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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7:48

소금과 빛, 행복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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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빛 and 행복’.com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5;13-16)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關契)’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장소를 우리는 무어라고 합니까?  ‘사회(社會)’라고 하지요.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 맞습니다.  이 사회(社會)를 교회에서는 무어라고 부릅니까?  ‘세상(世上)’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하면 좀 기독교적인 표현이면서, 동시에 교회와는 구분이 되는... 다소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실제로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는 사탄입니다.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유혹하고, 죄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요일2;15-16)“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이 세상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제 대학교 신입생들에게는 이 사회, 이 세상은 장미 빛 일수 있습니다. 기대되는 것도 많고, 꿈꾸는 것도 많은 그런 곳일 수 있지요.   

그러나 졸업하여 백수로 있는 사람에게는 이 사회, 이 세상은 너무나 힘겹고 막막한 장소일 것입니다.   제 바로아래 여동생은 부산에서 고아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원아들은 제 여동생같은 사람들을 ‘엄마’라고 부르고, 실제로 가능하면 ‘엄마’처럼 해 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고아들에게는 이 세상은 잔인한 곳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버려져서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나, 부모의 이혼으로 고아원에 맡겨진 사람이거나, 그들에게는 이 세상은 정 떨어지는 곳이요, 미움이 가득한 곳이요, 또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고 힘겨운 장소일 것입니다.  이유 없이 버림을 받은 그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복수의 대상일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자폐아’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자주 보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갑니다. 불이 켜져 있으면 불을 끕니다.  책상아래나 소파 밑으로 들어갑니다.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옵니다.  책상다리를 엄마라도 되는 듯이 꼭 붙들고 버팁니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하여 마음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살아 갈일이 너무도 힘들고 어렵고 두려워서 모든 의욕을 포기하고 버립니다.  세상을 향하여 ‘콱’ 마음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에게 이 세상, 이 사회는 어떤 곳입니까?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성도여러분,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말씀을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저와 여러분들의 고민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저는 이 성경 말씀이 지진(地震)같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진(地震)이 뭡니까?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갑자기 흔들려 무너지는 것이 지진입니다.  여러분은 지진을 경험해 보았습니까? 이제 한국 사람들도 약한 지진은 한 두 번 경험해 봅니다. 저도 땅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경험 해 보았습니다. 물론 일본사람이 들으면 웃겠지요. 

저는 한번 지진(地震)같은 일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다. 대학생 때 여러 사람들과 같이 등산을 갔습니다. 올 때에 완행열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등산을 자주  다니는 한 친구가 머리 위의 기차의 짐칸에 있는 짐들을 한 쪽으로 치우더니... 그 위에 올라가서 누워 잠을 자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복잡한 완행열차에서는 그렇게 짐칸에서 누워 자는 것이 이미 습관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젊어서 좋은 것이 모험 아닙니까?  ‘애라 나도 한 번 저기서 자자’ 하고는 저도 머리위의 짐들을 한 쪽으로 모으고 올라가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몸은 피곤해도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자는 것이 처음이라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때 땅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버스나 기차를 타면 흔들립니다. 당연히 손이나 발로 중심을 잡지요. 그런데 눕는 것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눕는 다는 것을 단순히 등을 땅에 대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의 온 몸을 맡기고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저는 그때 까지는 한 번도 내가 몸을 맡기고 누운 땅이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까지는 등이 따뜻하거나, 이불이 있거나 없거나 했지 등이 움직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달릴 때 마다 온 몸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내가 누운 곳이 흔들리는 경험은 나에게 큰 불안감(不安感)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사람이 일본사람을 이해하기는 참 어렵다고 봅니다.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입니다. 즉 일본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경험을 자주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은 확실히 믿을 것이 아무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땅을 디디지 않을 수가 없는데, 땅에 몸을 눕히고 쉬어야만 하는데 그 땅이 수시로 흔들리고 갈라지면... 무엇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정신이 얼마나 불안정하겠습니까?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800만이라는 신(神)을 만든 것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은 신(神)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참 신(神)이 아닙니다. 온갖 것이 다 신(神)이 되는 곳, 그렇게라도 정신을 안정시켜야 되는 곳이 일본입니다.   일본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어떤 곳이냐고 묻는 다면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 이라고 하지 않을까요?   일본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는 성경말씀은 더욱 지진(地震) 같은 말씀일 것입니다.  

