다. 단추도 엄청나게 많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제일 좋았던 것은 동전을 많이 주어서 그 날 제가 횡재 했던 것입니다. 저는 교실 마루 밑에서 수많은 보물을 챙겨서 기분 좋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루 밑에서 나와서 거울을 보니 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코밑은 지저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지저분한 몸을 물로 깨끗이 씻어냈었습니다. 만약 물이 없었다면 저는 그 지저분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물은 참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물과 같아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를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려면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해야 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 분별이 되어야 거룩한 행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는 절대 기준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날마다 섭취하면 말씀은 우리 속에서 절대 기준이 되어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2. 정해진 시간 기도하는 습관 
   
딤전 4:5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이 말씀을 양식으로 먹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처럼 기도도 기도하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요즘 일본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사건으로 온 인류가 핵의 재앙으로 인해서 불안해합니다. 뉴스를 보면 ‘방사능 피폭’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방사능 피폭이란 방사능에 쏘였다는 말입니다. 방사능을 쏘이게 되면 인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방사능 피폭은 체내 피폭과 체외 피폭이 있습니다. 체내 피폭은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이나 물 혹은 공기를 통해서 체내에 방사능이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방사능이 축적되면 신체에 막대한 영향이 나타납니다. 

불임, 백혈병, 암, 탈모, 뿐만 아니라 생식 세포가 피폭되면 유전자 이상으로 기형아가 태어나게 됩니다. 체외 피폭은 방사능을 직접 쬐는 것을 말합니다. 이번에 폭발된 일본 원자력 발전소에서 작업 하던 인부들이 체외 피폭을 받은 것입니다. 체외 피복은 심하면 급성장애을 일으키기도 하고 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방사능 피폭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하지만 기도는 다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면, 방사능과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빛이 나옵니다. 그 빛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핍박자였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주님을 만날 때 그는 방사능을 직적 쪼인 체외 피폭자들처럼 주님의 빛을 직접 쬐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변화 되었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존재가 거룩해졌고, 주님에게서 나오는 빛의 힘으로 행실도 거룩해졌습니다.
   
우리 교회는 내일부터 3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합니다. 특별하다는 말은 말씀이 특별하고 기도가 특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교우들이 동참하는 기도회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입니다. 말씀도 늘 듣던 말씀일 것이고, 기도도 늘 하던 기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새벽기도회 기간 동안 우리 비전의 식구들은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빛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빛은 우리의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할 것이고, 세속에 찌들린 우리들을 더욱 거룩하게 만들 것입니다. 
 
3. 범사에 성령으로 사는 습관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성령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터치를 경험하는 사람은 거룩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사무엘 선지자를 만납니다. 사무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성령으로 충만한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 때 사울도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울에게 신비로운 체험이 나타납니다. 삼상 10:6에 보면 사무엘은 사울이 체험할 것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성령의 충만함입니다)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울이 변하여 새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구약에 보면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기름입니다. 종이를 물속에 넣으면 종이 속에 물이 스며듭니다. 그런데 기름 바른 종이는 물속에 들어가도 물이 기름 때문에 종이 속에 스며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세상 속에 살기 때문에 세상 것들이 사람 속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세속화 시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하면 기름과 같은 성령의 역사 때문에 사람이 세속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거룩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함이란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령의 충만함이란 신전의식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사람 앞에 서 있다는 사실 보다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요셉은 신전의식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가 아무도 보지 않는 집 안에서 동침을 하자고 유혹했으나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요셉은 그 현장에 사람은 없었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했던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인들에게 이런 신전의식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으로 충만하고 거룩한 행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시골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불신자였지만, 아들은 주일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가는 도중인데 무밭을 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얘야, 목이 말라 안 되겠다. 무 한 개 뽑아 먹어야겠다. 너 여기서 누가 오는지 잘 보고 있어라” 하고 무 밭에 들어가 다리통만한 무를 뽑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아들이 “아버지. 누가 봅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이쿠, 큰일 났구나’ 싶어 빨리 밭에서 나와서 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이놈아. 보기는 누가 본다고 그래. 남자가 간이 커야지. 똑똑히 지켜”라고 말하고 다시 무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까 뽑으려다가 뽑지 못한 그 무를 다시 뽑으려고 하는데, 이번에도 또 아들이 “아버지. 누가 봅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무밭에서 급히 나와 사방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이놈아. 누가 본다고 그래? 아무도 없잖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하늘에 달과 별이 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무시하면서 “쓸데없는 소리 말고, 똑똑히 지켜.”라고 말하며 다시 무밭으로 들어가서 아까처럼 다리통만한 그 무를 뽑으려고 하는데, 아들이 다시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정말입니다. 누가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번에도 헐레벌떡 나와서 “자꾸 누가 본다고 그래?”라고 말하자, 아들은 “하나님이 다 내려다보고 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쯤 되자, 아버지는 더 이상 무를 뽑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성령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고 그렇게 할 때 거룩한 행실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충만함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입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기를 원하시지만 문제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의 움직임에 민감하고 그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생활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거룩한 행실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데 가장 강력한 방해요소는 우리의 육신입니다. 육신은 내 생각과 내 감정 그리고 내 의지를 통해서 성령의 인도에 반항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고, 성령으로 거룩한 행실을 가지려면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자아를 부인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말은 아라비아말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유래가 흥미롭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말을 찾아다니던 어떤 사람이 두루 다니면서 훌륭한 말 1백 마리를 찾아내, 우리 안에 가두고 먹을 것을 충분히 주되, 물은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아름다운 시내가 흐르는 전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말들은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은 말들이 목이 말라 견딜 수 없는 상황까지 가게 한 다음, 우리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말들은 거의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말들이 거의 시냇가에 이르렀을 때, 주인은 풀피리를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1백 마리 중 4 마리만 피리소리를 듣고 멈춰 섰는데, 바로 그 네 마리 말의 조상이 아라비아말이었다고 합니다.
   
조상호 목사님은 이 명마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교훈이 있다고 말합니다. 절제하는 말이 명마로 인정받는 것처럼, 육신적인 욕구를 향해 달려가다가도 성령의 지시가 있으면 즉시 멈춰서는 사람이 진정한 성도로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육신을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거룩한 행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벧후 3장에 보면 마지막 시대에 관한 경고를 합니다. 지구의 종말에 대해서 말하면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고 말합니다.
   
요즘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주님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처처에서 기근과 지진의 소식이 들립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주님의 재림을 향해서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저와 여러분은 거룩한 습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거룩한 습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날마다 실천한다면 그것이 몸에 배게 될 것이고, 몸에 밴 거룩한 습관이 되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의 양식을 먹는 습관을 가집시다. 정해진 시간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범사에 성령으로 사는 습관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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