성경은 먼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여러분, 우리는 ‘소금’입니다. 이 말씀을 ‘소금이 되어라’ 고 읽으면 안 됩니다. ‘소금처럼 살자’ 도 아닙니다. 그냥 소금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 홍길동입니다.’ 하는 것처럼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소금입니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 분이 누구신가요? 저희 교회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은 우리 어머니세요.’ 하는 것처럼  ‘이분은 누구신가요? 이분은 세상의 소금이십니다’ 하는 말씀입니다. 소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소금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소금입니다. 아멘이십니까?  한번 따라 해보십시오.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  ‘당신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이상한 것은 ‘너희는 교회의 소금이니’ 라고 하지 않고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우리는 세상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말이며, 우리는 세상과 뗄레야 뗄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이 아니면 우리가 소금인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많은 경우 교회 안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다 성남 성녀입니다.  기도도 잘하고 말씀도 잘하고 또 순종도 잘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어떻습니까? 거세게 밀려오는 세파 속에서 여러분은 요동치 않고 여러분의 소금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누구나 교회 안에서는 신앙인처럼 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들이 소금답게 사는 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기억하십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우리의 상식을 흔드는 지진(地震) 같은 말씀 아닙니까?  
  
성도여러분, 우리가 소금이라는 것은 먼저,  **우리들은 아주 귀중하다.  아주 귀한 존재다 는 의미입니다.  요즘은 소금의 값이 싸기 때문에 소금의 귀중함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기록될 예수님 당시만 해도 소금은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은 소금이 흔하니 안 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소금은 많고 적음을 떠나서 여전히 그 자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할 수 없는 불편함과 불행이 있습니다. 올 스톱입니다. 소금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소금은 정결한 것의 부패를 막아주고, 이미 썪기 시작한 것은 부패의 번짐을 막고 지연시켜줍니다. 소금은 정결한 것을 썪지 않도록 해줍니다. 깨끗한 것, 아직 싱싱한 것을 여전히 깨끗하게, 여전히 싱싱하게 유지하도록 해줍니다.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그 생선이 더 이상 상하지 않지요?  이렇게 정결한 것은 썩지 않도록 해주고 또 한편으로는 썩은 것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미 썩은 것을 깨끗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소금의 한계입니다.  저나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썩은 세상, 부패한 세상은 사실 우리가 깨끗하게 못합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우리의 일은 정결한 것을 썩지 않도록, 정결한 것을 여전히 정결하도록 해주는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없으면 썩습니다. 내가 있으면 부패가 없습니다. 더 이상 부패가 진행되지 않는 것은 내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인가요? 이 일을 잘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소금은 적극적으로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간이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없습니다. 반드시 음식에는 소금이라는 간을 쳐야 그 음식이 맛이 있습니다. 결국 음식을 잘한다는 것을 소금을 알맞게 잘 넣는 분입니다.  제 친구에게서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이 친구가 커피를 좋아하는데 유독 커피맛이 너무 좋은 집이 있답니다. 그래서 그 비결이 너무 궁금해서 그 가게의 바리스타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비결을 물었답니다.  그 비결이 커피를 손님에게 내 놓을 때 소금을 아주 약간 타는 것이랍니다.  
 
가끔 불신자들이 ‘목사님 예수 믿는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살죠?’ 라고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다시 물어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무슨 재미로 삽니까?’  ‘우리야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울 수도 있고, 적당하게 즐기면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이나 성도들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술집에도 못가고... 마음껏 즐기지도 못하고 너무 답답할 것 같습니다’  

성도여러분, 이 사람들은 소금이 없는 맛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당신들의 그 재미가 계속되던가요? 그 순간에는 재미있는 것 같지만 곧 시들해지고,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돈을 함부로 소비하고 안 그런가요? 우리는 당신들이 모르는 재미가 있습니다. 하늘나라 재미입니다. 영적으로 주님과 깊이 사귈 때 오는 우리 마음의 기쁨, 당신들은 절대 모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너무 재미있고 너무 기뻐서 새벽에도 나오고, 철야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도 합니다.

 저는 이 기쁨을 오히려 여러분들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할 때도 항상 좋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남모르는 깊은 기쁨이 있기 때문에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랑은 이런 인간적인 사랑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깊은 사랑이고, 맛을 아는 사랑입니다. 소금이 있는 사랑은 맛이 있습니다. 
 
정말 세상 사람들은 사는 맛을, 인생의 참맛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맛, 육체적인 맛, 본능적인 맛은 알지만 영적인 맛, 하늘나라의 맛을 알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생을 왜 사는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우리가 저들에게 설명해주고 가르쳐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금의 맛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의 인생의 참맛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세의 영원한 맛, 하늘나라의 맛과 기쁨들을 나타냅시다. 그럼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내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성경은 두 번 째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힘쓰라고 하지 않고 이미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어두움이 아니라 세상의 빛입니다. 한번 따라해 봅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당신은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빛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나 다 빛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 “주 안에서 빛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비유를 든다면 우리는 달빛입니다.  달은 발광체가 아니지만 밤에 세상이 어두워지면, 달은 태양의 빛을 반사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에게로부터 빛을 받아서 세상을 향해서 빛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빛이 빛다운 것은 세상이 어두울 때,  밤일 때 입니다. 낮에는 빛을 비춰봐야 별로입니다. 낮에 촛불을 켠다든지 혹은 후레쉬를 비추어도 그 빛은 있으나 마나 하지 않습니까? 밤에는 안 그렇습니다.  어두울 때에는 조그마한 빛 하나가 그렇게 소중합니다.  산속에 들어가서 밤중에 길을 잃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때에 저쪽에서 빛 하나, 등불 하나가 얼마나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너무너무 어둡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 빛인 우리들이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빛의 역할은 구별하는 것입니다.  

빛이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어두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야곱은 신혼 첫날밤에 자기의 신부가 레아인지 라헬인지도 몰랐습니다.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어야 구별을 합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있으면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악을 깨닫습니다. 회개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악을 행하고도 ‘뭐 어때, 그것이 왜 잘못인데?’ 합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니...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니 회개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선이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 악입니다. 내가 그곳에 있음으로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알게 되어야 합니다. 아멘인가요? 

빛된 생활의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본문 16절에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사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근본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교회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합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정트리오 아시지요?  피아노의 정명훈, 바이올린의 정경화, 첼로의 정명화 이 사람들은 음악가족으로 너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남매는 음악으로는 세계적인 거성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마다 그 아버지 어머니를 꼭 얘기를 합니다. 자녀들을 어떻게 잘 가르쳤는지 그 부모님들 참 훌륭한 분들이라고 그 부모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칭찬을 합니다.  

저나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 많이 하고 사회 즉 세상에서 모범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누구에게 칭찬이 돌아가고 누구에게 영광이 됩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지금 많은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좀 믿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신자들을 보면 그 마음이 사라져요. 나하고 다르지도 않아요. 나보다 더해요.’ 라는 소리가 우리 때문에 들린다면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의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사람들 앞에 빛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등불에 비유하시면서 세 곳에 감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말 아래 두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5절에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아마 시골에서 사셨던 분들을 제외하곤 말이 뭔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시골에 가면 쌀, 콩 같은 곡식을 되는 되박이 있고, 또 열 되가 들어가는 말이 있습니다. 한말 두말 하거나 또 기름통이 말통입니다.  그러니까 말은 곡식이나 가루 따위의 분량을 재는 일종의 그릇입니다. 유대인들은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다 둡니다. 등경(燈檠)은 등잔걸이입니다. 보통 방의 한 귀퉁이의 꼭대기 위에 있습니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의 호롱불보다 약간 더 원시적인 호롱불입니다. 감람유에 심지를 놓아서 켜는 불인데 불을 켜도 컴컴합니다. 

그런데 이 불을 끌려고 하면 냄새가 아주 지독합니다. 그래서 불을 끌 때는 이 말 밑에다가 등불을 놓습니다. 그러면 공기가 들어가지 않으니까 말 안에 있던 산소만 없어지면 불이 꺼져버리고 냄새도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을 끈 후에 나중에 그 말을 치웁니다. 그러니까 말 아래에 둔다는 것은 불을 끌 때에 하는 것입니다.  말 아래 있다는 말은 숨어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숨어서 살면 안 됩니다. 

신자들은 나타내야 합니다. 등경 위에 있다는 인식 속에서 생활을 절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행길을 건널 때 횡단보도는 멀고, 교통순경도 없고 지나가는 차들도 없다면 살짝 지나가고 싶은 유혹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니까요. 하나님이 안 보시면 그냥 건너겠는데 하나님이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빛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비추기 위해서 등경 위에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과 9절에 아주 구체적으로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구체적으로 빛의 역할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옛날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얼마 안 되던 일제 때는 불신자들도 ‘나는 믿지 않지만 기독교인들은 틀림없어, 기독교인들은 진실해, 거짓말 안해’ 그렇게 믿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안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된 삶을 산다는 것은 모든 착한 일, 의로운 일, 특별히 진실함입니다.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시간 약속을 하면 정확하게 시간 지키고, 돈을 꾸었으면 제 날짜에 갚아야 합니다.

둘째, 평상 아래 두지 말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4장 21절은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함이냐”고 말씀합니다. 평상이란 침대입니다. 등불을 침대아래 두는 사람이 있나요? 잠시 물건을 찾기 위해서 평상아래에 등불을 비출 때는 있습니다. 그러나 등불을 평상아래 계속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찾을 것을 찾으면 등불은 다시 등경위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가 한 번 깊이 생각해보니... 아주 어두우면 무섭고 해서 평상아래에 등불을 두어서 발 아래 쪽으로만 빛이 비치도록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은은한 분위기를 위해서 등불을 평상아래 둘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신혼부부가 천장의 불은 끄고 침대머리의 분홍색 등만 켜는 것 같은 경우일까요?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른 목사님의 글을 보니 등불을 평상아래 두는 것은 안락한 생활을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상 안락에 빠지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고, 신앙이 잠들게 되며, 생명의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때때로 고난을 주십니다. 고난은 잠자는 신앙을 흔들어 깨웁니다. (엡5;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말씀합니다. 이왕이면 고난이 없이 일어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움 속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 33절은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고 말씀합니다. 움은 잘 아시지요? 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움집에 살았다고 배웠습니다. 움집은 원형 또는 사각형으로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우고 이엉으로 덮은 거주지입니다. 당시 ‘움’이란 곳간입니다. 땅을 깊이 파서 만든 어둡고 서늘한 장소로 음식물을 보관하는 곳이지요.  

‘등불을 켜서 움 속에 둔다’는 것은 범죄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등경위에 있어야 할 등불을 평상아래도 아닌 움속에 넣는 것은 아예 빛을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자 미디안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기드온을 세워주셨고, 기드온과 300 용사는 각각 항아리에 횃불을 넣은 후 미디안 진영 가까이 가서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꺼내 높이 치켜들고 외치니까 미디안 군대는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항아리는 하나님 앞에 단단한 마음을 비유합니다. 교만의 항아리, 죄악의 항아리, 불순종의 항아리, 안락의 항아리, 탐욕의 항아리, 게으름의 항아리를 깨고 빛 되신 예수를 드러내면 적이 물러가고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감추지 말고 세상에 비치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예수께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소금과 빛은 우리 신자의 정체성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망하는 것입니다.  나도 망하고 세상도 망합니다.   우리의 복은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짜지 않은 소금, 말 아래 있는 빛... 너와 나 모두에게 비극입니다.  어두운 밤 바다에 등대의 빛이 고장이 난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아이가 나쁜 일을 했는데 아무도 꾸짖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소금이 짯더라면... 등불이 등경위에 있었더라면... 하지 않겠습니까? 
  
소금으로 빛으로 사는 것은 가식(假飾)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이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여러분,  자(Rule), 규칙, 기준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일일수록, 큰일일수록 더욱 자(Rule), 규칙, 기준이 꼭 필요합니다.  법(法)없는 사회를 상상해보십시오... 천국일까요? 지옥일까요?   그래서 오늘 저의 설교의 결론은 천국신앙(天國信仰)입니다. 

세례요한의 첫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3;2)입니다.  예수님의 첫 말씀이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4;17)입니다. 마태복음의 주제는 천국(天國)입니다. 50번이 넘게 되풀이 나오는 말씀이 천국입니다. 이 천국신앙이 소금과 빛된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이 세상으로 파견 나온 사람, 사명을 가지고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마음에 항상 ‘천국신앙’이 있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개독교’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두 말할 필요 없이 저 사람들이 더 악합니다. 더 나쁩니다.  목사의 타락? 선거 부정... 저들과 비교하면 애교입니다. 훨씬 더 추악하고 상상을 넘어서는 협잡, 비리, 탐욕이 세상에는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욕을 들어야 합니다. 그들이 소금도 빛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르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죄 안 지을 이유가 없고,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죽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본래 소금이고 빛입니다.  우리나라에 1200만이라는 기독교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소금으로 빛으로  산다고 하면, 이 시대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심판을 면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주인공이 됩시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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